7161.jpg 경주 남산(南山)의 동록 통일전(東麓 統一殿) 바로 북쪽 송림(松林) 속에 둘러싸여 있다. 그 북쪽에는 선왕(先王)인 헌강왕릉(憲康王陵)이 인접하여 있다.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지름 15.7m, 높이 4m이다.

봉분의 밑부분은 가공한 장대석(長大石)을 3단(段)으로 쌓아 호석(護石)을 돌렸다. 가장 아랫단 장대석(長大石)은 지대석(地臺石)처럼 약간 밖으로 내밀게 놓았고, 그 위 2단은 이보다 약간 들여 쌓았다. 그러나 별도의 갑석(甲石)은 없다. 이외에 난간(欄干) 장식이나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은 보이지 않는다. 이와 같은 구조의 호석을 가진 신라왕릉(新羅王陵)으로는 이 능(陵)과 헌강왕릉(憲康王陵)이 있다. 봉분의 전면에는 얕은 석단(石壇) 위에 작은 석상(石床)이 놓여 있고, 석단(石壇)에서 조금 떨어진 아랫부분에 장대석이 일렬로 놓여 있다.

신라 제50대(代) 정강왕(定康王)(재위(在位) 886-887)은 본명이 김황(金晃)이고, 경문왕(景文王)의 둘째아들로 형인 헌강왕(憲康王)에 이어 즉위하였다. 재위기간이 짧아 별다른 치적은 보이지 않으며,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887년 7월에 왕이 죽자 시호(諡號)를 정강(定康)이라 하고 보제사(菩提寺)의 동남쪽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현재 정강왕릉(定康王陵)과 헌강왕릉(憲康王陵)의 북쪽 가까이에 통일 신라 석불좌상(石佛坐像)이 있어 그곳을 보제사(菩提寺)라 하고 있다. 그러나 이 능(陵)과 인접하여 있고 호석(護石)의 구조도 같은 형식인 헌강왕릉(憲康王陵)의 내부가 1993년 조사되었는데, 그 석실(石室) 구조와 출토유물은 8세기 이후로는 내려오지 않는 형식이어서 이 왕들의 재위 시기와는 큰 차이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