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시가지에서 서남쪽으로 멀리 떨어진 구릉 경사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 능(陵) 남쪽 가까이에 희강왕릉(僖康王陵)이 있다.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지름 12.5m, 높이 3.8m이다. 이 왕릉(王陵)은 광복 이전에 두 차례나 도굴당하였고, 1981년에도 도굴 미수사건이 있었다. 1984년 9월에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봉분과 주변을 발굴조사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봉분의 밑부분에는 가공석(加工石)으로 호석(護石)을 축조하였는데, 밑에 지대석(地臺石)을 놓고 그 위에 가공한 장대석(長大石)을 3단(段)으로 쌓아올린 다음 갑석(甲石)을 덮었다. 이 호석(護石)에는 또 두께 35㎝, 길이 100-130㎝의 단면 5각형으로 가공한 지주석(支株石) 20개를 봉분의 둘레를 따라 190∼290㎝ 간격으로 받쳤는데, 조사 결과 이는 후에 보축(補築)한 것이었다. 능(陵) 전방에는 장방형 판석(長方形 板石) 2매로 조립한 작은 상석(床石)이 놓여 있다.
봉분 주변에 대한 조사결과 봉분 밑둘레 외곽으로 깊이 13㎝, 지름 25㎝ 크기의 구멍 12개를 일정한 간격으로 파고 납석제(蠟石製)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하나씩 묻었던 것을 알게 되었다.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은 높이 10㎝ 내외의 작은 것으로 무덤의 바깥쪽을 향하게 놓여졌다. 조사 당시에는 쥐·소·닭·돼지상 등 4가지 상만 발견되었는데, 나머지는 호석(護石) 받침석이 세워질 때 파손되고 없어진 것으로 추정되었다.
능(陵) 주변에서 능(陵)이 축조된 뒤에 매장된 골호(骨壺)가 발견되었는데 뚜껑에 '원화십년(元和十年)'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이것은 중국 당(中國 唐)나라 때의 년호(年號)로서 서기 815년에 해당한다.
신라 제44대 민애왕(閔哀王)(재위(在位) 838-839)은 본명이 김명(金明)이고, 대아찬, 충공(忠恭)의 아들이다. 이홍(利弘)과 더불어 희강왕(僖康王)을 협박하여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지만 그도 역시 곧 피살되었다. 재위기간은 왕위쟁탈전의 혼란한 시기였으며, 별다른 치적도 남기지 못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그의 피살사건과 예(禮)를 갖추어 장사지냈다는 사실만 전할뿐 장지(葬地)에 대해서는 전하는 바가 없다. 또한 원화 십년명 골호(元和 十年銘 骨壺)가 이 능(陵)이 조성된 뒤에 묻혀, 이 능(陵)은 서기 815년 이전에 축조된 것으로 보아야 하므로 민애왕(閔哀王)의 연대와는 맞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