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62.jpg 경주 남산(南山)의 동록 통일전(東麓 統一殿) 북쪽 가까이에 송림(松林)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바로 남쪽에 정강왕릉(定康王陵)이 있다.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서 지름 15.3m, 높이 4.2m이다.

봉분의 밑부분에는 길이 60-120㎝, 너비 30㎝ 내외의 가공한 장대석(長大石)을 4단(段)으로 쌓은 호석(護石)을 둘렀다. 가장 아랫단 장대석은 지대석(址臺石)처럼 약간 밖으로 내밀게 놓았으나 갑석(甲石)은 덮이지 않았다. 이와 같은 호석(護石)의 구조는 이 능(陵) 남쪽에 있는 정강왕릉(定康王陵)과 같은 형식이다. 능(陵) 전면에는 장대석(長大石)으로 짠 석상(石床)이 있을 뿐 다른 장식물은 놓이지 않았다.

이 능(陵)은 일찍이 도굴(盜掘)의 피해를 입어 1993년 우기(雨期)에 석실 개석(石室 蓋石)과 벽 일부가 내려앉아 내부의 긴급 수습조사를 거쳐 복원되었다. 조사 결과 석실(石室)은 평면 방형(方形)에 궁륭상천정(穹륭狀天井)이었으며, 남쪽으로 난 연도(선도)는 석실 동쪽으로 편재(편재)되어 있었다. 석실(석실) 서벽(서벽)에 붙여 1대의 1인용 시상(시상)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석제 두침(石製 頭枕)과 족좌(足座)가 출토되었다. 부장품(副葬品)은 모두 도굴되었으나 인화문토기편(印花紋土器片)이 약간 수습되었다. 그런데 석실(石室)의 구조나 토기(土器)는 8세기 이후로는 내려오지 않는 형식(形式)이어서 헌강왕(憲康王)의 재위시기와는 큰 차이가 있었다.

신라 제49대 헌강왕(憲康王)(재위(在位) 875-886)은 본명이 김정(金晸)이고 경문왕(景文王)의 장자이며, 왕비는 의명부인(懿明夫人)이다. 이 왕(王) 때 백성의 집은 지붕을 갈대로 덮지 않고 기와로 덮었으며, 밥을 짓는 데는 나무를 쓰지 않고 숯으로 지었으며, 거리마다 노랫소리가 가득하였다고 한다. 또한 일본왕(日本王)이 사신을 보내 황금(黃金) 등을 바치기도 하였다고 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886년 7월에 왕(王)이 죽자 시호(諡號)를 헌강(憲康)이라 하고, 보제사(菩提寺) 동남쪽에 장사지냈다고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