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궁궐,왕릉 이야기

왕릉 이야기,25대 철종 예릉

문성식 2010. 8. 26. 19:55

 

   제25대 철종(哲宗)과 비(妃) 철인왕후(哲仁王后) - 예릉(睿陵)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 산37-1 {西三陵 소재}
사 적 : 제 200 호

睿陵의 특징
 : 조선조 제25대 哲宗(이변, 속명 이원범 : 1831 - 1863, 재위 14년)과 비 철인왕후 김씨(哲仁王后金氏 : 1837 - 1878)의 예릉은 서삼릉(西三陵)의 세 번째 능으로 쌍릉(雙陵) 형식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다음 대인 고종(高宗)과 순종(純宗)이 황제릉(皇帝凌)의 형식으로 조성되었기 때문에 예릉(睿陵)은 조선조 왕릉(王陵) 형식의 마지막 능(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릉의 상설(常設)제도를 보면 왕과 왕비릉의 봉분(封墳)은 난간석(欄干石)으로 연결되어 있고, 병풍석(屛風石)은 설치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장명등(長明燈)의 위치가 상석(床石)과 많이 떨어져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전형적인 왕릉(王陵)의 틀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哲宗代의 사료(史料)

연도

재위

사  료(史料)

 

연도

재위

사  료(史料)

1850

1년

7월, 황해도 가작(加作)의 폐 금함

1858

9년

2월, 금,은,동의 채굴을 금지함

1851

2년

7월, 김정희 북청으로 유배

10월, 원자(元子) 탄생{익년 사망}

10월, <헌종실록(憲宗實錄)> 간행

1860

11년

7월, 경희궁(慶熙宮)을 수리함

12월, 왕 친정(親政)을 시작함

9월, 최재우 동학(東學) 창시

1852

3년

4월, 삼남(三南)의 방곡(防穀) 금함

1861

12년

11월, 김정호 대동여지도 간행

1853

4년

9월, 소나무를 벌목하지 못하게 함

1862

13년

2월, 진주 민란(民亂) 일어남

1854

5년

4월, 러시아배 함경도에서 백성 살상

3-10월, 전국 각지에서 민란 발생

1856

7년

10월, 김정희(金正喜)죽음{1786 -}

1863

14년

11월, 동학교주 최재우 체포

1857

8년

8월, 대왕대비 김씨{순원왕후}죽음

12월, 왕 승하,  흥선군 차남 즉위{고종}

순종(純宗)의 묘호를 순조(純祖)로 변경

대왕대비 조씨 수렴청정

뒷 이야기
 : 후사(後嗣)가 없이 승하(昇遐)한 헌종(憲宗)의 뒤를 이어 즉위(卽位)하게된 철종(哲宗)은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안동김씨(安東金氏) 세도정권(勢道政權)의 집권(執權) 연장책(延長策)으로 그들에 의해 선택된 국왕(國王)이었습니다. 곧, 철종은 영조(英祖)의 아들인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아들 은언군(恩彦君) 이인의 손자(孫子)이고, 아버지는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 이광입니다. 그런데 조부(祖父)인 은언군은 영조대에 상인(商人)들과의 빚 문제가 발각되어 제주도로 귀양을 갔다가 강화도에 안치(安置)되고, 1801년 순조(純祖) 원년 신유사옥(辛酉邪獄) 때 천주교도(天主敎徒)였던 그의 처와 며느리로 인하여 함께 처형(處刑)을 당합니다. 또한 헌종(憲宗) 10년[1844년]에 철종의 형이었던 회평군(懷平君)이 반역(叛逆)에 연루(連累)되어 처형당하고 이때 어렸던 철종 역시 강화도로 유배(流配)되어 농사일로 지내게 되어 흔히 철종을 '강화 도령'이라 불리게 됩니다.
 1849년 19세의 나이로 당시 대왕대비(大王大妃)인 순조(純祖)의 비 순원왕후(純元王后)에 의해 왕위에 오른 철종은 권력에서 소외(疎外)되는 국왕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러나 철옹성(鐵甕城)과도 같았던 안동 김씨의 세도 정권이 그 절정에서 서서히 말기적(末期的)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시기가 또한 철종 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세도 정권이 지닌 모순(矛盾)들이 그대로 노출되기 시작한 증거로 철종로 말기의 전국적인 민란(民亂)을 들 수 있습니다. 탐관오리(貪官汚吏)들의 수탈(收奪)에 견디다 못한 농민들의 반란은 결국 안동 김씨 세도 권력을 몰락시키는 한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 것입니다.
 아울러 더욱 가속화되었던 서양(西洋) 제국주의(帝國主義) 열강(列强)들의 통상(通商) 요구나 계속적인 탄압에도 불구하고 급격한 확산을 가져온 천주교(天主敎) 세력 등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세도 정권이 야기(惹起)시킨 필연적인 결과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권력에 의한 미봉(彌縫)적 대처와 함께 민족 내부적으로 발생한 민족적(民族的) 종교(宗敎)인 동학(東學)의 창도(創道)는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국내외(國內外)의 혼란한 정세는 안동 김씨 세도 권력의 종말(終末)을 고하고 마는데, 33세의 나이로 승하한 철종(哲宗) 역시 영혜옹주(永惠翁主) 외에 후사(後嗣)가 없어 다음 대의 국왕을 물색하던 중 풍양조씨(豊陽趙氏) 가문이었던 추존왕(追尊王) 익종(翼宗)의 비인 왕대비(王大妃)  신정왕후(神貞王后)가 이하응(李昰應)과 손잡고 그의 아들을 즉위시켜 고종(高宗)을 삼아 흥선대원군(興善大院君)의 시대를 맞이하게 됩니다.

哲仁王后 金氏 약사(略史)
 철인왕후 김씨는 1837년 안동김씨(安東金氏) 집안인 영은부원군(永恩府院君) 김문근(金汶根)의 딸로 태어나 철종 2년[18  년]에 왕비(王妃)에 책봉(冊封)됩니다. 하지만 그녀의 왕비 책봉은 안동 김씨 세도 정권의 권력(權力) 유지(維持)를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이루어진 것이었기에, 철인왕후는 철종 승하(昇遐)후 흥선대원군(興善大院君)의 집권(執權) 아래에서 대비(大妃)로 여생을 보내다가 고종(高宗) 15년[1878년] 42세의 나이로 승하해 서삼릉(西三陵) 내 철종의 예릉(睿陵)에 안장(安葬)됩니다.
 

출처 :문화 사랑 오솔길 원문보기   글쓴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