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궁궐,왕릉 이야기

왕릉 이야기 ,추존 익종[문조]-수릉

문성식 2010. 8. 26. 19:58

 

 

  추존 익종(翼宗)[문조(文祖)]와 비(妃) 신정왕후(神貞王后) - 수릉(綏陵)

 

 

소재지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62 {東九陵 소재}
사 적 : 제 193 호

綏陵의 특징
 : 순조(純祖)의 아들이자 헌종(憲宗)의 아버지인 추존왕(追尊王) 翼宗(이영 : 1809 - 1830)과 비 신정왕후 조씨(神貞王后趙氏 : 1808 - 1890)의 수릉은 몇 차례 능지(陵地)가 옮겨지다가 현 동구릉(東九陵) 경내(境內)로 자리잡습니다. 세자(世子) 때 승하{헌종 즉위 후 익종으로 추존}한 익종(翼宗)은 20대 경종(景宗)과 계비(繼妃) 선의왕후(宣懿王后)를 모신 서울시 성북구에 위치한 의릉(懿陵) 옆에 자리잡았는데, 헌종 12년[1846년]에 길지(吉地)로 옮기자는 논의에 따라 양주군(陽州郡) 용마산(龍馬山) 기슭으로 천장(遷葬)합니다. 그 후 철종(哲宗) 6년[1855년]에 현 위치인 태조(太祖)의
건원릉(健元陵) 옆으로 다시 천장을 하면서 동구릉의 마지막 아홉 번째 능이 되었고, 이로 인해 東九陵이라는 명칭이 사용되게 됩니다. 문조(文祖)라는 시호로 많이 불리는 것은 대한제국 성립 후 1899년에 황제(皇帝)로 추존(追尊)되면서 문조익황제(文祖翼皇帝)라 칭한 것에 연유합니다.
 22세의 나이로 요절(夭折)한 익종(翼宗)과는 달리 83세의 장수(長壽)와 권력의 정상에 있었던 신정왕후(神貞王后)는 고종(高宗) 27년에 승하해 수릉(綏陵)에 합장(合葬)을 합니다.

  추존(追尊)의 약사(略史)
{孝明世子 - 翼宗[文祖]} : 젊은 나이에 요절한 익종(翼宗)은 순조(純祖)와 순원왕후 김씨(純元王后金氏)의 슬하에서 장자(長子)로 태어났습니다. 4세 때[순조 12년] 세자(世子)로 책봉되어 효명(孝明)의 시호(諡號)를 받고 1827년[순조 27년]에 왕명(王命)으로 대리청정(代理聽政)을 하는데, 민정(民政)에 힘써 어진 인재들을 등용하고 형벌(刑罰)을 삼가는 등 적극적인 왕권(王權)의 강화에 힘썼지만 안타깝게도 대리청정 4년만에 요절하고 맙니다. 결국 다시 세도정권(勢道政權)의 힘이 강해지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 것입니다.

{神貞王后 趙氏} : 풍양조씨(豊壤趙氏) 풍은부원군(豊恩府院郡) 조만영(趙萬永)의 딸로 태어난[순조 8년] 신정왕후(神貞王后趙氏)는 순조 19년[1819년]에 세자빈(世子嬪)에 책봉되어 슬하에 헌종(憲宗)을 생산합니다.
 신정왕후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익종(翼宗)이 요절함으로 인해 외로운 일생을 보냈지만, 그 보다는 국가 권력의 정상에 군림(君臨)하고 마친 일생이 더욱 화려하다 할 것입니다. 곧 안동김씨(安東金氏) 세도정권의 중심이었던 순조(純祖)의 비(妃) 순원왕후(純元王后)가 승하하자[1857년, 철종 8년] 새로운 세도정권 세력으로 풍양조씨(豊壤趙氏)가 권력을 잡게 되는데, 결정적 요인은 헌종(憲宗)의 외척(外戚) 세력이 바로 풍양조씨였던 것입니다.
 풍양조씨 세도정권의 중심이었던 신정왕후는 철종(哲宗)이 후사(後嗣)없이 승하하자 철종의 후계자 결정에 권한을 쥐고 평소 친분이 있었던 종친(宗親) 이하응(李昰應)을 권력의 내부로 끌어들인 고종(高宗) 승계를 주도합니다. 결국 어린 고종(高宗)을 대신해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면서 권력을 흥선대원군(興善大院君)에게 인계하는 역할을 한 것입니다.
 

출처 :문화 사랑 오솔길 원문보기   글쓴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