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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141-1< 洪裕陵 소재 > 사 적 : 제 207 호
洪陵의 특징 조선의 제26대 국왕(國王)이자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초대 황제(皇帝)이기도 했던 고종(이재황(李載晃) : 1852-1919, 재위 44년)과 황후(皇后)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閔氏: 1851-1895)의 홍릉(洪陵)은 같은 능역(陵域)에 있는 고종의 아들 순종(純宗)과 황후(皇后), 계후(繼后)를 모신 유릉(裕陵)과 함께 새로운 양식의 능 제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능역 조성은 처음 명성황후가 1895년에 시해(弑害)된 뒤 우여곡절을 겪고 동구릉 내에 숙릉(肅陵)으로 조성했다가, 대한제국 수립과 함께 서울 청량리로 옮겨 홍릉(洪陵)으로 조성합니다. 그 후 1919년에 고종이 승하(昇遐)하자 현재의 위치로 다시 천장(遷葬)해 합장릉(合葬陵)의 형식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홍릉의 능제는 유릉(裕陵)과 함께 이전의 조선 왕릉 제도와 많이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데, 그것은 고종이 대한제국의 황제(皇帝)로 승하했기 때문에 명(明)나라 태조의 효릉(孝陵)을 본떠 황제릉(皇帝陵)으로 조성된 것입니다. 즉, 종래의 능원 앞의 정자각(丁字閣)을 대신해서 정면 5칸, 측면 4칸의 침전(寢殿)을 세웠고 봉분(封墳) 주위에 있던 석인(石人: 문,무인석)과 석수(石獸)들이 아래로 내려와 침전 앞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거대한 크기의 석인(石人)이 좌우로 도열해 있는데, 문인석(文人石)이 금관(金冠)을 쓰고 있는 모습이 특이하고 대체로 조선왕릉 석인(石人)의 전통적인 방법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아래 양쪽의 석수(石獸)들 역시 종래의 석인(石人) 뒤에 석마(石馬)만 세웠던 것과 달리 좌우의 문무인석과 같은 열로 홍살문(紅--門)까지 기린, 코끼리, 해태, 사자, 낙타, 말 두 마리의 순서로 세워놓았습니다. 봉분(封墳)에는 화려한 병풍석(屛風石)을 감싸 장조(莊祖)의 융릉(隆陵)과 같은 연화(蓮花)와 모란무늬를 조각했고 난간석(欄干石)으로 둘레를 보호하고 있습니다. 상석(床石) 앞의 장명등(長明燈)은 사각(四角) 형식은 동일하나, 대석(臺石)이 기존 방식과 다른 변화된 형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홍릉(洪陵)의 새로운 능제는 조선(朝鮮)이 망한 이후에 조성되어 종래의 왕릉 제도가 발전된 모습으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를 것입니다.
고종대의 史料
연도 |
재위 |
사 료(史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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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
재위 |
사 료(史料) |
1864 |
1년 |
3월, 동학교도 최제우 사형 |
1894 |
31년 |
1월, 동학혁명 일어남 |
1865 |
2년 |
3월, 비변사(備邊司)의정부에 흡수 |
6월, 청일 양국 군함 수원부 풍도 앞바다에서 충돌 |
윤5월, <철종실록(哲宗實錄)> 완성 |
6월, 갑오경장(甲午更張) 시작 |
1866 |
3년 |
7월,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 평양에서 군민에게 불탐 |
12월, 홍범(洪範) 14조 제정 |
1895 |
32년 |
3월, 동학당 전봉준(全琫準) 사형 |
8월, 불란서 함대 강화도 점령[병인양요] |
8월,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 |
1867 |
4년 |
11월, 경복궁 근정전 완성 |
9월, 태양력(太陽曆) 실시 조명함 |
1868 |
5년 |
4월, 옵페르트 남연군묘 도굴미수 |
11월, 단발령(斷髮令) 내림 |
1870 |
7년 |
12월, 세자 묘호를 원(園)으로 함 |
1896 |
33년 건양 1년 |
1월, 건양(建陽) 연호를 사용함. |
1871 |
8년 |
3월, 사액 47곳 제외한 서원 철폐 |
2월, 아관파천(俄館播遷) |
4월, 미군함 강화전투[신미양요] 척화비(斥和碑) 세움 |
4월, 서재필 <독립신문> 발간 |
1873 |
10년 |
11월, 왕 친정(親政)을 시작 |
1897 |
34년 광무 1년 |
8월, 연호를 광무(光武)로 고침 |
1876 |
13년 |
2월, 강화도조약[병자수호조약] |
10월, 황제즉위식, 국호 대한 정함 |
1881 |
18년 |
1월, 신사유람단 일본에 파견 |
11월, 명성황후 국장(國葬) 거행 |
4월, 별기군(別技軍) 설립 |
1988 |
35(2) |
2월, 흥선대원군 죽음 |
1882 |
19년 |
4-5월, 영국,미국,독일 수호조약 |
1899 |
36(3) |
5월, 서울 전차(電車) 운행 |
6월, 임오군란(壬午軍亂) 일어남 |
9월, 인천-노량진 경인철도 개통 |
1883 |
20년 |
1월, 태극기(太極旗) 국기로 정함 |
11월, 사도세자 장조(莊祖)로 추존 |
1884 |
21년 |
윤5월, 김옥균 등 개화파 민씨일족 죽이고 신정부 수립[갑신정변] |
1904 |
41(8) |
2월, 일본 인천 앞 바다에서 러시아 함대 격파 |
1885 |
22년 |
12월, 배재학당(培材學堂) 설립 |
8월, 1차 한일협약 성립 |
1886 |
23년 |
4월, 프랑스 수호조약 조인 |
1905 |
42(9) |
11월, 제2차한일협약[을사륵약] |
1889 |
26년 |
10월, 함경감사 조병식 방곡령선포 |
11월, 장지연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황성신문 정간당함 |
12월, 영종(英宗)의 묘호(廟號)를 영조(英祖)로 함 |
1906 |
43 (10) |
2월, 통감부(統監部) 설치 |
1892 |
29년 |
12월, 동학교도 교조(敎祖) 신원(伸寃) 호소 |
12월, 최익현 대마도에서 죽음 |
뒷 이야기 고종은 영조(英祖)의 현손(玄孫)인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철종(哲宗)이 후사(後嗣) 없이 승하[1863년]하자 추존된 익종(翼宗)의 비(妃)였던 당시 존장자(尊長者)인 조대비(趙大妃 : 신정왕후)의 전교(傳敎)로 익종의 대통을 계승하는 것으로 지명해 12세의 나이에 즉위합니다. 처음에는 조대비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였으나, 국정(國政)을 협찬하게 한다는 명분으로 정권이 대원군에게 넘어가 이로부터 흥선대원군의 10년 집정시대가 열립니다. 대원군 집권 초기에는 세도정치와 붕당문벌(朋黨門閥)의 타파, 비변사(備邊司)의 폐지 및 삼군부(三軍府)의 설치, 한강 양화진(楊花津)의 포대(砲臺) 구축, 양반에게 신포징수(身布徵收) 등의 치적도 있었지만, 경복궁 중수(重修)나 당백전(當百錢) 발행에 따른 국가재정의 파탄, 천주교도 탄압, 병인양요(丙寅洋擾), 신미양요(辛未洋擾) 등 근세조선의 고난한 정치적 역정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1873년[고종 10년] 대원군이 섭정에서 물러나 고종이 친정(親政)에 들어갔는데, 이때부터 정권은 명성황후와 그 일족인 민씨 척족(戚族)의 세도정치가 다시 시작되어 고종은 왕비 민씨와 대원군의 세력다툼 와중에 놓이게 됩니다. 곧 고종은 운요호사건[雲揚號事件]을 계기로 1876년 일본과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 병자수호조약(丙子修護條約))을 맺어 쇄국정책(鎖國政策)을 무너뜨리고, 근대 제국주의(帝國主義) 국가들에 대한 문호 개방과 함께 새로운 문물에 접하게 됩니다. 이어 고종은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을 파견하고 신식 군대인 별기군(別技軍)을 창설하였으나 이에 대한 반동으로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나고 갑신정변(甲申政變)을 겪는 등 개화파와 수구파의 격돌은 가속화됩니다.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으로 청일전쟁(淸日戰爭)이 유발되고, 일본이 승리하자 친일파는 대원군을 영입하고 김홍집(金弘集) 등의 개화파가 혁신내각을 조직하여 모든 제도를 바꾸는 갑오개혁(甲午改革)을 단행합니다. 하지만 이로부터 일본은 본격적으로 내정을 간섭하게 되었고, 이에 반발한 민씨 일파는 친러시아 내각을 구성했으나, 이에 맞서 일본공사 미우라고로[三浦梧樓]는 1895년 8월 대원군을 받들고 일본인 자객(刺客)들을 앞세워 경복궁(景福宮)으로 들어가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하자 고종은 세자와 함께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행합니다. 이후 고종은 1897년 러시아와 일본의 협상에 따라 경운궁(慶運宮: 덕수궁)으로 환궁, 8월에 연호(年號)를 광무(光武)라 하고, 10월에는 국호(國號)를 대한(大韓), 왕을 황제(皇帝)라 하여 황제즉위식을 가지게 됩니다. 하지만 1904년[광무 8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고문정치(顧問政治)를 위한 제1차 한일 협약을 체결하고, 다음 해[1905년] 11월에는 제2차 한일 협약인 을사륵약(乙巳勒約)을 체결하여 외교권을 빼앗고, 1906년에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합니다. 이에 고종은 1907년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 이준(李儁) 등을 파견하여 국권회복을 기도하였으나 실패하고, 오히려 이 사건 때문에 일본의 협박으로 황태자[순종]에게 양위(讓位)하고 퇴위, 순종황제로부터 태황제(太皇帝)의 칭호를 받고 덕수궁에서 만년을 보내게 됩니다. 이와 같이 근세의 격동기에 국운(國運)과 함께 했던 고종은 양위 3년 뒤에 경복궁에 일장기(日章旗)가 걸리는 경술국치(庚戌國恥)의 비운을 맞이하고, 1919년 1월 21일에 일본인에게 독살(毒殺) 당했다는 의혹이 있는 가운데 생을 마감합니다.
明成皇后 약사(略史) 명성황후 민씨는 본관 여흥(驪興)인 증(贈) 영의정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민치록(閔致祿)의 딸로 태어났으나 9세 때 고아(孤兒)가 되어 본가에서 가난하게 자라다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부인인 부대부인(府大夫人) 민씨의 추천으로 왕비에 간택, 책봉됩니다. 명성황후는 역대 어느 왕비보다 파란만장(波瀾萬丈)한 삶을 살았던 여인인데, 특히 권력의 정상에 군림(君臨)하기도 했지만 안타깝게도 유일하게 천수(天壽)를 다하지 못하고 타살(他殺)된 왕비이기도 합니다.
그녀는 흥선대원군에 대한 불만으로 반대파를 규합, 민씨 척족을 정부 요직에 앉히고 세력 기반을 다져 나가다가 결국 고종에게 친정(親政)을 선포하게 하여 민씨의 외척(外戚) 정권을 수립합니다. 또한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으로 민씨 일족이 실각하자 청나라를 개입시켜 개화당(開化黨) 정권을 무너뜨리기도 하지만 일본세력에 의해 친일(親日) 내각이 득세하고, 1994년에 흥선대원군이 재 등장해 갑오경장(甲午更張)이 시작되자, 이번에는 러시아와 결탁하여 일본과 맞서기도 합니다. 하지만 일본은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조선의 존엄을 무참하게 깨뜨리고 맙니다. 1895년 8월 20일에 깡패를 궁중에 침입시켜서 명성황후를 난자시해(亂刺弑害)하고 시신(屍身)은 궁궐 밖으로 운반 소각해 버립니다. 그 뒤 일제의 강압으로 폐위되어 서인(庶人)까지 되었다가 복호(復號)되었고, 1897년[광무 1년]에 명성(明成)이라는 시호가 내려지고, 그 해 11월 국장(國葬)으로 청량리(淸凉里)에 홍릉(洪陵)으로 옮겨져 조성되었다가 후에 고종(高宗)과 함께 현 위치에 자리잡습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당시 조선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지만, 여기에서 우리는 최소한 그녀를 호칭할 때 민비(閔妃)가 아닌 정식 호칭인 명성황후(明成皇后)라 불러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 역사의 자존심을 지키는 최소한의 노력이 아닐까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