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궁궐,왕릉 이야기

왕릉 이야기,23대 순종-인릉

문성식 2010. 8. 26. 20:00

 

 

  제23대 순조(純祖)와 비(妃) 순원왕후(純元王后) - 인릉(仁陵)

 

 

소재지 : 서울시 강남구 내곡동 산 13-1 {獻仁陵 소재}
사 적 : 제 194 호

仁陵의 특징
: 純祖(이공 : 1790 - 1834, 재위 34년)와 비 순원왕후 김씨(純元王后金氏: 1789 - 1857)의 인릉은 본래 순조(純祖) 승하 후 경기도 파주에 있는 인조(仁祖)의 장릉(長陵) 옆에 조성했다가 현재의 위치인 태종(太宗)의
헌릉(獻陵) 옆으로 천장(遷葬)되었고 순원왕후도 함께 합장(合葬)되었습니다. 난간석(欄干石)으로 둘러 쌓여 있는 봉분(封墳)에 상석(床石) 하나를 설치해 놓았으며 기타 석물(石物) 역시 정연하게 갖추어져 있습니다. 같은 강남 지역에 있는 선정릉(宣靖陵 :성종과 중종)이 도심의 빌딩 숲 속에 포위되어 있는 것과 비교하면 그나마 헌인릉(獻仁陵)은 자연(自然)과 어우러져 있어 다행입니다.

純祖代의 사료(史料)

연도

재위

사  료(史料)

 

연도

재위

사  료(史料)

1801

1년

1월, 대왕대비[정순왕후] 천주교 금함

1818

18년

8월, 정약용 강진에서 유배 해제

2월, 신유사옥(辛酉邪獄) 일어남

1819

19년

윤4월, 김정희 문과에 급제

1802

2년

8월, 하늘에 일식 현상이 일어남

8월, 조만영의 딸 세자빈 책봉

10월, 김조순의 딸{순원왕후}왕비 책봉

1821

21년

3월, 왕대비 김씨 승하[1753 - ]

1804

4년

1월, 대왕대비 수렴청정을 그침

1823

23년

7월, 유생들 만인소 올려 서얼 임용 요청

1805

5년

1월, 대왕대비 승하{1745 - }

1826

26년

6월, 지진(地震)이 발생함

8월, <정조실록(正祖實錄)> 완성

1827

27년

2월, 왕세자 대리청정(代理聽政)함

1808

8년

1월, 북청,서천 등지에서 폭동이 일어남

1828

28년

12월, 전국 호구(戶口)조사 실시

1809

9년

8월, 원자[익종] 탄생

1830

30년

5월, 정약용 승지에 복귀, 왕세자 병사

1811

11년

12월, 홍경래의 난이 일어남

5월, 왕세자{익종} 병사

1812

12년

4월, 관군 정주성 수복, 난 진압

1833

33년

3월, 한양 쌀값 폭등으로 곡물전 습격

1815

15년

6월, 경상도 천주교도 300여명 검거

1834

34년

11월, 왕 승하{1790 - }

12월, 혜경궁 홍씨 승하{1735 - }

11월, 왕세손{헌종} 즉위

1817

17년

6월, 신라 진흥왕 북한산 순수비 발견

11월, 대왕대비[순원왕후] 수렴청정함

뒷 이야기
 순조는 증 영의정(贈領議政) 판돈녕부사(判敦寧府使) 박준원(朴準源)의 딸인 수빈 박씨(綏嬪朴氏)의 소생인데, 정조의 비 효의왕후(孝懿王后)의 소생인 문효세자(文孝世子)가 요절하자 순조를 세자(世子)로 책봉합니다.
 그런데 정조(正祖)의 갑작스런 승하로 11세에 즉위한 어린 임금을 대신한 증조모(曾祖母) 대왕대비(大王大妃: 영조(英祖)의 계비(繼妃))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金氏)의 수렴청정(垂簾聽政)은 외척(外戚)의 세도정치(勢道政治)가 시작되는 출발점이 되었고, 이로 인해 조선조(朝鮮朝) 후기(後期)에 마련되었던 영정조대(英正祖代)의 문화적 황금기(黃金期)가 막을 내리기 시작한 때가 바로 순조대(純祖代)입니다.

순조는 정조 14년인 1790년에 태어나 1800년에 왕위에 올랐고 34년을 재위(在位)하고 1834년에 승하합니다. 순조의 즉위는 천주교(天主敎) 서학(西學)의 탄압으로 시작됩니다. 바로 벽파계(僻派系)의 대표였던 정순왕후(貞純王后)는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면서 시파계(時派系) 남인(南人)과 남인 중심의 실학사상가(實學思想家)들을 제거하기 위한 일대 숙청으로 신유박해(辛酉迫害)를 일으킵니다. 천주교 금지를 명분(名分)으로 천주교도들은 물론이고 정약용(丁若鏞) 형제, 이승훈(李承薰), 이가환(李家煥) 등의 남인계 시파와 자수한 청(淸)나라 신부 주문모(周文謨) 등을 비롯한 300여명을 살해하고 유배시킵니다.
 결국 신유박해를 시작으로 안동 김씨(安東金氏)의 세도정치(勢道政治)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그 후 순조 재위 시절에 몇 차례의 천주교 탄압은 세도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계속되어 이 후 헌종(憲宗) 때의 기해박해(己亥迫害)[1839년], 고종(高宗) 때의 병인박해(丙寅迫害) 등으로 이어져 쇄국정책(鎖國政策)의 수단이 됩니다.
 이와 같은 세도정치의 폐해(弊害)는 당연히 일반 농민들에게 돌아갔습니다. 국가 권력 구조가 의정부(議政府)에서 비변사(備邊司)로 넘어가고 그 요직(要職)을 독차지하는 세도 권력의 전횡(專橫)으로 인해 진보적 학자들의 중앙 진출이 봉쇄되고 삼정(三政)의 문란으로 인한 농민들의 수탈(收奪)이 극에 달해 이에 저항하는 농민들의 반발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특히 관서(關西)농민전쟁으로까지 불리는 '홍경래(洪景來)의 난(亂)'은 부패한 권력 통치 체제에 대한 농민층의 저항 전쟁으로 인식할 수 있습니다. 또한 홍경래의 난을 이어 안동김씨 정권 말기 철종 대의 임술민란(壬戌民亂)이나 고종 대의 동학운동(東學運動)으로 일어난 갑오농민전쟁(甲午農民戰爭) 등으로 이어져 심각한 국가 위기의 상황을 초래하게 된 것입니다.

순원왕후 김씨 약사
 안동 김씨(安東金氏) 집안인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김조순(金祖淳)의 딸로 태어난[정조 13년] 순원왕후는 왕비로 책봉[순조 2년]되고 난 후 철종(哲宗) 대까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면서 안동김씨 세도정권의 정상에서 막강한 권력을 누립니다. 특히 철종의 왕위 계승에 결정적인 역할과 철종의 왕비 간택(揀擇)에도 자신의 집안 사람{김문근의 딸 철인왕후(哲仁王后)}을 성사시킴으로 해서 그녀는 권력을 공고히 합니다. 슬하(膝下)에 2남{효명세자[익종], 차남 요절} 3녀{명온, 복온, 덕온공주}를 두었고, 철종 8년에 승하합니다.
 

출처 :문화 사랑 오솔길 원문보기   글쓴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