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릉 공릉(恭陵)은 제8대 예종대왕(睿宗大王)의 원비(元妃) 장순왕후 한씨(章順王后 韓氏)의 능(陵)이다.

장순왕후 한씨(章順王后 韓氏)는 본관(本貫)이 청주(淸州)로 영의정(領議政)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韓明澮)의 여(女)로서 세종(世宗) 27년(1445년) 1월 16일 탄생(誕生)하였으며, 모친(母親)은 여흥부부인 민씨(驪興府夫人 閔氏)이다.

세조(世祖) 6년(1460년) 4월 11일 세조(世祖)의 왕세자빈(王世子嬪)으로 책봉(冊封)되었으니 성종(成宗)의 원비(元妃) 공혜왕후 한씨(共惠王后 韓氏)의 자(姉)이며 춘추(春秋) 16세였다.

이듬해인 세조(世祖) 7년(1461년) 12월 5일 산후병(産後病)으로 안기(安耆)의 사제(私第)에서 훙서(薨逝)하니 춘추(春秋) 17세였다. 세조(世祖) 8년 (1462년) 2월 17일 왕세자빈(王世子嬪)에게 장순(章順)이란 익호(謚號)를 내렸다. 이 해 2월 25일 파주(坡州) 남(南) 보시동(普施洞) 무좌진향(戊坐辰向)(북서(北西)에서 남동향(南東向)) 언덕에 예장(禮葬)하였다. 성종 원년(成宗 元年)(1470년) 1월 22일 능호(陵號)를 공릉(恭陵)이라 하였으며, 성종(成宗) 3년(1472년) 1월 11일 장순왕후(章順王后)로 추존(追尊)하였다.

공릉 공릉(恭陵)은 장순왕후 한씨(章順王后 韓氏)가 세자빈(世子嬪) 당시(當時) 훙서(薨逝)함에 세자빈묘(世子嬪墓)로 조영(造營)되었으며 왕후(王后)로 추존(追尊)된 후에도 상설(象設)은 가설(加設)함이 없었다. 병풍석(屛風石)과 난간석(欄干石)은 설치(設置)하지 아니하였고 능침(陵寢) 앞에 상석(床石)이 1좌(座) 있으며 망주석(望柱石)은 세우지 아니하였다. 양석(羊石)과 호석(虎石)도 각 1쌍으로 능침(陵寢) 주위(周圍)로 배치(配置)하였고 그 밖으로 3면의 곡장(曲墻)이 있다. 그 아래로 문인석(文人石) 1쌍과 마석(馬石) 1쌍이 상면 배치(相面 配置)되고 중앙(中央)에 팔각형(八角形) 명등석(明燈石) 1좌(座)가 있으며 무인석(武人石)과 마석(馬石)은 설치(設置)하지 아니하였고 능전(陵前) 제1계(第1階)와 제2계(第2階)의 구분(區分)이 없다. 능원(陵原) 아래에 정자각(丁字閣)이 있고, 정자각(丁字閣) 동북측(東北側)에 비각(碑閣)이 있다. 비면(碑面)은 전서(篆書)로 조선국 장순왕후공릉(朝鮮國 章順王后恭陵)이라 쓰고 음기(陰記)가 있으며, 순조(純祖) 17년(1817년) 9월에 세운 것이며, 정자각(丁字閣) 서남측(西南側) 참도(參道)가 시작되는 곳에 홍전문(紅箭門)이 있다. 참도(參道)는 홍전문(紅箭門)에서 정자각 기단(丁字閣 基壇) 앞까지 직로(直路)로 개설(開設)되는 것이 상례(常例)인데, 공릉(恭陵)의 참도(參道)는 홍전문(紅箭門)에서 북향(北向)하다가 중간지역(中間地域)에서 서향(西向)으로 꺾여 정자각 기단(丁字閣 基壇)에 이르니, 이는 지형조건(地形條件)에 따른 것이며 굴석참도(屈折參道)는 조선왕릉(朝鮮王陵) 중 공릉(恭陵)뿐이다.

순릉(順陵)은 제9대 성종대왕(成宗大王)의 원비(元妃) 공혜왕후 한씨(共惠王后 韓氏)의 릉(陵)이다.

공혜왕후 한씨(共惠王后 韓氏)는 본관(本貫)이 청주(淸州)로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韓明澮)의 여(女)로서 세조(世祖) 2년 (1456년) 10월 11일 한성부(漢城府) 동부(東部) 연화방(蓮花坊) 사제(私第)에서 탄생(誕生)하였으며, 모친(母親)은 여흥부부인 민씨(驪興府夫人 閔氏)이고 예종(睿宗)의 원비(元妃) 장순왕후 한씨(章順王后 韓氏)의 매(妹)이다. 세조(世祖) 13년(1467년) 1월 12일 자산군(者山君)과 가례(嘉禮)를 올렸고 천안부부인(天安郡夫人)이 되었으며 성종 즉위년(成宗 卽位年)(1469년) 11월 29일 왕비(王妃)로 책봉(冊封)되었다. 왕후(王后)는 총명 온화(聰明 溫和)하고 매사(每事)에 삼가하고 공경(恭敬)하여 왕비(王妃)로 책봉(冊封)된 후에는 정희왕후 윤씨(貞熹王后 尹氏), 덕종비(德宗妃) 소혜왕후 한씨(昭惠王后 韓氏), 예종 계비(睿宗 繼妃) 안순왕후 한씨(安順王后 韓氏) 삼전(三殿)을 극진(極盡)한 효도(孝道)로 섬겼다 하며 왕후(王后)가 득병(得病)하니 삼전(三殿)께서 보살피심이 지극(至極)하였다 한다.

성종(成宗) 5년(1474년) 4월 15일 창덕궁 구현전(昌德宮 求賢殿)에서 소생(所生) 없이 승하(昇遐)하니 춘추(春秋) 19세였다. 익호(謚號)를 공혜(恭惠)로, 능호(陵號)를 순릉(順陵)이라 하였고, 이해 6월 7일 파주(坡州) 공릉(恭陵) 남강(南岡) 묘좌유향(卯坐酉向)(정동(正東)에서 정서향(正西向)) 언덕에 예장(禮葬)하였다.

능침(陵寢)에 병풍석(屛風石)은 세우지 아니하였고 난간석(欄干石)은 12칸이며, 그 밖으로 양석(羊石) 2쌍과 호석(虎石) 2쌍이 교호 배치(交互 配置)되었고, 능전(陵前)에 상석(床石) 1좌(座)가 있으며, 그 양측(兩側)에 망주석(望柱石) 1쌍이 설치(設置)되었고, 이를 아울러서 3면의 곡장(曲墻)이 설치(設置)되어 제1계(第1階)를 이루었다. 한 단 아래 제2계(第2階)엔 문인석(文人石) 1쌍과 마석(馬石) 1쌍이 상면 배치(相面 配置)되었다. 그 중앙(中央)에 팔각형(八角形) 명등석(明燈石) 1좌(座)가 있고, 다시 한 단 아래 제3계(第3階)엔 무인석(武人石)과 마석(馬石) 각 1쌍이 문석(文石)의 예(例)와 같이 배치(配置)되었다.

난간석주(欄干石柱)의 원수(圓首)나 동자석주(童子石柱)는 태조(太祖)의 건원릉(健元陵). 태종(太宗)의 헌릉(獻陵)을 본받았고 상석(床石)의 고석(鼓石)의 나어두문(羅魚頭紋)이 문종(文宗)의 현릉(顯陵)과 비슷하는 등 다만 병풍석(屛風石)을 세우지 아니하였을 뿐 비릉(妃陵)의 조영(造營)에 있어 능제(陵制)나 상설제도(象設制度)는 초기제도(初期制度)를 따르고 있다. 능원(陵原) 아래에 정자각(丁字閣)이 있으며 정자각 동북측(丁字閣 東北側)에 비각(碑閣)이 있다. 비면(碑面)은 전서(篆書)로 조선국공혜왕후순릉(朝鮮國共惠王后順陵)이라 쓰고 음기(陰記)가 있으며, 순조(純祖) 17년(1817년) 9월에 세운 것이다. 홍살문(紅箭門)은 정자각(丁字閣) 서측 참도(西側 參道)가 시작되는 곳에 있다.

영릉 영릉(永陵)은 제21대 영조대왕(英祖大王)의 제1자(第1子)로서 정조 즉위년(正祖 卽位年)(1776년)에 왕(王)으로 추존(追尊)된 진종대왕(眞宗大王)과 왕비(王妃)로 추존(追尊)된 효순왕후 조씨(孝純王后 趙氏)의 릉(陵)이다. 진종대왕(眞宗大王)은 숙종(肅宗) 45년(1719년) 2월 15일 한성부(漢城府) 북부(北部) 순화방(順化坊) 창의궁(彰義宮) 사제(私第)에서 탄생(誕生)하였으며, 장헌세자(莊獻世子)의 형(兄)으로서 휘(諱)가 행이고, 자(字)가 성경(聖敬)이며 사친(私親)은 정빈 이씨(靖嬪 李氏)이다. 영조 즉위년(英祖 卽位年)(1724년) 11월 3일 경의군(敬義君)에 봉(封)하여졌으며 영조 원년(英祖 元年)(1725년) 3월 20일 왕세자(王世子)로 책봉(冊封)되었으니 춘추(春秋) 7세였다. 영조(英祖) 4년(1728년) 11월 16일 창경궁 진수당(昌慶宮 進修堂)에서 훙서(薨逝)하니 춘추(春秋) 10세였다. 이 해 12월 2일 익호(謚號)를 효장(孝章)이라 하였고, 그 이듬해인 영조(英祖) 5년(1729년) 1월 26일 파주 조리면(坡州 條里面)의 순릉(順陵) 왼쪽 산줄기의 을좌신향(乙坐辛向)(동(東)에서 서향(西向)) 언덕에 예장(禮葬)하였다.

영조대왕(英祖大王)은 영조(英祖) 38년(1762년) 윤(閏)5월 제2자(第2子)인 영빈 이씨(暎嬪 李氏) 소생(所生) 사도세자(思悼世子)를 폐(廢)하고 폐세자(廢世子)의 자(子)인 왕세손(王世孫) 성을 효장세자(孝章世子)의 사자(嗣子)로 출계(出系)시켜 승통(承統)케 함으로써 정조(正祖)가 즉위(卽位)하면서 이 해(1776년) 3월 19일 영조(英祖)의 유교(遺敎)에 따라 효장세자(孝章世子)를 진종대왕(眞宗大王)으로 추존(追尊)하였으며 능호(陵號)를 영릉(永陵)이라 하였다.

진종대왕(眞宗大王)의 비(妃) 효순왕후 조씨(孝純王后 趙氏)는 본관(本貫)이 풍양(豊壤)으로 풍릉부원군(豊陵府院君) 조문명(趙文命)의 여(女)로서 숙종(肅宗) 41년(1715년) 12월 14일 한성부(漢城府) 동부(東部) 숭교방(崇敎坊)에서 탄생(誕生)하였으며, 모친(母親)은 정경부인 이씨(貞敬夫人 李氏)이다. 영조(英祖) 3년(1727년) 9월 27일 세자빈(世子嬪)으로 책봉(冊封)되었고 영조(英祖) 11년(1735년) 3월 16일 현빈(賢嬪)으로 봉(封)하여졌으며 영조(英祖) 27년(1751년) 11월 14일 창덕궁 건극당(昌德宮 建極堂)에서 소생(所生)없이 훙서(薨逝)하니 춘추 37세(春秋 37歲)였다. 이해 11월 19일 시호(諡號)를 효순(孝純)이라 하였고 이듬해인 영조(英祖) 28년(1752년) 1월 22일 효장세자묘(孝章世子墓) 좌편(左便) 을좌신향(乙坐辛向)(동(東)에서 서향(西向))에 예장(禮葬)하였다. 정조 즉위년(正祖 卽位年)(1766년) 3월 19일 영조(英祖)의 유교(遺敎)에 따라 효순 현빈(孝純 賢嬪)을 효순왕후(孝純王后)로 추존(追尊)하였다.

영릉(永陵)은 동원이봉(同原異封)의 쌍릉(雙陵)으로 병풍석(屛風石)과 난간석(欄干石)은 설치(設置)하지 아니하였으며, 각 능침(陵寢) 앞에 상석(床石) 2좌를 놓았고, 그 양측(兩側)에 망주석(望柱石) 1쌍을 세웠으며, 양릉 주위(兩陵 周圍)로 양석(羊石) 2쌍과 호석(虎石) 2쌍을 교호 설치(交互 設置)하고, 3면의 곡장(曲墻)을 설치(設置)하였다. 이는 세자(世子)·세자빈묘(世子嬪墓)로 조영시(造營時) 영조(英祖)의 능제(陵制)와 상설(象設)은 구제(舊制)대로 하되 사가(私家)의 석물(石物)에 비하여 풍후(豊厚)하게 하도록 명(命)함에 따른 것이며, 영릉(永陵)으로 추숭(追崇) 후에도 가설(加設)함이 없었다. 한 단 아래에 문인석(文人石) 1쌍과 마석(馬石) 1쌍을 상면 설치(相面 設置)하고, 중앙(中央)에 사각옥개형(四角屋蓋形) 명등석(明燈石) 1좌(座)를 설치(設置)하였으며, 무인석(武人石)과 마석(馬石)은 세우지 아니하였다. 능원(陵原) 아래에 정자각(丁字閣)이 있다. 정자각(丁字閣)은 1960년대 말(末)에 노후(老朽), 도괴(倒壞)되었던 것을 1996년도에 복건(復建)하였으며, 비각(碑閣)은 정자각 남측(丁字閣 南側)에 2동(棟)이 있다. 구비(舊碑)는 비면(碑面)에 전서(篆書)로 조선국효장세자묘 효순현빈부좌(朝鮮國孝章世子墓 孝純賢嬪부左)라 썼고 음기(陰記)가 있다. 신비(新碑)는 비면(碑面)에 전서(篆書)로 조선국진종대왕영릉 효순왕후부좌(朝鮮國眞宗大王永陵 孝純王后부左)라 쓰고 음기(陰記)가 있으며, 정조 원년(正祖 元年)(1777년)에 세운 것이고 또하나의 비(碑)는 비면(碑面)에 대한진종소황제영릉 효순소황후부좌(大韓眞宗昭皇帝永陵 孝純昭皇后부左)라 쓰고 음기(陰記)가 있으며 융희(隆熙) 2년(1908년)에 세운 것이다. 홍살문(紅箭門)은 정자각(丁字閣) 서측 참도(西側 參道)가 시작되는 곳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