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89.jpg 융릉(隆陵)은 제21대(第21代) 영조대왕(英祖大王)의 제2자(第2子)로서 광무 3년(1899년)(光武 3年(1899年)) 왕(王)으로 추존(追尊)된 장조대왕(莊祖大王)과 왕비(王妃)로 추존(追尊)된 헌경왕후 홍씨(獻敬王后 洪氏)의 릉(陵)이다.

장조대왕(莊祖大王)은 영조 11년(1735년)(英祖 11年(1735年)) 1월 21일 창경궁(昌慶宮) 집복헌(集福軒)에서 탄생(誕生)하였으며 그 이듬해인 영조 12년(1736년)(英祖 12年(1736年)) 3월 15일 왕세자(王世子)로 책봉(冊封)되었으니 춘추 2세(春秋 2歲)였다. 영조(英祖)의 제1자(第1子)이며 세자(世子)였던 효장세자(孝章世子)가 영조 4년(1728년)(英祖 4年(1728年)) 춘추 10세(春秋 10歲)로 흉서(흉逝)하자 왕세자(王世子)로 책봉(冊封)되었던 것이며 휘(諱)는 항(恒)이고 자(子)가 윤관(允寬)이며 호(號)는 의재(毅齋)이고 사친(私親)은 영빈 이씨(暎嬪 李氏)이다. 세자(世子)는 총민(聰敏)하여 3세(歲)에 효경(孝經)을 암송(暗誦)하고 7세(歲)에 동몽선습(童夢先習)을 독파(讀破)하였으며 10세(歲)에 이미 경종년대(景宗年代)의 신임옥사(辛壬獄事)를 논난(論難)하였다. 영조 25년(1749년)(英祖 25年(1749年)) 1월 23일 영조(英祖)의 명(命)으로 청정(聽政)을 대리(代理)하였으나 당시(當時) 소론(小論)과 노론(老論)의 당쟁(黨爭)에 휘말려 노론(老論)과 영조(英祖) 계비(繼妃) 정순왕후 김씨(貞純王后 金氏) 등의 참소(讒訴)와 세자(世子)가 왕궁(王宮)을 벗어나 관서지방(關西地方)을 유람(遊覽)한 일로 영조(英祖)의 세자(世子)에 대한 불신(不信)이 가중(加重)되어 가던 중 계비(繼妃) 김씨(金氏)의 친정부(親庭父) 김한구(金漢耉)와 홍계희(洪啓禧) 등의 세자비행십조목(世子非行十條目) 상소(上疏)로 영조 38년(1762년)(英祖 38年(1762年)) 윤(閏) 5월 13일 폐세자(廢世子)되고 자진(自盡)을 (命)하였으나 불청(不聽)함에 뒤주 속에 가두어 이 해 윤(閏) 5월 21일 흉서(흉逝)하였으니 춘추 28세(春秋 28歲)였다. 이 해 7월 23일 양주(楊州) 남(南) 중량포(中梁浦) 배봉산(拜峯山) 아래 갑좌경향(동에서 서향)(甲坐庚向(東에서 西向)) 언덕에 예장(禮葬)하고 시호(諡號)를 사도(思悼)라 하고 묘호(墓號)를 수은묘(垂恩墓)라 하였다.

정조 즉위년(1776년)(正祖 卽位年(1776年)) 3월 20일 수은묘(垂恩墓)를 영우원(永祐園)으로 고치고 존호(尊號)를 사도(思悼)에서 장헌(莊獻)으로 고쳤다. 정조 13년(1789년)(正祖 13年(1789年)) 8월 9일 영우원(永祐園)을 현융원(顯隆園)으로 하였으며 이 해 10월 7일 구(舊) 수원부객사(水原府客舍) 뒤 화산(花山)의 계좌정향(북에서 남향)(癸坐丁向(北에서 南向)) 언덕에 천장(遷葬)하였다. 광무 3년(1899년)(光武 3年(1899年)) 11월 12일(음(陰) 10월 10일) 묘호(廟號)를 장종(莊宗)으로 진호(進號)하고 현융원(顯隆園)에서 릉호(陵號)를 융릉(隆陵)으로 올렸으며 이 해 12월 19일(陽) 묘호(廟號)를 장종(莊宗)에서 장조(葬祖)로 고치고 제호(帝號)를 의황제(懿皇帝)로 추존(追尊)하였다.

장조대왕(莊祖大王)의 비(妃)인 헌경왕후 홍씨(獻敬王后 洪氏)는 본관(本貫)이 풍산(豊山)으로 영의정(領議政) 영풍부원군(永豊府院君) 홍봉한(洪鳳漢)의 여(女)로서 영조 11년(1735년)(英祖 11年(1735年)) 6월 18일 한성부(漢城府) 서부(西部) 반송방(盤松坊) 사제(私第)에서 탄생(誕生)하였으며 모친(母親)은 한산 이씨(韓山 李氏)이다. 영조 20년(1744년)(英祖 20年(1744年)) 1月 9日 왕세자빈(王世子嬪)으로 책봉(冊封)되었으며 영조 38년(1762년)(英祖 38年(1762年)) 세자(世子)가 폐서인(廢庶人)이 되어 뒤주 속에 비명원사(非命 死)한 이 해 閏 5월 21일 혜빈(惠嬪)으로 진호(進號)되었으며 정조 즉위년(1776년)(正祖 卽位年(1776年)) 3월 10일 혜빈(惠嬪)을 혜경궁(惠慶宮)으로 올렸다. 순조 15년(1815년)(純祖 15年(1815年)) 12월 5일 창경궁(昌慶宮) 경춘전(景春殿)에서 승하(昇遐)하니 춘추 81세(春秋 81歲)였으며 소생(所生)은 정조대왕(正祖大王)이다. 왕후(王后)는 친정부(親庭父) 홍봉한(洪鳳漢)과 숙부(叔父) 홍인한(洪麟漢)이 폐세자(廢世子)를 극론(極論)하는 노론(老論)에 속(屬)하여 세자(世子)의 참변(慘變)을 좌시(坐視)하여야 하는 참담(慘憺)한 운명(運命)에 있었고 정조 19년(1795년)(正祖 19年(1795年)) 왕후(王后)의 환갑(還甲)의 해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참변(慘變)을 중심(中心)으로 육십평생(六十平生)의 자서전적(自敍傳的)인 회고록(回顧錄)《한중록》(閑中錄)을 남겼고 이 《한중록》(閑中錄)은 《인현왕후전》(仁顯王后傳)과 함께 궁중문학(宮中文學)의 쌍벽(雙壁)을 이룬다. 순조 15년(1815년)(純祖 15年(1815年)) 12월 25일 시호(諡號)를 헌경(獻敬)이라 하였으며 이듬해인 순조 16년(1816년)(純祖 16年(1816年)) 3월 3일 현융원(顯隆園)에 부좌(부左)하여 예장(禮葬)하였다. 광무 3년(1899년)(光武 3年(1899年)) 11월 12일(음(陰) 10월 10일) 헌경왕후(獻敬王后)로 추상(追上)하였고 이 해 12月 19日(陽) 의황후(懿皇后)로 진호(進號)하였다.

융릉(隆陵)은 동원합봉(同原合封)의 단릉(單陵)이다. 병풍석 12면(屛風石 12面)을 세웠으며 면석(面石)엔 인조(仁祖) 장릉(長陵)에서와 같이 목단(牧丹), 연화문(蓮花紋)을 양각(陽刻)하였다. 효종(孝宗)의 영릉(寧陵)을 여주(驪州)로 천릉시(遷陵時)부터 세우지 아니하였던 병석(屛石)을 다시 세우게 된 것이며 또한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 아닌 화문(花紋)을 새기고 인석(引石)은 화뢰형(花?形)으로 하고 십이방위(十二方位)를 표시하는 문자(文字)를 새겼다. 난간석(欄干石)은 두르지 아니하고 릉침(陵寢) 앞엔 상석 1좌(床石 1座)를 놓고 그 양측(兩側)에 망주석 1쌍(望柱石 1雙)을 설치(設置)하였으며 양석(羊石)과 호석(虎石)은 각(各) 1쌍(雙)씩 배치(配置)하였고 그 밖으로 3면(面)의 곡장(曲墻)을 세웠다. 한 단 아래 중계(中階)엔 문인석 1쌍(文人石 1雙)을 상면(相面) 배치(配置)하였고 마석(馬石)은 세우지 아니하였으며 그 중앙(中央)에 팔각형(八角形) 명등석 1좌(明燈石 1座)를 세웠는데 장명등(長明燈)은 전기(前期)의 팔각형(八角形)과 숙(肅)·영묘대(英廟代)의 사각형(四角形)을 조화(調和)하여 하단(下段)에 운족(雲足)을 만든 양식(樣式)으로서 새로운 형식(形式)이며 정조(正祖)의 건릉(健陵)과 철종 예릉(哲宗 睿陵)이 명등석(明燈石)의 표준(標準)이 된다. 하계엔 무인석(武人石)과 마석 1쌍(馬石 1雙)이 상면(相面) 배치(配置)되었다. 정조(正祖)는 장헌세자(莊獻世子)의 현융원(顯隆園)을 조영(造營)하면서 종래(從來)의 원제(園制)와는 달리 영릉(寧陵) 천릉시(遷陵時)부터 세우지 아니한 병석(屛石)을 세우고 릉전(陵前)을 3계(階)로 하여 무석(武石)을 세우는 등 현융원(顯隆園)을 왕릉(王陵)의 상설(象設)로서 조영(造營)한 부왕(父王)에 대한 애모지정(哀募之情)을 읽을 수 있다. 문석(文石)은 이전의 복두(복頭)와 달리 금관(金冠)을 썼으며 헌종(憲宗) 경릉(景陵)의 선례(先例)가 된다. 릉원(陵原) 아래에 정자각(丁字閣)이 있으며 정자각(丁字閣) 동측(東側)에 비각(碑閣)이 있다. 비석(碑石)은 2기(基)이며 구비(舊碑)는 비면(碑面)에 전서(篆書)로 조선국사도장헌세자현융원(朝鮮國思悼莊獻世子顯隆園)이라 썼고 정조(正祖)의 어필(御筆)이며 정조 13년(1789년)(正祖 13年(1789年))에 세운 것이고 신비(新碑)는 비면(碑面)에 대한장조의황제융릉 헌경의황후부좌(大韓莊祖懿皇帝隆陵 獻敬懿皇后부在)라 썼으며 음기(陰記)가 있고 광무 4년(1900년)(光武 4年(1900年))에 세웠으며 고종(高宗)의 어필(御筆)이다. 정자각(丁字閣) 남측(南側) 삼도(參道)가 시작되는 곳에 홍살문(紅箭門)이 있다.

건릉(健陵)은 제22대(第22代) 정조대왕(正祖大王)과 동비(同妃) 효의왕후(孝懿王后)김씨(金氏)의 릉(陵)이다.

정조대왕(正祖大王)은 왕(王)으로 추존(追尊)된 장조대왕(莊祖大王)의 제2자(第二子)로서 영조(英祖) 28년(1752年) 9월 22일 창경궁(昌慶宮) 경춘전(景春殿)에서 탄생(誕生)하였으며 휘(諱)는 산(蒜)이고 자(字)는 형운(亨運)이며 호(號)가 홍재(弘齋)이고 모후(母后)는 헌경왕후 홍씨(獻敬王后 洪氏)이다. 영조 35년(1759년)(英祖 35年(1759年)) 2월 12일 왕세손(王世孫)으로 책봉(冊封)되고 영조 51년(1775년)(英祖 51年(1775年)) 12월 7일 대리청정(代理聽政)을 하였으며 이듬해인 영조 52년(1776년)(英祖 52年(1776年)) 3월 영조(英祖)가 승하(昇遐)함에 이 해 3월 10일 경희궁(慶熙宮) 숭정문(崇政門)에서 즉위(卽位)하였으니 춘추 25세(春秋 25歲)였다. 정조대왕(正祖大王)은 정조(正祖) 즉위년(1776년)(卽位年(1776年)) 규장각(奎章閣)을 설치(設置)하여 능력(能力)과 학식(學識) 위주(爲主)로 많은 인재(人材)를 등용(登用)함으로써 서얼(庶孼)의 진출(進出)이 있었고 영조(英祖)의 탕평책(蕩平策)을 계승(繼承)하는 한편 사대주의(事大主義)가 아닌 민족주의적(民族主義的) 기반(基盤)에서 청(淸)의 건륭문화(乾隆文化)의 수입(輸入)으로 조선문화(朝鮮文化)의 독자성(獨自性)을 추구(追求)하는 문화정책(文化政策)을 펴나갔으니 채제공(蔡濟恭), 박지원(朴趾源), 정약용(丁若鏞), 박제가(朴齊家)등 많은 실학자(實學者)들이 배출(輩出)되었고 임진자(壬辰字)·정유자(丁酉字) 등의 활자(活字)의 주조(鑄造), 문물제도(文物制度)의 정비(整備)와 함께 《속오례의》(續五禮義), 《증보동국문헌비고》(增補東國文獻備考), 《국조보감》(國朝寶鑑), 《대전통편》(大典通編) 등 많은 서책(書冊)을 찬수(纂修) 간행(刊行)하였으니 후기(後期) 문화황금기(文化黃金期)를 이룩하였으며 정조(正祖) 스스로도 문집(文集), 《홍재전서》(弘齋全書)의 저작(著作)이 있으니 호학(好學)의 군왕(君王)이었다.

정조(正祖)는 효심(孝心)이 지극하여 비명(非命) 횡사(橫死)한 부왕(父王) 장헌세자(莊獻世子)의 현융원(顯隆園)을 수원(水原) 화산(花山)으로 천봉(遷奉)하면서 왕릉(王陵)의 규모(規模)로 조영(造營)하고 릉행(陵幸)을 자주 하였으며 수원(水原)에 화성(華城)을 수축(修築)하여 유수경(留守京)으로 승격(昇格)시키는 등 많은 치적(治績)을 이룩하고 정조 24년(1800년)(正祖 24年(1800年)) 6월 28일 창경궁(昌慶宮) 영춘헌(迎春軒)에서 승하(昇遐)하니 재위(在位) 24年이었고 춘추 49세(春秋 49歲)였다. 순조(純祖) 즉위년(1800년)(卽位年(1800年)) 7월 6일 릉호(陵號)를 건릉(健陵)으로 하고 묘호(廟號)를 정종(正宗)으로 하였다. 광무 3년(1899년)(光武 3年(1899年)) 12월 19일(陽) 정조(正祖)로 고치고 제호(帝號)를 선황제(宣皇帝)로 추상(追上)하였다. 순조(純祖) 즉위년(1800년)(卽位年(1800年)) 11월 6일 현융원(顯隆園) 동측(東側) 두 번째 산줄기의 해좌사향(북서에서 남동향)(亥坐巳向(北西에서 南東向))에 예장(禮葬)하였다.

정조대왕(正祖大王)의 비(妃) 효의왕후(孝懿王后) 김씨(金氏)는 본관(本貫)이 청풍(淸風)으로 청원부원군(淸原府院君) 김시묵(金時默)의 여(女)로서 영조 29년(1753년)(英祖 29年(1753年)) 12월 13일 한성부(漢城府) 북부(北部) 가회방(嘉會坊) 사제(私第)에서 탄생(誕生)하였으며 모친(母親)은 당성부부인 홍씨(唐城府夫人 洪氏)이다. 영조 38년(1762년)(英祖 38年(1762年)) 1월 8일 세손빈(世孫嬪)으로 책봉(冊封)되었고 정조(正祖) 즉위년(1776년)(卽位年(1776年)) 3월 10일 왕비(王妃)로 진봉(進封)되었다. 왕후(王后)는 효성(孝誠)이 지극하여 영조(英祖) 계비(繼妃) 정순대비 김씨(貞純大妃 金氏)와 장헌세자빈(莊獻世子嬪) 혜경궁(惠慶宮) 홍씨(洪氏)를 극진히 봉양(奉養)하였으며 성품(性稟)이 고결(高潔)하고 사정(私情)에 치우치지 아니하였으며 궁중(宮中)에서 남는 물화(物貨)가 있어도 궁화(宮貨)는 공물(公物)이라 하여 사가(私家)에 재물(財物)을 내리는 것을 크게 경계하였다 하며 평생(平生)을 검약(儉約)하게 보냈다. 순조(純祖) 즉위년(1800년)(卽位年(1800年)) 7월 4일 순조(純祖)가 즉위(卽位)하자 왕대비(王大妃)로 진봉(進封)되었다. 순조 21년(1821년)(純祖 21年(1821年)) 3월 9일 창경궁(昌慶宮) 자경전(慈慶殿)에서 소생(所生)없이 승하(昇遐)하니 춘추 69세(春秋 69歲)였다. 이 해 3월 17일 시호(諡號)를 효의(孝懿)라 하였고 릉호(陵號)를 정릉(靜陵)이라 하였다가 건릉(健陵)에 합봉(合封)하게 됨에 따라 릉호(陵號)는 쓰지 아니하였다. 광무 3년(1899년)(光武 3年(1899年)) 12월 19일 선황후(宣皇后)로 추상(追上)하였다.

건릉(健陵)은 동원합봉이실(同原合封異室)의 합장릉(合葬陵)이다. 정조(正祖)의 건릉(健陵)은 현융원(顯隆園) 동강(東岡)에 있었으나 효의왕후(孝懿王后)가 승하(昇遐)함에 건릉기(健陵基)가 풍수지리상(風水地理上) 좋지 아니하여 천릉론(遷陵論)이 있어 오던 중 현융원(顯隆園) 서강(西岡)으로 천봉(遷奉)키로 하고 순조 21년(1821년)(純祖 21年(1821年)) 9월 13일 천릉(遷陵)과 함께 자좌오향(정북에서 정남향)(子坐午向(正北에서 正南向)) 언덕에 효의왕후(孝懿王后)를 부좌(부左) 합장(合葬)하였다. 병풍석(屛風石)은 세우지 아니하고 12간(間)의 난간석(欄干石)을 설치(設置)하였고 난간석주(欄干石柱)에 십이지방위(十二支方位)를 문자(文字)로 새겼다. 릉침전(陵寢前)에 상석(床石) 1좌(座)가 있고 그 양측(兩側)에 망주석(望柱石) 1쌍(雙)을 설치(設置)하였으며 양석(羊石) 2쌍(雙)과 호석(虎石) 2쌍(雙)을 교호(交互)로 외향(外向) 배치(配置)하였으며 그 밖으로 3면(面)의 곡장(曲墻)이 있다. 한 단 아래 중계(中階)엔 문인석(文人石) 1쌍(雙)과 마석(馬石) 1쌍(雙)이 상면(相面) 설치(設置)되고 그 중앙(中央)에 융릉(隆陵)의 것과 같은 명등석(明燈石) 1좌(座)가 있으며 하계(下階)엔 무인석(武人石)과 마석(馬石) 각(各) 1쌍(雙)이 있다. 문(文)·무인석(武人石)은 등신대(等身大)에 가까우며 문석(文石)은 금관조복(金冠朝服)을 입고 있으며 사실적(寫實的)인 조각기법(彫刻技法)이 돋보인다. 릉원(陵原) 아래에 정자각(丁字閣)이 있고 정자각(丁字閣) 동측(東側)에 비각(碑閣)이 있으며 비각(碑閣)은 6·25 당시 도괴(倒壞)되었던 것을 1992년(年)에 복건(復建)한 것이다. 비면(碑面)은 전서(篆書)로 대한정조선황후건릉(大韓正祖宣皇后健陵) 효의선황후부좌(孝懿宣皇后부左)라 썼고 음기(陰記)가 있으며 고종(高宗)의 어필(御筆)로서 광무 4년(1900년)(光武 4年(1900年))에 세운 것이다. 정자각(丁字閣) 남측(南側) 삼도(參道)가 시작되는 곳에 홍살문(紅箭門)이 있으며 삼도(參道) 좌우(左右) 양측(兩側)과 정자각(丁字閣)까지 박석(薄石)을 깔아 놓은 것이 타릉(他陵)에 비(比)하여 특이(特異)하다. 재실(齋室)은 융릉(隆陵)·건릉(健陵) 경역(境域) 남측(南側) 대로변(大路邊)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