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86.jpg 홍릉(洪陵)은 제26대(第26代) 고종황제(高宗皇帝)와 동비(同妃) 명성태황후(明成太皇后) 민씨(閔氏)의 릉(陵)이다.

고종황제(高宗皇帝)는 추존(追尊)된 장조대왕(莊祖大王)의 현손(玄孫)이고 은신군(恩信君) 이진(李진)의 증손(曾孫)이며 남연군(南延君) 이구(李球)의 손자(孫子)이다. 남연군(南延君)의 제4자(第4子) 흥선군(興宣君) 이하응(李昰應)의 제2자(第2子)로서 철종(哲宗) 3년(年)(1852年) 7월 25일 한성부(漢城府) 중부(中部) 정선방(貞善坊) 사제(私第)에서 탄생(誕生)하였으며 초휘(初諱)는 재황(載晃)이고 자(字)는 명부(明夫)였으나 휘(諱)는 희(熙)로 자(子)는 성림(聖臨)으로 고치고 호(號)는 주연(珠淵)이며 사친(私親)은 여흥순목대원비(驪興純穆大院妃) 민씨(閔氏)이다. 철종(哲宗) 14년(1863년) 12월 8일 철종(哲宗) 후사(後嗣) 없이 승하(昇遐)함에 익성군(翼成君)에 봉(封)하여졌으며 12월 13일 문조대왕비(文祖大王妃) 신정왕후(神貞王后)의 명(命)을 받아 창덕궁(昌德宮) 인정문(仁政門)에서 즉위(卽位)하였으니 춘추(春秋) 12세(歲)였다. 신정왕후(神貞王后) 조대비(趙大妃)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고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섭정(攝政)으로 당색(黨色)과 문벌(門閥)을 가리지 아니하고 인재(人材)를 등용(登用)하는 한편 서원철폐(書院撤廢), 탐관오리(貪官汚吏)의 처벌(處罰) 등 민심(民心)을 수습(收拾)하고 국가재정(國家財政)을 확립(確立)하여 순조(純祖) 이래(以來)의 외척(外戚)에 의한 세도정치(勢道政治)를 혁파(革罷)하여 내정(內政)을 일신(一新)하였으며 경복궁(景福宮)을 중건(重建)하였다. 고종(高宗) 10년(1873년) 친정(親政)을 하면서 고종(高宗) 13년(1876년) 일본(日本)과의 병자수호조약(丙子修好條約) 이후 미국(美國), 불란서(佛蘭西), 영국(英國), 노서아(露西亞) 등 구미열강(歐美列强)과 청(淸)·일(日)의 외세(外勢)의 침투(侵透) 속에서 자주자강(自主自强)을 위하여 진력(盡力)하였으며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大韓帝國)을 선포(宣布), 황제(皇帝)의 위(位)에 나아가고 연호(年號)를 광무(光武)로 하였다. 그러나 급변(急變)하는 세계정세(世界政勢)에 적기대처(適期對處)치 못하고 개화(開化)에 따르는 내정(內政)의 변혁(變革)으로 임오군란(壬午軍亂), 갑신정변(甲申政變), 동학혁명(東學革命), 을미사변(乙未事變), 아관파천(俄館播遷)을 겪으면서 1905년의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으로 국운(國運)이 기울어짐에 1907년 6월 화란(和蘭) 해아(海牙)에서 개최(開催)되는 세계만국평화회의(世界萬國平和會議)에 일제(日帝)의 만행(蠻行)을 공표(公表)하고자 밀사(密使)를 파견(派遣)하였으나 성취(成就)하지 못하고 친일대신(親日大臣)과 왜국(倭國)의 강요(强要)로 광무(光武) 11년(1907년) 7월 20일 퇴위(退位)하였으니 재위(在位) 44년이었으며 수강태황제위(壽康太皇帝位)에 있었다.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의 국망(國亡)을 지켜보며 1919년 1월 21일(음(陰) 1918년 12월 20일) 덕수궁(德壽宮) 함녕전(咸寧殿)에서 승하(昇遐)하니 춘추(春秋) 67세(歲)였다. 이 해 3월 4일(음(陰) 2월 3일)양주(楊州) 금곡리(金谷里) 을좌신향(乙坐辛向)(동(東)에서 서향(西向)) 언덕에 예장(禮葬)하였다.

고종황제(高宗皇帝)의 비(妃) 명성태황후(明成太皇后) 민씨(閔氏)는 본관(本貫)이 여흥(驪興)이고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민치록(閔致錄)의 여(女)로서 철종(哲宗) 12년(1851년) 9월 25일 여주(驪州) 근동면(近東面) 섬요리(蟾樂里) 사제(私第)에서 탄생(誕生)하였으며 모친(母親)은 한창부부인(韓昌府夫人) 이씨(李氏)이다. 고종(高宗) 3년(1866년) 3월 20일 왕비(王妃)로 책봉(冊封)되었다. 황후(皇后)는 총명(聰明)하고 지모(智謀)가 있었으며 외척(外戚)의 폐해(弊害)를 겪은 대원군(大院君) 부인(夫人) 민씨(閔氏)의 천거(薦擧)로 료료단신(了了單身)인 민씨(閔氏)가 책봉(冊封)된 것이다. 황후(皇后)는 고종친정(高宗親政)의 계책(計策)을 세우고 친정(親政) 이후(以後)에는 개국정책(開國政策)을 주도(主導)하는 등 국정(國政)에 간여(干與)하였다. 청(淸)·노(露)·일(日)과의 수교(修交)로 이들의 각축장(角逐場)이 된 조선(朝鮮)에서 열세(劣勢)에 몰린 일본(日本)의 낭인(浪人) 자객(刺客)에 의하여 고종(高宗) 32년(1895년) 8월 20일 경복궁(景福宮) 곤녕전(坤寧殿)에서 붕서(崩逝)하니 소위(所謂) 을미사변(乙未事變)이다. 왕비(王妃)가 외국인(外國人)에게 시해(弑害)되기는 조선조(朝鮮朝)의 초유지사(初有之事)였으며 왕조(王朝) 말로(末路)의 조짐(兆朕)이기도 한 것이다. 왕비(王妃) 춘추(春秋) 45세(歲)였다. 이 해 8월 22일 왕비(王妃)를 폐(廢)하여 서인(庶人)으로 하였다가 이튿날인 23일 빈호(嬪號)를 내리고 10월 10일 왕후(王后)로 복위(復位)되었고 광무(光武) 원년(元年)(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大韓帝國) 선포(宣布)로 왕후(王后)에서 황후(皇后)로 추존(追尊)하였으며 이 해 11월 21일(음(音) 10월 27일) 양주(楊州) 남(南) 청량리(淸凉里) 간좌곤향(艮坐坤向)(北東에서 西南向) 언덕에 예장(禮葬)하였으며 릉호(陵號)를 홍릉(洪陵)이라 하였다.

국망(國亡) 후(後)인 1919년 1월 고종황제(高宗皇帝) 승하(昇遐)로 양주(洋酒) 남(南) 금곡리(金谷里) 황제릉(皇帝陵)을 봉릉(奉陵)함에 있어 청량리(淸凉里) 홍릉(洪陵)이 풍수지리상(風水地理上) 불길(不吉)하여 천장론(遷葬論)이 있었으며 이 해 2월 16일(음 1월 16일) 금곡리(金谷里) 을좌신향(乙坐辛向)(동(東)에서 서향(西向))에 천릉(遷陵)하였다.

홍릉(洪陵)은 동원이실합봉릉(同原異室合封陵)이다. 또한 종래(從來)의 릉제(陵制)나 상설(象設)과 다르게 조영(造營)되었으니 광무(光武) 원년(元年)(1897년) 10월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선포(宣布)로 황제(皇帝)로 호칭(號稱)하게 됨에 따라 명태조(明太祖)의 효릉(孝陵)의 릉설제도(陵設制度)를 본떠 조영(造營)되었다. 릉침(陵寢)엔 12면(面)의 병풍석(屛風石)을 세우고 면석(面石)에 화문(花紋)을 새겼으며 그 밖으로 12간(間)의 난간석(欄干石)을 둘렀고 또한 화문(花紋)을 새겼다. 난간석(欄干石) 밖으로 양석(羊石)과 호석(虎石)을 배치(配置)하지 아니하고 릉전(陵前)에 상석(床石) 1좌(座)를 놓았고 그 양측(兩側)에 망주석(望柱石) 1쌍(雙)을 세웠으며 이를 아울러 3면(面)의 곡장(曲墻)을 설치(設置)하고 상석(床石) 앞에 사각형(四角形) 명등석(明燈石) 1좌(座)를 세워 이로써 릉원(陵原)의 상설(象設)이 된다. 릉원(陵原) 아래에 정자형(丁字形) 자각(字閣) 대신 정면(正面) 5간(間), 측면(側面) 4간(間)의 일자형(一字形) 침전(寢殿)을 세웠다. 침전기단(寢殿基壇) 앞 아래에 문인석(文人石)과 무인석(武人石) 각(各) 1쌍(雙)을 상면(相面)에 설(設)하고 이에 수석(獸石) 각(各) 1쌍(雙)을 기린(麒麟), 상(象), 사자(獅子), 해치(해치), 낙타(駱駝), 마(馬)의 순(順)으로 홍살문(紅箭門)까지 순차(順次) 배설(配設)하고 참도(參道)가 홍살문(紅箭門)에서 침전기단(寢殿基壇) 앞까지 놓였다. 맨 끝의 마석(馬石) 2쌍(雙)은 문(文)·무석(武石)에 배속(配屬)된 것으로 보이며 마석(馬石)을 제외한 기린석(麒麟石) 등 수석(獸石)은 상단벽야(祥端酸野)를 상징(象徵)하는 신수(神獸)로 보인다. 문(文)·무석(武石)은 장대(長大)하며 문석(文石)은 건릉(健陵)·수릉(綏陵)의 예(例)와 같이 금관(金冠)을 썼으며 전통적(傳統的)인 기법(技法)으로 조각(彫刻)되었다. 침전(寢殿) 동북측(東北側)에 비각(碑閣)이 있다. 비면(碑面)엔 전서(篆書)로 대한고종태황제홍릉(大韓高宗太皇帝洪陵) 명성태황후부좌(明成太皇后 左)라고 썼으며 1937년 3월에 세운 것이다. 홍살문(紅箭門) 북측(北側)에 수복방(守僕房)이 있고 침전(寢殿) 서남측(西南側)에 재실(齋室)이 있다.

유릉(裕陵)은 조선조(朝鮮朝)인 제27대(第27代) 순종효황제(純宗孝皇帝)와 동비(同妃)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 민씨(閔氏), 동계비(同繼妃)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윤씨(尹氏)의 릉(陵)이다.

순종황제(純宗皇帝)는 고종황제(高宗皇帝)의 제2자(第2子)로서 고종(高宗) 11년(1874년) 2월 8일 창덕궁(昌德宮) 관물헌(觀物軒)에서 탄생(誕生)하였으며 휘(諱)는 척이고 자(字)는 군방(君邦)이며 호(號)는 정헌(正軒)이고 모후(母后)는 명성왕후(明成王后) 민씨(閔氏)이다. 고종(高宗) 12년(1875년) 2월 18일 왕세자(王世子)로 책봉(冊封)되었고 광무(光武) 원년(元年)(1897년) 10월 12일 황태자(皇太子)로 되었다. 광무(光武) 11년(1907년) 7월 19일(음(陰) 6월 10일) 대리청정(代理聽政)하였으며 선왕(先王) 고종황제(高宗皇帝)가 해아밀사사건(海牙密使事件)으로 일제(日帝)에 의하여 퇴위(退位)를 강요(强要)당하니 선양(禪讓)을 받아 이 해 8월 27일(음(陰 7월 19일 경운궁(慶運宮) 돈덕전(惇德殿)에서 즉위(卽位)하였고 연호(年號)를 융희(隆熙)로 하였다. 일제(日帝)는 조선병탄책전각(朝鮮倂呑策田各)에 따라 1907년 7월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을 강제(强制) 성립(成立)시켜 국정일반(國政一般)을 일본통감(日本統監)이 관여(關與)하게 되고 융희(隆熙) 3년(1909년) 7월에는 기유각서(己酉覺書)로 사법권(司法權)까지 빼앗겨 국운(國運)은 경각(頃刻)에 있었다. 일제(日帝)는 친일매국단체(親日賣國團體)인 일진회(一進會)를 사주(使嗾), 합방의견서(合邦意見書)를 조정(朝廷)에 제출(提出)케 하고 융희(隆熙) 4년(1910년) 8월 29일 한일합병조약(韓日合倂條約)으로 순종황제(純宗皇帝)는 퇴위(退位)당하니 재위(在位) 4년이었고 망국(亡國)의 군왕(君王)이 되었으며 조선왕조(朝鮮王朝)는 27대(代) 519년으로 종말(終末)을 맞게 되었다. 순종황제(純宗皇帝)는 이왕(李王)이라는 호칭(號稱)으로 창덕궁(昌德宮)에서 거처(居處)하면서 일본궁내성(日本宮內省) 소속(所屬)의 이왕직(李王職)의 보호하(保護下)에 있었으며 망국(亡國)의 통한(痛恨) 속에서 1926년(年) 4월 25일 창덕궁(昌德宮) 대조전(大造殿)에서 승하(昇遐)하니 춘추(春秋) 53세(歲)였다. 이 해 5월 1일 묘호(廟號)를 순종(純宗)이라 하고 존호(尊號)를 효황제(孝皇帝)라 하였으며 6월 11일 양주(楊州) 금곡리(金谷里) 홍릉(洪陵) 좌강(左岡) 묘좌유향(卯坐酉向)(正東에서 正西向) 언덕 유릉(裕陵)에 예장(禮葬)하였으니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 민씨(閔氏)와 동원이실(同原異室)로 합장(合葬)하였다.

순종황제(純宗皇帝)의 원비(元妃)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 민씨(閔氏)는 본관(本貫)이 여흥(驪興)으로 여은부원군(驪恩府院君) 민태호(閔台鎬)의 여(女)로서 고종(高宗) 9년(1872년) 10월 20일 한성부(漢城府) 북부(北部) 양덕방(陽德坊) 계동(桂洞) 사제(私第)에서 탄생(誕生)하였으며 모친(母親)은 정경부인(貞敬夫人) 송씨(宋氏)이다. 고종(高宗) 19년(1882년) 2월 19일 왕세자빈(王世子嬪)으로 책봉(冊封)되니 춘추(春秋) 11세(歲)였으며 광무(光武) 원년(元年)(1897년) 10월 14일 황태자비(皇太子妃)로 봉(封)하여졌다. 광무(光武) 8년(1904년) 11월 5일(음(陰) 9월 28일) 경운궁(慶運宮) 강태실(康泰室)에서 소생(所生)없이 흉서(흉逝)하니 춘추(春秋) 33세(歲)였다. 이 해 11월 10일 시호(諡號)를 순열(純烈)이라 하였다가 11월 22일 순명(純明)으로 고쳤다. 원호(園號)를 유강원(裕康園)으로 하였으며 이듬해인 광무(光武) 9년(1905년) 1월 4일(음(陰) 11월 29일) 양주(楊州) 용마산(龍馬山) 내동(內洞) 묘좌유향(卯坐酉向)(정동(正東)에서 정서향(正西向)) 언덕에 예장(禮葬)하였고 융희(隆熙) 원년(元年)(1907년) 8월 26일 유강원(裕康園)을 유릉(裕陵)으로 추봉(追封)하였으며 다음날인 8월 27일 효황후(孝皇后)로 추숭(追崇)하였다. 1926년 6월 5일 양주(楊州) 금곡리(金谷里) 홍릉(洪陵) 좌강(左岡) 묘좌유향(卯坐酉向)(정동(正東)에서 정서향(正西向)) 언덕으로 천봉(遷奉)하였다.

순종황제(純宗皇帝)의 계비(繼妃)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윤씨(尹氏)는 본관(本貫)이 해평(海平)으로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해풍부원군(海豊府院君) 윤택영(尹澤榮)의 여(女)로서 고종(高宗) 31년 (1894年) 8월 20일 경기도(京畿道) 양근군(楊根郡) 서종면(西宗面) 문호리(汶湖里)에서 탄생(誕生)하였다. 광무(光武) 8년(1904년) 11월 황태자비(皇太子妃) 민씨(閔氏)가 흉서(흉逝)함에 광무(光武) 10년(1906년) 동궁계비(東宮繼妃)로 되었다가 이듬해인 광무(光武) 11년(1907년) 1월 24일 황태자비(皇太子妃) 로 책봉(冊封)되었으니 춘추(春秋) 14세(歲)였으며 이 해 융희(隆熙) 원년(元年)(1907年) 8월 27일 순종황제(純宗皇帝)가 즉위(卽位)함에 황후(皇后)로 진봉(進封)되었다. 3년 뒤인 경술년(庚戌年) 망국(亡國)의 국치(國恥)를 겪었고 이왕직보호하(李王職保護下)에 창덕궁(昌德宮)에서 거처(居處)하다가 1945년 8·15의 광복(光復)을 맞이하고 1948년 대한민국정부(大韓民國政府) 수립(樹立)으로 평민화(平民化)되었으며 1950년 6·25동란시(動亂時) 난(亂)을 피(避)하여 부산(釜山)으로 거처(居處)를 옮겼으며 환도(還都) 후(後) 창덕궁(昌德宮)에서 기거(起居)하다가 1966년 1월 13일 낙선재(樂善齋)에서 승하(昇遐)하였으니 조선왕조(朝鮮王朝) 최후(最後)의 황후(皇后)였으며 춘추(春秋) 72세(歲)였다. 이 해 2월 15일 양주(楊州) 금곡리(金谷里) 유릉(裕陵)에 순종황제(純宗皇帝), 순종황제비(純宗皇帝妃) 민씨(閔氏)와 함께 동봉이실(同封異室)에 합장(合葬)되었으며 조선왕조(朝鮮王朝) 마지막 장례(葬禮)였고 동봉삼실릉(同封三室陵)은 유릉(裕陵)뿐이다.

유릉(裕陵)은 홍릉(洪陵)과 같이 황제릉(皇帝陵)으로 조영(造營)되었다. 1926년 4월 25일 순종(純宗) 승하(昇遐)시 양주 용마산(楊州 龍馬山) 내동(內洞)의 순종 원비 민씨(純宗 元妃 閔氏)의 유릉(裕陵)을 양주 금곡리(楊州 金谷理)로 천능(遷陵)하면서 황제릉(皇帝陵)으로 조영(造營)하였다. 릉침(陵寢)엔 면석(面石)에 화문(花紋)을 새긴 12면(面)의 병풍석(屛風石)을 세웠으며 그 밖으로 화문(花紋)을 새긴 12간(間)의 난간석(欄干石)을 세웠고 난간석(欄干石) 밖에 석수(石獸)를 배치(配置)하지 않고 상석(床石) 1좌(座)를 릉침전(陵寢前)에, 그 양측(兩側)에 망주석(望柱石) 1쌍(雙)과 그 밖으로 3면(面)의 곡장(曲墻)을 설치(設置)하였다. 상석(床石) 전면(前面)에 사각형(四角形) 명등석(明燈石) 1좌(座)가 있다. 릉침(陵寢) 아래에 침전(寢殿)으로서 정자각(丁字閣)을 대신하였으며 침전(寢殿) 아래에 문(文)·무인석(武人石), 기린(麒麟), 상(象), 사자(獅子), 해치(해치), 낙타(駱駝), 마석(馬石)을 상면(相面) 배치(配置)한 것이나 비각(碑閣), 수복방(守僕房) 재실(齋室)의 배치(配置)도 홍릉(洪陵)과 같다. 비면(碑面)엔 전서(篆書)로 대한순종효황제유릉(大韓純宗孝皇帝裕陵) 순명효황후부좌(純明孝皇后부左) 순정효황후부우(純貞孝皇后부右)라 썼다.

홍릉(洪陵)·유릉(裕陵)은 철종(哲宗)의 예릉(睿陵) 이전(以前)의 릉(陵)과 여러모로 다른 형식(形式)을 취(取)하고 있다. 고종대(高宗代)로부터 황제(皇帝)로 호칭(號稱)하게 되므로 왕릉(王陵)이 아닌 제릉(帝陵)으로서의 위용(威容)을 갖추기 위한 것이어서 상설(象設) 의물(儀物)의 종류(種類)나 규모(規模), 침전(寢殿)과 재실(齋室) 등의 배치(配置) 구조(構造)가 그러하며 홍릉(洪陵)과 유릉(裕陵)을 한 경역(境域)으로 하여 양릉(兩陵) 외곽(外廓)으로 담장을 설치(設置)하여 하나의 조그만 권역(圈域)으로 묶었으며 서편(西便)에 출입문(出入門)으로서 삼문(三門)을 세웠고 양릉(兩陵) 중간(中間)에 원형(圓形)의 석조연지(石造蓮池)를 조성(造成)하였으며 양릉재실(兩陵齋室)외에 담장 남측(南側)에 외재실(外齋室) 1동(棟)을 따로 두고 있다. 또한 황릉(皇陵)의 조영(造營) 시기(時期)가 일제(日帝)의 강점치하(强占治下)였으며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병(韓日合倂)으로 조선왕조(朝鮮王朝)는 멸망(滅亡)하였으며 다음해 2월에 일본(日本) 궁내성(宮內省) 소속(所屬)으로 설치(設置)된 이왕직(李王職)은 조선조(朝鮮朝) 왕족(王族) 및 공족(公族)의 가무(家務)를 통할(統轄) 관장(管掌)하면서 고종(高宗)과 순종황제(純宗皇帝)의 신변(身邊)·진후(診候)·공선(供膳)·의식(儀式)·접대(接待)에 관(關)한 사항(事項), 왕실재산(王室財産)과 출납(出納) 회계(會計)에 관(關)한 사항(事項)·제사(祭祀)·묘제(廟祭)·전제(殿祭)·궁(宮)·분형(墳瑩)의 관수등(管守等) 황실(皇室)의 제반사(諸般事)를 주관(主管)하였고, 홍릉(洪陵)·유릉(裕陵)의 릉(陵) 기택정(基擇定), 황릉조영(皇陵造營)에도 이왕직(李王職)의 의사(意思)가 작용(作用)되었을 것이며 릉지(陵地)와 부속림(附屬林), 부속전지(附屬田地)를 이왕직(李王職)이 사인(私人)으로부터 매수(買收)한 것이다. 또한 고종(高宗)과 순종(純宗)이 왕조멸망(王朝滅亡) 후(後) 10년 가까이 지난 후(後) 승하(昇遐)로 왕조(王朝)에 의한 봉릉(奉陵)이 아니고 강점국(强占國)에 의한 황릉조영(皇陵造營)은 존숭(尊崇)의 염원(念願)이 아닌 조선국민(朝鮮國民) 감정(感情)의 회유(懷柔)의 감(感)이 짙으며 홍릉(洪陵)·유릉(裕陵)은 이로써 릉제(陵制)가 단절(斷切)되기도 하지만 조선왕릉(朝鮮王陵)의 변화(變化) 진전상(進展上)의 의미(意味)는 없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