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목 | 사적 제203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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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기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 산25-1 |
소재지 | 탄현면 |
지정일 | 1970.05.26 |
수량/면적 | 345,792㎡ |
시대 | 조선시대 |
소유자 | 국유 |
관리자 | 파주삼릉관리소 |
자료출처 및 참조 | 문화재청 |
제16대(第16代) 인조대왕(仁祖大王)과 동비(同妃) 인열왕후(仁烈王后) 한씨(韓氏)의 릉(陵)이다.
인조대왕(仁祖大王)은 추존(追尊)된 원종대왕(元宗大王)의 제1자(第1子)로서 선조(宣祖) 28년(1595년) 11월 7일 황해도(黃海道) 해주부사(海州府舍)에서 탄생(誕生)하였으며 휘(諱)는 종(倧)이고 자(字)는 화백(和伯)이며 호(號)는 송창(松窓)이고, 모후(母后)는 추존(追尊)된 인헌왕후(仁獻王后) 구씨(具氏)이다. 선조(宣祖) 40년(1607년) 능양도정(綾陽都正)에 봉(封)하여졌다가 다시 능양군(綾陽君)으로 봉(封)하여졌으며 친제(親弟) 능창군(綾昌君)이 광해군(光海君)에 의하여 역모(逆謀)에 연루(連累)되었다 하여 사사(賜死)되었고 광해주(光海主)는 부왕(父王)인 선조(宣祖)의 계비(繼妃) 인목왕후(仁穆王后)를 서궁(西宮)에 유폐(幽廢)시키는 등 실정(失政)이 거듭됨에 김류(金류), 이귀(李貴), 이적(李适), 김자점(金自點) 등이 광해군(光海君) 15년(1623년) 3월 12일 광해왕(光海王)을 폐출(廢出)하는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있었고, 그 다음날인 3월 13일 인목왕후(仁穆王后)의 명(命)을 받아 경운궁(慶運宮) 별당(別堂)에서 즉위(卽位)하였으니 춘추(春秋) 29세였다. 즉위(卽位) 다음해인 인조(仁祖) 원년(元年)(1624년) 1월 이른바 반정공신(反正功臣)이었던 이적(李适)의 난(亂)으로 인조(仁祖)는 도성(都城)을 버리고 공주(公州)로 몽진(蒙塵)을 하였다가 환도(還都)하였으니 조선왕조(朝鮮王朝) 중 내란(內亂)으로 도성(都城)을 벗어난 일은 초유지사(初有之事)였다. 인조조(仁祖朝)는 임진(壬辰)·정유왜란(丁酉倭亂)의 병화(兵火)에서 차츰 민생(民生)이 안정(安定)되어가는 시기(時期)였으나 인조(仁祖) 5년(1627년) 후금(後金)의 정묘호란(丁卯胡亂)으로 강화도(江華島)에 피난(避亂)하고 형제지약(兄弟之約)인 정묘화약(丁卯和約)을 맺는 수모(受侮)를 겪었으며, 인조(仁祖) 14년 (1636년) 12월 청태종(淸太宗)의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다시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가 항쟁(抗爭)하였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삼전도(三田渡)에서 군신지약(君臣之約)을 맺고 소현(昭顯)·봉림(鳳林) 두 왕자(王子)와 척화파(斥和派) 삼학사(三學士)를 인질(人質)로 보내는 치욕(恥辱)을 겪었으며 정묘(丁卯)·병자(丙子) 양란(兩亂)으로 더욱 피폐(疲弊)해진 민생안정(民生安定)을 위하여 강원도(江原道)에 대동법(大同法)을 시행(施行)케하고 인조(仁祖) 12년(1634년) 삼남지방(三南地方)에 양전(量田)을 실시(實施)하였으며 상평청(常平廳)을 설치(設置), 상평통보(常平通寶)를 주조(鑄造) 통용(通用)케하였다.《황국경세서(皇國經世書)》,《동사보편(東史補編)》,《서연비람(西筵備覽)》등 서적(書籍)의 간행(刊行) 등 학문(學問)의 진흥(振興)에도 주력(主力)하였다.
인조(仁祖) 27년(1649년) 5월 8일 창덕궁(昌德宮) 대조전(大造殿)에서 승하(昇遐)하니 재위(在位) 27년이었고 춘추(春秋) 55세였다. 효종(孝宗) 즉위년(卽位年)(1649년) 5월 15일 묘호(廟號)를 열조(烈祖)로 능호(陵號)를 장릉(長陵)으로 하였다가 5월 23일 묘호(廟號)는 인조(仁祖)로 고쳤다. 이 해 9월 20일 파주(破州) 북(北) 운천리(雲川里) 인조(仁祖) 원비(元妃) 인열왕후(仁烈王后) 한씨(韓氏)의 릉(陵) 좌측(左側) 묘좌유향(卯坐酉向)(정동(正東)에서 정서향(正西向)) 언덕에 예장(禮葬)하였으니 인조(仁祖)가 재위시(在位時) 능지(陵地)로 택정(擇定)하였던 곳이다. 숙묘대(肅廟代)에 천릉론(遷陵論)이 있었으나 수용(受容)되지 아니하였고, 영조(英祖) 7년(1731년) 좌의정(左議政) 이□(李□) 등이 능상(陵上)에 사갈(蛇蝎)이 무리를 이루고 있어 천봉(遷奉)을 아뢰니 이 해 8월 30일 교하현(交河縣) 객사(客舍) 뒤 자좌우향(子坐右向)(정북(正北)에서 정남향(正南向))언덕에 인열왕후(仁烈王后) 한씨(韓氏)와 천릉(遷陵) 합장(合葬)하였다.
인조대왕(仁祖大王) 원비(元妃) 인열왕후(人烈王后) 한씨(韓氏)는 본관(本貫)이 청주(淸州)로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서평부원군(西平府院君) 한준겸(韓浚謙)의 여(女)로서 선조(宣祖) 27년(1594년) 7월 1일 강원도(江原道) 원주(原州)에서 탄생(誕生)하였고 모친(母親)은 회산부부인(檜山府夫人) 황씨(黃氏)이다. 광해군(光海君) 2년(1610년)에 능양군(綾陽君)과 가례(嘉禮)를 올리고 청성현부인(淸城顯夫人)에 봉(封)하여졌으며 인조(仁祖) 즉위년(卽位年)(1623년) 3월 14일 왕비(王妃)로 책봉(冊封)되었다.
인조(仁祖) 13년(1635년) 12월 9일 용성대군(龍城大君) 생산(生産) 후 산후병(産後病)으로 창경궁(昌慶宮) 여휘당(麗暉堂)에서 승하(昇遐)하니 춘추(春秋) 42세였으며 소생(所生)은 소현(昭顯), 효종(孝宗), 인평(麟坪), 용성(龍城)의 4남(男)이다. 이 해 12월 17일 익호(謚號)를 인열(仁烈)이라 하고 능호(陵號)를 장릉(長陵)으로 하였으며, 이듬해인 인조(仁祖) 14년(1636년) 4월 11일 파주(坡州) 북(北) 운천리(雲川里) 묘좌유향(卯坐酉向)(정동(正東)에서 정서향(正西向))에 예장(禮葬)하였으나 영조(英祖) 7년(1731년) 8월 30일 장릉(長陵)을 천릉(遷陵)키로 함에 따라 천봉(遷奉)하였다.
장릉(長陵)은 동원합봉릉(同原合封陵)이다. 능침(陵寢)엔 12면의 병풍석(屛風石)을 세웠으며, 병석면(屛石面)엔 목단문(牧丹紋)과 연화문(蓮花紋)을 부조(浮彫)하였으며, 종래(從來)의 면석(面石)에 운문(雲紋)과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새긴 전통적(傳統的) 양식(樣式)과 다르다. 그 밖으로 12칸의 난간석(欄干石)을 둘렀으며, 양석(羊石)과 호석(虎石) 각 2쌍이 외향(外向) 배치(配置)되고 능전(陵前)에 상석(床石) 2좌(座)가 있으며, 그 양측(兩側)에 망주석(望柱石) 1쌍이 있고 그 밖으로 3면의 곡장(曲墻)이 있어 상계(上階)를 이루고 있다. 중계(中階)에는 문인석(文人石) 1쌍, 마석(馬石) 1쌍이 상면(相面) 설치(設置)되었고, 중앙(中央)엔 팔각형(八角形) 명등석(明燈石) 1좌가 있으며, 명등석(明燈石) 문양(紋樣)도 목단문(牧丹紋)과 연화문(蓮花紋)이 조각(彫刻)되어 있는 바 운천리(雲川里) 구릉(舊陵)에서 신릉(新陵)으로 천릉시(遷陵時) 구릉(舊陵)의 양릉(兩陵) 병석(屛石)이나 난간석(欄干石) 상석(床石)은 서로 척수(尺數)가 맞지 아니하여 신릉(新陵)으로 이설(移設)치 못함으로써 천릉시(遷陵時) 신설(新設)하면서 운문(雲紋)과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 화문(花紋)으로 바뀐 것이니 인조년대(仁祖年代)와 영조년대(英祖年代)의 석물(石物)이 함께 있으며, 병석(屛石)은 이 후대(後代)에 세우지 아니하다가 국말(國末) 황제릉(皇帝陵)인 고종(高宗)과 순종(純宗)의 홍(洪)·유릉(裕陵)에서 다시 세우게 된다. 하계(下階)에는 무인석(武人石)과 마석(馬石) 각 1쌍이 상면 배치(上面 配置)되었다. 능원(陵原) 아래에 정자각(丁字閣)이 있으며 비각(碑閣)은 정자각(丁字閣) 동측(東側)에 있고 비면(碑面)은 전서(篆書)로 조선국인조대왕장릉(朝鮮國仁祖大王長陵) 인열왕후(人烈王后) 부재(부在)라 썼으며 음기(陰記)가 있다. 비각(碑閣) 아래 수복방(守僕房)이 있으며 홍살문(紅箭門)은 정자각(丁字閣) 남측(南側) 참도(參道)가 시작되는 곳에 있고 재실(齋室)은 홍살문(紅箭門) 동남측(東南側) 소로변(小路邊)에 있다.
인조대왕(仁祖大王)은 추존(追尊)된 원종대왕(元宗大王)의 제1자(第1子)로서 선조(宣祖) 28년(1595년) 11월 7일 황해도(黃海道) 해주부사(海州府舍)에서 탄생(誕生)하였으며 휘(諱)는 종(倧)이고 자(字)는 화백(和伯)이며 호(號)는 송창(松窓)이고, 모후(母后)는 추존(追尊)된 인헌왕후(仁獻王后) 구씨(具氏)이다. 선조(宣祖) 40년(1607년) 능양도정(綾陽都正)에 봉(封)하여졌다가 다시 능양군(綾陽君)으로 봉(封)하여졌으며 친제(親弟) 능창군(綾昌君)이 광해군(光海君)에 의하여 역모(逆謀)에 연루(連累)되었다 하여 사사(賜死)되었고 광해주(光海主)는 부왕(父王)인 선조(宣祖)의 계비(繼妃) 인목왕후(仁穆王后)를 서궁(西宮)에 유폐(幽廢)시키는 등 실정(失政)이 거듭됨에 김류(金류), 이귀(李貴), 이적(李适), 김자점(金自點) 등이 광해군(光海君) 15년(1623년) 3월 12일 광해왕(光海王)을 폐출(廢出)하는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있었고, 그 다음날인 3월 13일 인목왕후(仁穆王后)의 명(命)을 받아 경운궁(慶運宮) 별당(別堂)에서 즉위(卽位)하였으니 춘추(春秋) 29세였다. 즉위(卽位) 다음해인 인조(仁祖) 원년(元年)(1624년) 1월 이른바 반정공신(反正功臣)이었던 이적(李适)의 난(亂)으로 인조(仁祖)는 도성(都城)을 버리고 공주(公州)로 몽진(蒙塵)을 하였다가 환도(還都)하였으니 조선왕조(朝鮮王朝) 중 내란(內亂)으로 도성(都城)을 벗어난 일은 초유지사(初有之事)였다. 인조조(仁祖朝)는 임진(壬辰)·정유왜란(丁酉倭亂)의 병화(兵火)에서 차츰 민생(民生)이 안정(安定)되어가는 시기(時期)였으나 인조(仁祖) 5년(1627년) 후금(後金)의 정묘호란(丁卯胡亂)으로 강화도(江華島)에 피난(避亂)하고 형제지약(兄弟之約)인 정묘화약(丁卯和約)을 맺는 수모(受侮)를 겪었으며, 인조(仁祖) 14년 (1636년) 12월 청태종(淸太宗)의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다시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가 항쟁(抗爭)하였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삼전도(三田渡)에서 군신지약(君臣之約)을 맺고 소현(昭顯)·봉림(鳳林) 두 왕자(王子)와 척화파(斥和派) 삼학사(三學士)를 인질(人質)로 보내는 치욕(恥辱)을 겪었으며 정묘(丁卯)·병자(丙子) 양란(兩亂)으로 더욱 피폐(疲弊)해진 민생안정(民生安定)을 위하여 강원도(江原道)에 대동법(大同法)을 시행(施行)케하고 인조(仁祖) 12년(1634년) 삼남지방(三南地方)에 양전(量田)을 실시(實施)하였으며 상평청(常平廳)을 설치(設置), 상평통보(常平通寶)를 주조(鑄造) 통용(通用)케하였다.《황국경세서(皇國經世書)》,《동사보편(東史補編)》,《서연비람(西筵備覽)》등 서적(書籍)의 간행(刊行) 등 학문(學問)의 진흥(振興)에도 주력(主力)하였다.
인조(仁祖) 27년(1649년) 5월 8일 창덕궁(昌德宮) 대조전(大造殿)에서 승하(昇遐)하니 재위(在位) 27년이었고 춘추(春秋) 55세였다. 효종(孝宗) 즉위년(卽位年)(1649년) 5월 15일 묘호(廟號)를 열조(烈祖)로 능호(陵號)를 장릉(長陵)으로 하였다가 5월 23일 묘호(廟號)는 인조(仁祖)로 고쳤다. 이 해 9월 20일 파주(破州) 북(北) 운천리(雲川里) 인조(仁祖) 원비(元妃) 인열왕후(仁烈王后) 한씨(韓氏)의 릉(陵) 좌측(左側) 묘좌유향(卯坐酉向)(정동(正東)에서 정서향(正西向)) 언덕에 예장(禮葬)하였으니 인조(仁祖)가 재위시(在位時) 능지(陵地)로 택정(擇定)하였던 곳이다. 숙묘대(肅廟代)에 천릉론(遷陵論)이 있었으나 수용(受容)되지 아니하였고, 영조(英祖) 7년(1731년) 좌의정(左議政) 이□(李□) 등이 능상(陵上)에 사갈(蛇蝎)이 무리를 이루고 있어 천봉(遷奉)을 아뢰니 이 해 8월 30일 교하현(交河縣) 객사(客舍) 뒤 자좌우향(子坐右向)(정북(正北)에서 정남향(正南向))언덕에 인열왕후(仁烈王后) 한씨(韓氏)와 천릉(遷陵) 합장(合葬)하였다.
인조대왕(仁祖大王) 원비(元妃) 인열왕후(人烈王后) 한씨(韓氏)는 본관(本貫)이 청주(淸州)로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서평부원군(西平府院君) 한준겸(韓浚謙)의 여(女)로서 선조(宣祖) 27년(1594년) 7월 1일 강원도(江原道) 원주(原州)에서 탄생(誕生)하였고 모친(母親)은 회산부부인(檜山府夫人) 황씨(黃氏)이다. 광해군(光海君) 2년(1610년)에 능양군(綾陽君)과 가례(嘉禮)를 올리고 청성현부인(淸城顯夫人)에 봉(封)하여졌으며 인조(仁祖) 즉위년(卽位年)(1623년) 3월 14일 왕비(王妃)로 책봉(冊封)되었다.
인조(仁祖) 13년(1635년) 12월 9일 용성대군(龍城大君) 생산(生産) 후 산후병(産後病)으로 창경궁(昌慶宮) 여휘당(麗暉堂)에서 승하(昇遐)하니 춘추(春秋) 42세였으며 소생(所生)은 소현(昭顯), 효종(孝宗), 인평(麟坪), 용성(龍城)의 4남(男)이다. 이 해 12월 17일 익호(謚號)를 인열(仁烈)이라 하고 능호(陵號)를 장릉(長陵)으로 하였으며, 이듬해인 인조(仁祖) 14년(1636년) 4월 11일 파주(坡州) 북(北) 운천리(雲川里) 묘좌유향(卯坐酉向)(정동(正東)에서 정서향(正西向))에 예장(禮葬)하였으나 영조(英祖) 7년(1731년) 8월 30일 장릉(長陵)을 천릉(遷陵)키로 함에 따라 천봉(遷奉)하였다.
장릉(長陵)은 동원합봉릉(同原合封陵)이다. 능침(陵寢)엔 12면의 병풍석(屛風石)을 세웠으며, 병석면(屛石面)엔 목단문(牧丹紋)과 연화문(蓮花紋)을 부조(浮彫)하였으며, 종래(從來)의 면석(面石)에 운문(雲紋)과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새긴 전통적(傳統的) 양식(樣式)과 다르다. 그 밖으로 12칸의 난간석(欄干石)을 둘렀으며, 양석(羊石)과 호석(虎石) 각 2쌍이 외향(外向) 배치(配置)되고 능전(陵前)에 상석(床石) 2좌(座)가 있으며, 그 양측(兩側)에 망주석(望柱石) 1쌍이 있고 그 밖으로 3면의 곡장(曲墻)이 있어 상계(上階)를 이루고 있다. 중계(中階)에는 문인석(文人石) 1쌍, 마석(馬石) 1쌍이 상면(相面) 설치(設置)되었고, 중앙(中央)엔 팔각형(八角形) 명등석(明燈石) 1좌가 있으며, 명등석(明燈石) 문양(紋樣)도 목단문(牧丹紋)과 연화문(蓮花紋)이 조각(彫刻)되어 있는 바 운천리(雲川里) 구릉(舊陵)에서 신릉(新陵)으로 천릉시(遷陵時) 구릉(舊陵)의 양릉(兩陵) 병석(屛石)이나 난간석(欄干石) 상석(床石)은 서로 척수(尺數)가 맞지 아니하여 신릉(新陵)으로 이설(移設)치 못함으로써 천릉시(遷陵時) 신설(新設)하면서 운문(雲紋)과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 화문(花紋)으로 바뀐 것이니 인조년대(仁祖年代)와 영조년대(英祖年代)의 석물(石物)이 함께 있으며, 병석(屛石)은 이 후대(後代)에 세우지 아니하다가 국말(國末) 황제릉(皇帝陵)인 고종(高宗)과 순종(純宗)의 홍(洪)·유릉(裕陵)에서 다시 세우게 된다. 하계(下階)에는 무인석(武人石)과 마석(馬石) 각 1쌍이 상면 배치(上面 配置)되었다. 능원(陵原) 아래에 정자각(丁字閣)이 있으며 비각(碑閣)은 정자각(丁字閣) 동측(東側)에 있고 비면(碑面)은 전서(篆書)로 조선국인조대왕장릉(朝鮮國仁祖大王長陵) 인열왕후(人烈王后) 부재(부在)라 썼으며 음기(陰記)가 있다. 비각(碑閣) 아래 수복방(守僕房)이 있으며 홍살문(紅箭門)은 정자각(丁字閣) 남측(南側) 참도(參道)가 시작되는 곳에 있고 재실(齋室)은 홍살문(紅箭門) 동남측(東南側) 소로변(小路邊)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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