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08.jpg 온릉(溫陵)은 제11대(第11代) 중종대왕(中宗大王) 원비(元妃)인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愼氏)의 능(陵)이다.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愼氏)의 본관(本貫)은 거창(居昌)이고 익창부원군(益昌府院君) 신수근(愼守勤)의 여(女)로서 성종(成宗) 18년(1487년) 1월 14일 탄생(誕生)하였으며 연산군(燕山君) 5년(1499년)에 진성대군(晋城大君)과 가례(嘉禮)를 올리고 부부인(府夫人)으로 봉(封)하여졌다.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진성대군(晋城大君)이 왕위(王位)에 오르자 중종(中宗) 원년(元年)(1506년) 9월 2일 왕비(王妃)로 책봉(冊封)되었으며 반정공신(反正功臣) 박원종(朴元宗), 성희안(成希顔) 등이 왕비(王妃)의 부(父) 신수근(愼守勤)은 반정(反正)으로 피주(被誅)되었으며, 죄인(罪人)의 여(女)가 왕비(王妃)로는 부적(不適)하다는 강청(强請)으로 왕비(王妃) 책봉(冊封) 7일만에 폐출(廢出)되어 사제(私第)로 나아갔다. 처음 정현조(鄭顯祖)의 집에 거처(居處)하다가 9월 24일 조부(祖父) 신승선가(愼承善家)로 이거(移居)하였다. 중종(中宗) 계비(繼妃)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尹氏)가 중종(中宗) 10년(1515년) 2월에 승하(昇遐) 후 담양부사(潭陽府使) 박상(朴祥) 등의 복위상소(復位上疏)가 있었으나, 이루어지지 아니하였다.

폐비(廢妃) 신씨(愼氏)는 명종(明宗) 12년(1557년) 12월 7일 우거(寓居) 사제(私第)에서 소생(所生)없이 춘추(春秋) 71세로 승하(昇遐)하였으며, 친정묘역(親庭墓域) 해좌사향(亥坐巳向)(북북서(北北西)에서 남남동향(南南東向)) 언덕에 장례(葬禮)지냈고, 신수근(愼守勤)의 손(孫) 사원(思遠)이 봉사(奉祀)하였다. 숙종(肅宗) 24년(1698년) 전(前) 현감(縣監) 신규(申奎)의 왕비추복상소(王妃追復上疏)가 있었으나, 묘당(廟堂)의 의론(議論)이 일치(一致)되지 아니함에 숙종(肅宗)은 예조(禮曹)에 명(命)하여 연경궁지(延慶宮址)에 사당(祠堂)을 세우게 하고 춘추(春秋)로 사당(祠堂)에 봉제(奉祭)케 하고 한식절(寒食節)엔 묘제(墓祭)를 지내게 했다. 영조(英祖) 15년(1739년) 3월 28일 익호(謚號)를 단경(端敬)으로 능호(陵號)를 온릉(溫陵)으로 추복(追復)하였으며, 이 해 4월 능상(陵上)의 상설(象設)을 새로이 설치(設置)하면서 단종(端宗) 장릉(莊陵)의 봉릉예(奉陵例)로서 하되 추봉(追封)된 왕비릉(王妃陵)인 정릉(貞陵), 사릉(思陵)의 상설(象設)을 따르게 하였다.

병풍석(屛風石)과 난간석(欄干石)을 세우지 아니하고 능침(陵寢) 주위(周圍)로 양석(羊石)·호석(虎石) 각 1쌍을 배치(配置)하고 능전(陵前)에 상석(床石) 1좌(座)와 그 양측(兩側)에 망주석(望柱石) 1쌍을 세웠으며, 그 밖으로 3면의 곡장(曲墻)을 설치(設置)하였다. 그 한단 아래 제2계(第2階)엔 문인석(文人石) 1쌍과 마석(馬石) 1쌍이 상면(相面) 배치(配置)되었으며, 중앙(中央)에 사각옥형(四角屋形) 명등석(明燈石) 1좌(座)가 있다. 제3계(第3階)는 없다. 병석(屛石)과 난간석(欄干石)을 생략(省略)하고 수석(獸石)을 반감(半減)하고 무석(武石)을 세우지 아니하였음은 추봉비릉(追封妃陵)의 예(例)에 따른 것이다. 능원(陵原) 아래에 정자각(丁字閣)이 있으며 정자각(丁字閣) 동측(東側)에 비각(碑閣)이 있다. 비면(碑面)은 전서(篆書)로 조선국단경왕후온릉(朝鮮國端敬王后溫陵)이라 쓰고 음기(陰記)가 있으며, 순조(純祖) 7년(1807년) 4월에 세운 것이다. 정자각(丁字閣) 남측(南側) 참도(參道)가 시작되는 곳에 홍살문(紅箭門)이 있다.

재실(齋室)은 의정부(議政府) 벽제간(碧蹄間) 도로변(道路邊) 북측(北側)에 있었으나 1970년도(年度) 도로확장시(道路擴張時) 철거(撤去)되었으며 홍살문(紅箭門) 서남측(西南側)의 한식(韓式) 건물(建物)은 온릉관리사무소(溫陵管理事務所)로 사용(使用)하기 위하여 건립(建立)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