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87.jpg 사릉(思陵)은 제6대(第6代) 단종대왕(端宗大王) 비(妃)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宋氏)의 릉(陵)이다.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宋氏)는 본관(本貫)이 여산(礪山)이며 영돈녕부사(領敦寧府使)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 송현수(宋玹壽)의 여(女)로서 세종(世宗) 22년(1440년)에 탄생(誕生)하였고 생월생일(生月生日)은 미전(未傳)이다. 단종(端宗) 2년(1454년) 1월 22일 왕비(王妃)로 책봉(冊封)되었으니 춘추(春秋) 15세였다. 단종(端宗) 3년(1455년) 윤(閏) 6월 11일 단종(端宗)이 왕숙(王叔)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양위(讓位)하고 상왕(上王)이 됨에 의덕왕대비(懿德王大妃)로 올렸다. 세조(世祖) 3년(1457년) 6월 집현전(集賢殿) 학사(學士) 성삼문(成三問) 등의 상왕복위사건(上王復位事件)으로 단종대왕(端宗大王)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되니 노산군부인(魯山君夫人)으로 내려졌으며 이 해 10월 단종(端宗)이 세조(世祖)에 의하여 사사(賜死)되자 왕후(王后)는 궁실(宮室)을 떠나 성동(城東)의 숭인동(崇仁洞)에 초가수간(草家數間)을 지어 거처(居處)하면서 정업원(淨業院) 주지(住持)라 칭하고 왕실(王室)에서의 수급(需給)을 일체(一切) 고사(固辭)하여 백의소찬(白衣素饌)으로 종생(終生)하였다.

대왕(大王) 단종(端宗)의 능소(陵所) 영월(寧越)인 동쪽을 바라보기 위하여 올랐던 봉우리는 동망봉(東望峰)으로 불려지고 있으며 정업원(淨業院) 터에 영조(英祖) 어필(御筆)의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 비각(碑閣)이 있다.

중종(中宗) 16년(1521년) 6월 4일 소생(所生) 없이 승하(昇遐)하니 춘추(春秋) 82세였으며, 경기도(京畿道) 양주(楊州) 남(南) 군장리(群場里) 계좌정향(癸坐丁向)(북북동(北北東)에서 남남서향(南南西向)) 언덕에 대군부인(大君夫人)의 예(禮)로 장사(葬事)지냈다. 왕후(王后)는 후사(後嗣) 없이 승하(昇遐)함에 부왕(夫王) 단종(端宗)의 누이 경혜공주(敬惠公主)의 시가(媤家)인 정씨가(鄭氏家)의 묘역(墓域)에 장례(葬禮)하였으며, 봉사(奉祀)도 정씨가(鄭氏家)에서 하여왔다. 숙종(肅宗) 24년(1698년) 11월 6일 단종(端宗)의 묘호(廟號)가 추복(追復)되고 종묘(宗廟) 영녕전(永寧殿)에 부묘(부廟)되면서 시호(諡號)를 정순(定順)이라 하고 능호(陵號)를 사릉(思陵)으로 추봉(追封)하였다.

병풍석(屛風石)과 난간석(欄干石)은 설치(設置)하지 아니하였고, 능침(陵寢) 앞에 상석(床石)이 1좌(座) 있으며, 그 양측(兩側)에 망주석(望柱石) 1쌍을 세웠으며 양석(羊石) 1쌍과 호석(虎石) 1쌍을 능침(陵寢) 주위(周圍)에 배치(配置)하고, 그 밖으로 3면의 곡장(曲墻)을 세웠다. 한 단 아래 제2계(第2階)엔 문인석(文人石) 1쌍과 마석(馬石) 1쌍이 상면(相面) 배설(配設)되고, 중앙(中央)에 사각옥개형(四角屋蓋形) 명등석(明燈石)이 설치(設置)되었으며, 제3계(第3階)는 없다.

영월(寧越) 장릉(莊陵) 추봉시(追封時)에도 병석(屛石)과 난간석(欄干石)을 세우지 아니하였으며 수석(獸石)을 각 1쌍으로 한 것은 추봉릉(追封陵)의 예(例)에 따른 것이고 사각옥개형(四角屋蓋形) 명등석(明燈石)은 장릉(莊陵)과 같은 것으로 숙묘(肅廟) 연대(年代)의 양식(樣式)이다. 능원(陵原) 아래에 정자각(丁字閣)이 있으며 정자각(丁字閣) 동측(東側)에 비각(碑閣)이 있다. 비면(碑面)은 전서(篆書)로 조선국정순왕후사릉(朝鮮國定順王后思陵)이라 쓰고 음기(陰記)가 있으며 영조(英祖) 47년(1771년) 10월에 세운 것이다. 정자각(丁字閣) 남측(南側) 참도(參道)가 시작되는 곳에 홍살문(紅箭門)이 있으며 재실(齋室)은 홍살문(紅箭門) 동남측(東南側) 금곡-퇴계원문(金谷-退溪院問) 대로변(大路邊)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