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내(城內) 초즙(草葺)중에서 면모(面貌)가 가장 단아하고 사용된 부재도 듬직하며 구조된 형체도 건실성을 지니고 있다. 평면은 一자형이며 정면은 5간반이고 측면은 전후퇴(前後退)를 포함하여 3간 규모이다. 좌측에 부엌이 있으며 간반이다. 전후퇴까지를 합하여 한 공간이 되었으므로 상당히 넓은 면적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부엌의 판선(板扇)이 고주간(高柱間)에 있고 전퇴(前退)는 토벽(土壁)으로 반간(半間)만을 막은 외에 전면을 개방하여서 약간 위축되게 되었다.
부엌에 이어 안방 1간, 다음이 고방(庫房)이고 다음이 건넌방 1간이며 이어 퇴의 반간(半間)인데 이 퇴는 전후퇴간(前後退間)에선 토상(土床)이 되는 미묘한 구조를 보였다. 방과 고방의 앞퇴는 마루를 깔았는데 뒤편의 퇴간은 봉당인 채 두어서 수장공간(收藏空間)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추수(秋收) 등의 수입이 상당한 수준에 있었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는데 마을 사람들 말로는 향리가 살던 집이라고 한다.
토착의 향리들은 경제적인 상당한 기반을 닦고 살았던 모양이다. 비교적 높직한 댓돌로 죽담을 쌓고 부엌 앞쪽과 대청(고방) 앞쪽에 간이 돌층계를 두어 오르내릴 수 있게 하였다. 산석(山石)을 떠다 주초(柱礎)를 삼고 방주(方柱)를 세웠다. 평주(平柱)와 고주(高柱)를 세워 퇴와 몸채를 구성하였는데 퇴의 기둥들은 벽체 없이 홀로 서 있는 살기둥이고 몸채의 고주들은 벽체를 설치하고 수장들였다. 방은 토벽이나 고방(庫房)은 판벽(板璧)에 문얼굴 들이고 판선(板扇)을 설치하였다. 이 고방의 존재는 특히 주목되는 부분으로 성내의 다른 집에도 이런 고방이 없는 것은 아니나 이집의 구조로써 대표될 수 있다고 보여진다.
대청(大廳)에 벽체하고 판선설치한 구조의 분포는 태백산맥의 최남단쪽에 집중 분포되어 있다. 안동의 녹전면 일대로부터 시작되는 이 평면유형은 낙동강안(洛東江岸)을 끼고 형산강(兄山江) 일대에 널리 분포되면서 남해안쪽으로 퍼졌다. 보성강(寶城江)을 지나면서는 눈에 뜨이지 않게 되는데 어떤 연유에서인지 제주도에 이 유형의 변형이 존재한다. 제주도는 고방(庫房)이 아니고 대청에 대문이 달리는 구조이나 그 외형으로 봐서는 일맥(一脈)에 연하여 있다고 할 수 있다. 낙안성(樂安城)은 보성(寶城)에 이웃하여 있다. 보성강을 지나 장흥(長興) ·강진(康津)쪽에서 보기 어렵게 된 유형이 이 읍성내에 존재한다는 점에서 학술적인 가치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들의 집 구조에서 조선(造船)하던 선장(船匠), 배목수의 솜씨가 보인다고 하면 이 점도 주목하여야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