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정공 박팽년(1417∼1456)의 자손들이 정착하여 온 박씨마을 묘골과 낮은 산 하나를 경계로 하여 자리잡은 조선시대의 주택이다. 넓은 터에 대문간채·사랑채·안채·별당·연못이 배치되어 있다. 충정공의 11대손인 삼가헌 박성수가 영조 45년(1769)에 사랑채를 짓고 자신의 호를 현판으로 걸어 삼가헌이라 이름지었다. 그 이듬해에는 삼가헌 서쪽편에 별당을 세우고 주변과 연못에 각각 국화와 연꽃을 심은 뒤 하엽정이라 불렀다.

대문채와 사랑채, 안채가 모두 동남간방(東南間方)을 향하여 전후 3중(三中)으로 배열되어 있고 사랑채의 동단(東端)에는 중문채가 一자로 뻗어나가 있다. 또 안채의 서쪽마당 끝에는 간막이 없는 3간통(間通)의 곳간채가 동향으로 안마당을 향해 있다.

안채와 사랑채의 배치관계는 대략 튼 ㅁ자형에 가까운 것이라 하겠다. 별당채는 이들의 서편에 별곽(別廓)으로 담장을 돌려 전후로 연못과 후원을 두어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사랑채(三可軒)는 왼편에 4간대청을 두고 바른편에는 2간 온돌방을 두었으며 온돌방 앞에는 툇마루를 두었다. 2간 온돌방에는 겉으로 각기 골방이 있고 아랫방 아랫목에도 작은 골방과, 벽장 , 다락문을 갖추고 있어 사랑방의 수장(收藏)공간은 매우 다양하게 안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벽장의 쌍호(雙戶)에는 “성(誠)”“경(敬)”2자를 묵서게시(墨書揭示)하여 유가적(儒家的) 좌우명으로 하였고 대청벽에는 “삼가헌(三可軒)”편액이 걸려있다. 큰방 곁으로 툇마루에 연하여서는 1간의 청지기 방이 있고 앞뜰끝에는 차면(遮面) 판벽(板璧)을 세워 내대문(內大門)과의 간격을 막고 있다. 4간대청 안쪽으로는 1간의 마루방인 서고(書庫)를 두었으며 그 뒤로 연해서는 온돌방 1간(작은사랑)을 두었다. 이 방앞에 장독대와 우물이 있고 뒤에는 3간통(間通)의 곳간채가 있다. 사랑대청 안쪽 끝기둥에 의지해서는 뜰에 판장으로된 협문(夾門)을 두어 부엌 앞마당과의 경계를 짓고 있다.

안채는 길이가 6간이고 보간의 너비가 2간이며 고패부는 부엌에서 앞으로 1간, 건넌방 끝에서 2간인데 그 너비는 모두 1간씩이다. 부엌자리는 안방과 나란히 올려붙인 영남식 배치이고 건넌방과 그 아랫방의 배치도 간혹 있는 윗상방, 아랫상방식 배치를 보여준다. 윗상방은 역시 공통적인 건넌방의 기능을 가지며 아랫상방은 안사랑의 기능을 갖게 된다. 윗상방 웃간문 위에는“길상실(吉祥室)”3자를 백지에 써 붙였고, 아랫간문 위에는 “청좌계심상(淸坐契心賞)”이라 써 붙였다. 안방에 써 붙인 춘첩문구(春帖文句)는 웃간에 “춘풍생복수(春風生福壽)”아랫간에 “천지일가춘(天地一家春)”그리고 대청문 위에는 “의실의가(宜室宜家)”등을 붙였다. 건너방 뒤와 아랫상방 앞에는 길게 쪽마루를 두어 통로를 삼았다. 부엌옆 곳간채의 안끝에서는 부엌쪽으로 토담을 일자로 내 쌓아서 차면 (遮面)하였고 담장 안쪽에 바로 내측(內厠)을 두었다.

사랑대청 옆으로 긴 토담에 일각문을 내었는데 이것은 별당출입문이다. 하엽정(荷葉亭)은 ㄱ자집이고 길이가 4간이며 보간 너비가 전후의 퇴를 제하면 1간이다. 왼편 끝방 앞에 1간의 누마루를 꾸몄다. 온돌방은 3간이 넘고 마루는 가운데 1간에 그쳤으며 마루와 그 옆방 뒤편은 모두 툇마루이다. 마루는 전후에 4분합을 달았고 전퇴(前退) 4간도 모두 마루이다. 2간 온돌사이에는 네짝 장지문을 달았고 끝방 안쪽은 골방이다. 하엽정(荷葉亭) 편액(扁額)은 중온돌(中溫突) 미상(楣上)에 걸려 있다. 하엽정은 그 앞에 꽤 큰 연못을 두었고 넓은 후원에는 죽림(竹林)을 두었다. 연못은 길이가 21m, 너비가 15m의 수면을 가졌으며 가운데에 원형 중도(中島)를 두었고 지중(池中)에는 하화(荷花)를 심었다. 중도에는 원래 백일홍이 일주가 있었다고 한다. 못둑에는 매화수(梅花樹), 이수(梨樹) 등이 배치 되었으며 남쪽 담장 너머에는 현가주(現家主)의 고조(高祖)가 심었다고 전하는 높이 20m의 도토리 나무가 일주 남아 있다. 서쪽 담장너머 가까운 산에는 송림이 무성하다. 이 삼가헌과 그 향원(鄕園)은 원래 박팽년(朴彭年)의 11대손인 성수(聖洙)(호(號) 3가헌(三可軒)·증리조참판(贈吏曹參判))가 은거향제(隱居鄕第)로 조성한 것이며 그 초창은 영조(英祖) 45년(1769)이라고 전한다. 이분은 77세로 생애를 마쳤다고 한다. 묘동(妙洞)은 박팽년(朴彭年)의 후손이 낙남(落南)하여 이룩한 동족부락이며 사육신(死六臣)을 향사하는 사당과 태고정(太古亭)과 같은 종중(宗中) 고가(古家)도 전래하던 역사있는 마을이다. 

지정 당시 명칭은 묘동박엽씨가옥(竗洞朴?氏家屋)이었으나, 사육신 박팽년의 12대손인 박광석이 이웃한 묘골에서 현재의 위치로 분가해 오면서 가옥을 건립하고 부친의 호를 따라 삼가헌이라 이름한 것을 따서 ‘달성 삼가헌’으로 지정명칭을 변경(2007.1.29)하였다.

별당 

 

별당(하엽정)(별당(荷葉亭)) : 중요민속자료  제104-1호

하엽정(荷葉亭)은 ㄱ자(字)집이고 길이가 4간(間)이며 보간(間) 너비가 전후(前後)의 퇴(退)를 제(除)하면 1간(間)이다. 왼편 끝방 앞에 1간(間)의 누(樓)마루를 꾸몄다. 온돌방은 3간(間)이 넘고 마루는 가운데 1간(間)에 그쳤으며 마루와 그 옆방 뒤편은 모두 툇마루이다. 마루는 전후에 4분합을 달았고 전퇴(前退) 4간(間)도 모두 마루이다. 2간(間) 온돌 사이에는 네짝 장지문을 달았고 끝방 안쪽은 골방이다.

하엽정(荷葉亭) 편액(扁額)은 중온돌(中溫突) 미상(楣上)에 걸려 있다. 하엽정(荷葉亭)은 그 앞에 꽤 큰 연못을 두었고 넓은 후원에는 죽림(竹林)을 두었다. 



 

곳간 곳간 : 중요민속자료  제104-2호

 

 

 

 

 

 

 

 

 

 



 

안채 안채 : 중요민속자료  제104-3호

안채는 길이가 6간(間)이고 보간(間)의 너비가 2간(間)이며 고패부는 부엌에서 앞으로 1간(間), 건넌방 끝에서 2간(間)인데 그 너비는 모두 1간(間)씩이다. 부엌자리는 안방과 나란히 올려붙인 영남식(嶺南式) 배치(配置)이고 건넌방과 그 아랫방의 배치도 간혹 있는 윗상방(上房), 아랫상방식(上房式) 배치를 보여준다. 윗상방은 역시 공통적인 건넌방의 기능을 가지며 아래상방은 안사랑의 기능을 갖게된다. 윗상방(上房) 웃간문(間門) 위에는 “길상실(吉祥室) ”삼자(三字)를 백지(白紙)에 써 붙였고, 아랫간(間) 문 위에는 “청좌계심상(淸坐契心賞) ”이라 써 붙였다. 안방에 써 붙인 춘첩문구(春帖文句)는 웃간에 “춘풍생복수(春風生福壽) “아랫간에 “천지일가춘(天地一家春) “그리고 대청(大廳) 문 위에는 “의실의가(宜室宜家) ”등을 붙였다. 건넌방 뒤와 아랫상방 앞에는 길게 쪽마루를 두어 통로(通路)를 삼았다. 




 

사랑채 사랑채(삼가헌)(사랑채(三可軒)) : 중요민속자료  제104-4호

사랑채(三可軒)는 왼편에 4간대청(間大廳)을 두고 바른편에는 2간(間) 온돌(溫突)방을 두었으며 온돌(溫突)방 앞에는 퇴(退)마루를 두었다. 2간(間) 온돌(溫突)방에는 곁으로 각기 골방이 있고 아랫방 아랫목에도 작은 골방과, 벽장, 다락문을 갖추고 있어 사랑방의 수장(收藏) 공간 (空間)은 매우 다양(多樣)하게 안배(按配)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벽장의 쌍호(雙戶)에는 “성(誠) ”“경(敬) ”이자(二字)를 묵서게시(墨書揭示)하여 유가적(儒家的) 좌우명(座右銘)으로 하였고 대청(大廳) 벽에는 “삼가헌(三可軒) ” 편액(扁額)이 걸려있다. 큰방 곁으로 툇마루에 연하여서는 1간(間)의 청지기 방이 있고 앞뜰끝에는 차면(遮面) 판벽(板壁)을 세워 내대문(內大門)과의 간격을 막고 있다. 4간대청(間大廳) 안쪽으로는 일간(一間)의 마루방인 서고(書庫)를 두었으며 그 뒤로 연해서는 온돌방 1간(間)(작은사랑)을 두었다.

이 방앞에 장독대와 우물이 있고 장독대 뒤에는 3간통(間通)의 곳간채가 있다. 사랑대청 안쪽 끝기둥에 의지해서는 뜰에 판장으로 된 협문(夾門)을 두어 부엌 앞마당과의 경계를 짓고 있다. 

 

곳간 : 중요민속자료  제104-5호

 

대문채 : 중요민속자료  제104-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