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08.jpg 경상북도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주택.

 

1726년(영조 2)에 입향조 박숙(朴淑)이 처음 세웠다고 한다.

초창기의 규모가 어떠한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처럼 규모가 커진 것은 1824년(순조 24) 그의 현손(玄孫)인 운강 시묵(時默)이 중건하면서부터이다.

그 뒤 1905년 운강의 증손인 순병(淳炳)이 다시 증수하였다고 한다. 이 터는 원래 입향조인 박숙이 벼슬을 사양하고 낙향하여 서당을 짓고 후학을 가르치며 은거하던 곳이었다고 전한다.

운강도 후학양성에 크게 주력하였으며 1872년(고종 9)에는 강학소절목(講學所節目)을 마련하고 교육기관으로서의 기틀을 세워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이 집 대문에는 김충현(金忠顯)이 쓴 ‘雲岡故宅(운강고택)’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대문간채 만화정은 운강 선생이 철종 7년(1856)에 세워 공부하며 학문을 강의하던 곳이다. 안방에는 찬방과 찬마루를 따로 두었고 대청에도 여름철을 위한 찬광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안행랑에는 방앗간과 주인과 하인들이 따로 쓰던 변소가 있어 설계에 완벽함을 보인다. 또한 내외의 구별이 엄격하던 그 당시에 여자들이 사랑채 앞을 피해서 드나들 수 있도록, 뒷사랑과 안 곳간이 연결된 곳을 터서 작은 문을 만드는 세심함을 보였다. 중사랑채에는 책방과 마루방·온돌방이 있어 서당의 규모를 잘 갖추고 있다.

 

대구에서 남쪽으로 40㎞, 낙동강 하류인 금천남안의 대지에 서향한 취락에 위치해 있다. 대문채, 큰사랑채, 중사랑채, 광채의 4동이 넓게 4면에 대칭으로 배치되어 외당(外堂)구역을 형성하였고 안채, 행랑채, 광채, 곳간채의 4동이 역시 4면에 대칭으로 배치되어 내당구역을 이루었으며 내당(內堂)의 뒤편에는 장방으로 담장을 두른 사당채가 배치되어 있다.

만화정 이 집을 구성하고 있는 집채의 동수는 모두 9동이며 큰사랑채에서 ㄱ자로 꺽어 곳간채와 연결시킨 것을 예외로 한다면 집채마다 ㅡ자집인 셈인데 영남의 전통적 취락에서는 이같은 예가 매우 드문것이라 하겠다. 안채와 그 행랑채가 보여주는 ㅡ자형 평면구성은 남부지방 특유의 ㅡ자형집 기본형의 하나인 부엌, 방, 마루, 방의 안배방식(按配方式)을 바탕으로 한 것이며 그러한 고격(古格)있는 소가옥 양식이 이러한 대가의 격식에서도 그대로 바탕을 이룬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예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기능에 있어서는 대가족, 다동(多棟)의 집안이라는 요건에 따라 변화를 보이게 되는데 그것은 역시 공간적 변화와 비례하는 것이라 하겠다.

사랑채 안채는 길이가 7간이며 너비는 간반(間半)인데 부엌이 4간이며 안방과 웃방앞에는 2간 툇마루를 두었다. 안방과 부엌이 접하는 부엌 귀퉁이에는 작은 찬마루를 두어 안방에서도 드나들 수 있게 문을 내었다. 안방의 길이는 간반이고 전퇴(前退)가 있으니 이 집의 실질적 너비는 2간이나 되는 셈이다. 웃방의 안쪽에도 원래부터 간막이를 하여 찬광을 꾸몄으며 대청의 뒤편에도 역시 간막이를 해서 “여름찬광”을 마련하였다. 안방을 중심으로 찬마루, 찬광을 고루 분산시켜 다수화하였고 각기 그 기능을 분화시킨 것은 평면구성법의 한 발전형태라 할 수 있겠다. 대청은 실질적으로 3간크기 정도이며 기제시(忌祭時)의 제청(祭廳)으로 쓰인다고 한다.

중사랑채 북편에 가로 놓인 행랑채는 부엌, 방, 마루, 고방, 방앗간을 각 1간씩 ㅡ자로 두었으며 방앗간 뒤편에는 2간 측간(厠間)을 두어 안쪽은 내당용 바깥쪽은 행랑용으로 구분 사용케 하였다. 안채의 남편에 가로 놓인 4간의 광채는 의류와 주류의 곡간이며 서편에 세워진 6간의 간막이 없는 곳간은 곡간(穀間)이다. 곡간의 남편에는 ㄱ자로 달아낸 소 2간의 뒷사랑이 있는데 이 뒷사랑과 곡간의 끝기둥 주간에는 출입문을 내어 사랑채 후원에서 내정(內庭)에 직접 드나들 수 있게 하였다.

사랑채는 이 뒷사랑방과 ㅡ자로 서출(西出)한 정지기방, 큰사랑방 2간, 대청 2간의 5간으로 구성되었으며 두방과 대청 앞에는 툇마루를 두었다. 대청에는 불발기4분합들문이 달렸고 대청내벽에안채 는 “성경실”(誠敬室) 편액(扁額)이 걸려 있다. 사랑대청 끝나는 뒷기둥에는 부설된 일각문이 있어 대문을 들어선 부녀자들은 사랑채 앞을 지나지 않고 이 일각문을 통해서 후원을 지나 안마당으로 들어설 수 있게 꾸며져 있다.

대문채는 6간이며 대문간 바로 옆간에 측간을 두어 외측으로 하였다. 문간방이 2간이고 곳간과 외양간은 각 1간씩이다. 대문은 솟을대문이며 그 외문끝에는 “운강고택(雲岡故宅)”이라 쓴 김충현(金忠顯)의 편액이 걸려 있다. 대문에서 안으로 마주보이는 4간 ㅡ자집은 중사랑채인데 좌 1간은 누마루로서 서고(書庫)로 쓰였다고 한다. 툇마루를 둔 2간의 온돌방과 마루가 있는데 온돌의 문미에는 “백류원(百榴園)”이라 쓴 김충현의 편액이 걸려 있다. 중사랑의 후원이 원래의 백류원이었으나 지금은 석류나무가 없다. 원래는 고방 이 집의 가풍이 정년도제(靑年徒弟)들을 육성하는 것이었으므로 이러한 중사랑채는 강학서당의 구실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중사랑채의 남편에는 7간의 고방채가 있는데 과거에는 모두 수요가 많던 교통기구의 격납(格納)으로 쓰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하1간은 마판(馬板)으로 꾸며져 있고 마판뒤편에 붙여서 소측(小厠)을 꾸몄는데 하인전용이였다고 한다.

이 집의 병건자(병建者)는 박정주로 영조(英祖)2년(1726)에 세웠다고 하며 그 종손인 박시묵(朴蒔默)이 순조(純祖)24년(1824)에 중수하였고 시묵의 증손인 순병(淳炳)이 1905년에 다시 중수하였다고 전한다. 운강은 고종(高宗)9년에 강학소절목(講學所節目)을 작성하여 육영사업에 전력하였다고 한다. 대지는 1,770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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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랑채
 

중요민속자료 106-1

고택

조선 후기 주택으로 영조 2년(1726)에 박중응이 처음 세운 후 순조 24년(1824)에 운강 박시묵 선생이 지금의 규모로 크게 확장하여 다시 지었다. 주택으로서는 보기드문 규모이며, 안마당과 안채 후원·사랑채 후원 등의 넓은 공간을 여유있게 두었다.

안채와 사랑채를 비롯하여 대문간채·중사랑채·고방채·행랑채·사당채 등 모두 9채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집의 대문에는 김충현이 쓴 ‘운강고택’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사당이 맨 안쪽에 있으며, 그 앞에 안채를 중심으로 한 트인 ㅁ자형 건물과 사랑채를 중심으로 한 트인 ㅁ자형 건물들을 결합하여 배치하였다.

안방에는 찬마루와 찬방이 시설되어 있고 대청마루에도 여름철을 위한 찬광이 마련되어 있다. 안마당의 끝에는 곳간과 장류·주류를 저장하던 광채가 있으며, 안행랑에는 방앗간과 화장실이 있다. 중사랑채는 1칸 책방과 온돌방·마루방이 있어 서당의 규모를 잘 갖추고 있다.

중요민속자료 106-1-1

대문간채

대문간채는 一자형 평면을 가진 건물이다. 대문 왼쪽에는 뒷간이 있고 오른쪽에 문간방·곳간·외양간이 배열되었다. 대문에는 김충현이 쓴 ‘운강고택’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중요민속자료 106-1-2

사랑채

큰사랑채는 대문을 들어서 왼쪽에 ㄱ자형으로 자리잡고 있다. 큰사랑방과 대청이 일렬로 놓이고 큰사랑방의 뒤쪽으로 뒷사랑을 2칸 덧붙였다. 뒷사랑은 안곳간채와 연결이 되는 공간으로, 내당 여인들이 친가에서 온 남자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던 곳이다. 뒷사랑의 앞과 큰사랑방·대청 앞·뒤로는 툇마루를 두었다.

중요민속자료 106-1-3

중사랑채

중사랑채는 서당으로 사용하였던 곳이다. 책방과 온돌방·마루방이 있어 서당의 규모를 잘 갖추고 있다.

중요민속자료 106-1-4

안채

안채는 一자형 평면을 갖춘 집으로 왼쪽부터 부엌·안방·대청·안사랑이 배열되어 있다. 안방에는 찬마루와 찬방이 딸려 있고, 대청에도 여름철을 위한 찬광을 따로 마련해 놓아 주목된다. 안마당 끝에는 곳간과 광이 있다.

중요민속자료 106-1-5

고방채(1)

 

중요민속자료 106-1-6

고방채(2)

 

중요민속자료 106-1-7

고방채(3)

 

중요민속자료 106-1-8

행랑채

행랑채는 안채 왼쪽에 있으며 一자형 평면을 갖춘 건물이다. 왼쪽부터 방앗간·곳간·마루·방·부엌이 배열되었다. 방앗간 뒤쪽에는 주인과 하인들이 따로 쓸 수 있도록 뒷간을 두어 설비의 완벽성이 보인다. 행랑채 앞마당에는 네모반듯한 모양의 떡판돌이 있다.

중요민속자료 106-1-9

사당채

 

중요민속자료 106-2

만화정

운강고택의 부속 건물로 박시문(1814∼1875) 선생이 조선 철종 7년(1856)에 지은 후 공부하며 강론하던 곳이다. 정자인 만화정과 행랑채·하당·곳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요민속자료 106-2-1

만화정

 

중요민속자료 106-2-2

행랑채

 

중요민속자료 106-2-3

하당

 

중요민속자료 106-2-4

고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