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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시대, 부부의 사생활 어디까지?

문성식 2012. 3. 11. 20:47

디지털시대, 부부의 사생활 어디까지?

조지 오웰(1903-1950)의 소설 ‘1984’를 보면 ‘빅 브라더(Big brother)’가 나온다.

빅 브라더는 긍정적인 의미에서 ‘선의 목적’으로 사회를 돌보는 보호적 감시를 의미한다. 피감시자가 위험에 처하지 않고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보호하려는 ‘선의’가 내포되어 있다.

 

이 때 감시자가 원하는 것은 ‘재앙, 환난’의 예방이다.

그러나 빅 브라더에는 어쩔 수 없이 부정적인 의미 또한 담겨져 있다.

권력자들이 사회를 통제하기 위해 동원하는 강력한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크게 보았을 때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권력자들이 정보를 독점하여 사회를 통제하고 관리하려는 시도, 사회체계를 일컫는 말 또한 빅 브라더이다. 권력자들은 위기상황을 예방한다는 대의명분을 내세우며 끊임없이 감시를 행한다.

 

여기에서 바로 ‘문제’가 발생한다.

개인의 ‘사생활 침해’가 그것이다.

 

빅 브라더가 정보수집을 통해 강력한 권력을 지니게 되면 정보수집을 당한 피권력자, 피감시자는 어쩔 수 없이 굴복하는 시츄에이션이 되어 버린다. 디지털 시대 파워게임의 승자와 패자. 그들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과거 아날로그시대에는 ‘입소문’이라는 것이 있었다.

타인의 입을 통해 어떤 소식을 접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의 진실여부를 정확하게 가늠하기 힘들다.

 

그 진실여부를 알기 위해서는 나의 노력, 백방으로의 수소문, 그리고 ‘시간’이 필요했다.

그 소문이 나에게 위협적인 것일 경우 상황은 더 다급해진다.

그 중에서도 배우자의 부정, 외도에 대한 정보가 입소문으로 나에게 전달되었을 때의 그 당혹스러움. 그 소문, 이야기에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그 순간에 판단이 서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진실여부를 명확히 가늠할 수 없기에 일단 멈칫하게 된다.

 

만일 전해들은 이야기에 대해 ‘증거(?)’를 수집하기 원한다면 타자의 도움과 시간이 필요하였다.

그 시간 동안 우리는 자기 자신의 복잡한 감정들과 만나면서 하루에도 수십번씩 왔다갔다하는 혼란을 경험하고 감당할 수 밖에 없었다.

 

아날로그시절에는 그 증거수집이라는 게 쉽지 않기에, 결국 무조건 참거나, 혹은 배우자에게 다가가 결판 아닌 결판을 내는 식의 모습이 연출되기 쉽상이었다.

 

배우자의 발뺌 아닌 발뺌, 아날로그식 ‘오리발’이 통하던 시절. 격한 싸움의 소용돌이기 지나간 후 부부가 서로 위로하고 눈물을 흘리며 화해의 시간을 맞이하곤 하였다.

어떤 부부에게는 화해가 아닌 포기, 체념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다.

바로 최첨단 디지털문명이 우리 생활에 발을 들여놓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그리고 신속히 알려지고 조사되고 수집된다. 경우에 따라, 감당하기 힘든 깊은 정보까지 알게 되어버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나의 삶에 있어 디지털문명의 시작은 바로 ‘삐삐’였던 걸로 기억한다.

나는 처음으로 삐삐라는 매체를 통해 유선전화가 아닌 매체로 타자와 소통하기 시작하였다.

 

디지털 첨단문명에 있어 결단코 얼리어덥터가 아닌 나로서는 그 당시 삐삐라는 생경한 물건에 나름대로 저항감을 보이면서 유선전화로 버텼다.

그러나 삐삐가 트렌드가 아닌 생활로 자리잡은 때 뒷북을 치며 삐삐를 마련하였다.

지금 와서 되짚어보면 그 삐삐라는 것도 그 물건의 이름만큼이나 ‘촌스럽고 장난감같은’ 매체였던 것 같다.

 

오늘날 디지털시대의 첨단소통방식과 기록들에 비하면 말이다.

휴대전화, 문자메시지, 이메일, 미니홈피, 온라인채팅, 화상채팅……

그 끝없는 디지털문명의 진화는 우리의 삶에 신속함과 편리함을 넘어 삶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뒤짚기 충분하였다.

여기에 ‘위치추적’이라는 서비스까지 더해진 오늘날, 내 눈앞에 없는 나의 연인이나 배우자를 향한 열망과 그리움 혹은 불안과 의심이 인터넷의 정보엑세스를 통해 어느 정도 해소(?)될 수 있는 시절이 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모든 것에는 동전의 양면과 같이 그림자가 따르기 마련이다.

빅 브라더의 선의가 무색할 정도의 부작용 말이다.

그 어두운 면을 나는 많은 부부들을 만나면서 실감나게 맞닥뜨린다. 그들의 깊은 아픔과 함께 말이다.

부부간에 벌어지는 위기상황, 특히 외도와 관련하여 상당부분이 휴대전화와 이메일을 통해 처음으로 그 마각을 드러낸다.

디지털문명의 이기들이 ‘외도의 발각’이라는 충격적 사건을 수면위로 떠올리는데 일등공신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대부분의 부부들처럼 당신은 어느 날 갑자기 배우자의 휴대전화에 자꾸만 관심이 간다.

 

배우자의 휴대전화 속에 펼쳐져 있을 배우자의 사생활이 궁금하게 여겨진지는 이미 오래이다.

그러다 어느 날 ‘정말로 우연히’ 배우자의 휴대전화를 열어 보게 된다.

 

문자메시지, 통화기록을 조심스레 살핀다.

혹은 배우자가 로그아웃하지 않은 이메일을 ‘우연히’ 보게 되고 , 컴퓨터 어디엔가 고스란히 저장되어 있는 배우자의 채팅내용도 ‘우연히’ 보게 되고, 블로그와 미니홈피에도 한번 들어가본다.…..

 

이렇게 디지털문명에 기대어 배우자의 사생활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입수하게 되고 이 중에 몇몇 부부들은 배우자의 외도의 단서, 증거들과 결국 맞닥뜨리게 된다. 가슴이 무너져 내린다.

 

여기에 부부갈등이 심화되어 휴대전화 통화내역서와 위치추적까지 동원되면 이 게임은 더 이상 부부다툼, 위기상황이 아니라 디지털 추격전으로 변질된다.

내 앞에서 보여지는 배우자의 모습 이 외에 나와 함께 있지 않을 때의 배우자의 행적. 내가 원하면 원하는 만큼 많은 정보를 입수할 수 있다.

디지털 첨단문명을 기반으로 최신판 쫓고 쫓기는 부부간 환난이 가슴 아프게 펼쳐진다.

디지털 시대에 부부간 의심, 외도는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사생활’이라는 개념이 재정의를 요하는 게 현실이다.

물론 부부간 사생활이라는 이슈 자체가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이슈이다.

 

‘합의’가 어렵다는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디지털시대라 하더라도 부부관계에 있어서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게 있다.

 

디지털문명의 이기를 통해서건 다른 아날로그적 계기를 통해서건 배우자의 외도가 발각되는 순간은 결코 ‘우연’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 눈덩이처럼 커지고 실타래처럼 얽히고 설킨 각종 부부갈등들이 누적되고 또 누적되어 ‘포화상태’에 이른 부부들에게서 이런 발각 아닌 발각이 기어이 일어나고야 만다는 것이다.

 

전적으로 ‘우연히’ 배우자의 휴대전화에 손이 간 것이 아니며 ‘우연히’ 배우자의 이메일을 살펴본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기까지 무엇인가 크게 쌓인 것이 있다는 것이다.

 

내가 결코 행복하지 않으며 내 마음이 내 뜻대로 다스려지지 않으며 내가 내 불만을 해소하지 못한 채, ‘나’라는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지 못한 채 복잡한 문제들을 이리저리 그저 묻어두었기 때문이다.

 

대신 우리는 ‘내 말을 듣지 않는’,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나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 배우자를 끊임없이 통제하려하고 굴복시키고 싶어한다.

 

‘무관심’이라는 방식을 통해 배우자를 간접적으로 굴복시키려는 사람도 있지만 우리는 대부분 상대방의 영역에 ‘침해’함으로써 그에게 분노와 비난의 화살을 돌린다.

디지털문명의 이기들을 이용하여 배우자를 의심하고 통제하는 사람들을 보면 당사자의 의도야 어쨌건-그들은 결코 희망적인 부부관계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다.

즉 환난과 재앙을 예방하기 위해 디지털문명을 이용하여 배우자의 행적을 감시하는 부부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

 

대부분 위기스럽고 불만족스러운 부부관계의 국면을 전환하기 위하여 정보독점’을 통해 상대방의 힘을 잃게 하려는 무의식적 동기가 발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배우자를 굴복시키려는 ‘분노’가 그 근저에 강하게 깔려 있다는 것이다.

배우자가 굳이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는, 아니 정확히 표현하여 숨기고 싶어하는 부분들에 대해 피할 수 없는 증거를 가지고 배우자에게 절대권력을 행사하고픈 욕구. 어떻게 해서든 배우자에게 강력한 권력의 주체로 대두되고픈 절박한 마음. 그러나 이런 마음이 드는 순간 ‘부부애’는 소리없이 무너져버린다.

디지털시대에 우리 부부는 위기에 마주하고 있다.

인간은 타인에게 간섭받지 않을 권리라는 것이 있다.

그것을 사생활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사생활의 권리는 결혼을 하면서 크게 시험에 든다.

 

게다가 디지털시대를 맞아 기존의 부부간 사생활, 인간으로서 사생활이라는 개념은 이미 무너진지 오래이다.

부부간에 공히 원만하게 만족할 수 있는 사생활의 선을 정하고 조율, 타협하는 데에도 몇 년이 소요될 수 있다.

사생활이라는 것을 사랑과 관련시켜 생각하게 되는 게 인간이기 때문이다.

 

사생활을 지키기 위해 선을 긋는 배우자의 태도가 나를 멀리하려는 태도로 비추어지거나 무엇인가를 숨기기 위한 액션으로 비추어질 때 그 부부의 위기는 시작된다.

 

그렇다면 독자적 인간으로서 사생활 그리고 가정이라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배우자에 대한 정보공유와 자유의 제약은 어떻게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을까? 정말 쉽지 않은 고민이다. 특히 작금의 디지털시대에서는 말이다.

이렇듯 외부현실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막강한 빅 브라더, 디지털환경 속에서 흔들리고 있는 우리 시대 부부들이 평화롭게 성장하고 성숙할 수 있는 해법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그 열쇠는 거꾸로 우리의 내면에서 찾아 볼 수 있지 않을까?

결코 완전히 디지털화될 수 없는 ‘마음과 영혼’이라는 끝없는 바다가 우리에게는 있지 않는가.

 

인간으로서 ‘마음과 영혼’을 일깨우고 이를 청정하게 유지하려는 순수한 소망과 비전을 부부가 함께 다지는 것이야말로 이 난국을 헤쳐나갈 수 있는 해법이 아닐까.

 

당신의 부부는 ‘순수한 소망과 비전’을 가지고 있는가. 디지털시대 문명의 이기를 통해 배우자의 행적과 ‘배우자에 대한 독점적 사랑’에 두 눈을 고정시키며 불안에 잠식되어가는 나 자신의 모습을 과감히 떨치고 그 심리적 에너지를 환원시킬 때이다.

 

가장 바람직한 부부란 일치되는 부부가 아닌 “광범위하게 조화를 이루는” 부부이다.

광범위하게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두 사람이 적정한 거리를 두고 함께 공유하는 비전이 있어야 한다.

 

서로가 서로의 사생활, 독립성을 일정 부분 인정하면서도 함께 비전을 공유하고 있는 부부. 그렇게 ‘대칭적 공동진화’를 이루는 부부관계의 긴 여정에 ‘마음과 영혼이 살아숨쉬는 숲’이 있다.

 

이 숲을 함께 만들어 나가는 ‘일상’을 우리가 잊고 살아온 것은 아닐까.

배우자에 대한 불안, 배우자 행적에 대한 궁금증, 관심, 간섭, 의심, 폭력, 제압….이 모두는 완벽함에 대한 판타지이리라. 그 판타지의 유혹을 과감히 떨치고 배우자와 함께 ‘그 숲’을 향해 진화하는 삶을 구축하여야 할 때이지 싶다.

 

인간의 절대고독, 외로움, 소외감, 불신을 감싸안고 초월하기 위해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마음과 영혼’을 일깨우는 일밖에 없지 않을까. 모든 문제를 푸는 관건은 내면에서 싹트니까.

김선희/김선희부부클리닉 원장, 임상심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