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과 여,가정,부부

아줌마의 정체성

문성식 2012. 3. 14. 23:21

아줌마의 정체성

 

'저녁놀이 서러운 사춘기' 로 대표되는 이른바 '아줌마 증후군'은 정신적 공허함을 치환하기 위하여 다소 극단적인 방법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바람을 피우는데 목숨을 걸다시피 하는 것은 물론이요, 카바레에서 모르는
남자와 춤을 출 때에도 마음의 빗장을 완전히 풀어버리는 것 따위를 들 수 있겠다.

쇼핑하러 가서 현찰은 물론 신용카드 한도액까지 한방에 마두 긁어버리는 경우가
그렇고 그것만으로 부족해 종교에 심취해서 전 재산을 헌납하고 집안을 파탄내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행동하는 아줌마들은 '나는 무엇인가'라는 영혼의 갈증을 치유할 수 있는
사회적 돌파구가 없는 탓에 오랫동안 고통받다가 단 한순간에 자신을 날려보내고 마는 것이다.

가부장적 의식과 제도가 엄존하는 우리 사회에서 남성의 불륜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로 치부되기 쉽다.

하지만 여성의 탈선은 파멸을 각오한 외길 수순으로 각오해야 한다.

그런데 작금에 벌어지는 중년여성들의 일탈은 모든 사회적인 탈출구가 막혀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측면이 많다.

정신적 고통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으로는 자본주의 소비문화에 기댈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지금으로써 '아줌마 증후군'의 해결방법은 오로지 개개인의 각성뿐이다.

중년 역시 인생 역정의 한 시기라는 점을 자각하고 스스로 마음을 다스릴 수 밖에 없다.

서른이 넘어서 뒤늦게 결혼하여 낳은 아이들이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갈 무렵이면 웬만한 주부들은 대체로 한번씩 심한 우울증을 겪는 일이 있다.

아이들은 서서히 엄마 품에서 벗어나 자기들 세계를 구축하려 하고 남편은 직업적으로

자기 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바쁜 이유로 아내와 알콩달콩 놀아 줄 여력을 내기 어려는 시기이다.

가정에서 주부의 위치가 가장 불안한 시기가 이때 쯤으로 생각된다.

히스테리가 폭발하여 아이들에게 뜽금없는 화풀이를 한다던가 남편에게 물건을 집어던지는 가정도 해볼 수 있다.

심하면 신문 사회면을 장식하는 일도 생길 수 있다.

바야흐로 큰 위기가 닥쳐온 것이다.

 

다행히 조력자인 남편이 이를 빨리 눈치채고 탈출구를 마련해준다면 이보다 좋은 일이 있으랴.
이렇게 해서 선택한 것이 구청 문화원에서 운영하는 서예, 동양화등 교양강좌들이다.

스포츠 쎈터에서 수영이나 헬스등을 통하여 동병상련의 친구들을 사귈 수 있다.

인터넷에서 등산 여행 사회복지등 다양한 세계를 접하며 활발한 활동을 펼칠 수도 있다.

모름지기 세상이 나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깨달아 바쁘게 살다보면 울적한 불안감 같은 것들은 하찮게 날려버릴 수 있다.

내 인생은 무엇일까. 헛살지는 않았을까.

이제 내 인생의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앞으로 뭘 하면서 사나. 이런 고민 한번 안해 본 분이 있을까 싶다.

대다수의 주부들은 늘 이러한 상념에 짓눌리지만 막상
사회적으로 의미있는 활동을 시작할 자신감도 없었을 것이다.

가슴 깊이 뭔가 부글부글 끓어올라 한 겨울에도 창문을 활짝 열고 지낸 경험이 있을까.
고층아파트로 이사가서 창 밖만 내다보며 산다던가,
사람들이 거의 없는 밤시간을 택해 쓰레기를 버린다던지, 자신만의 시간을 갖기 위하여 오전이면 전화선을 빼 놓고 낙서를 즐기지 않았던가. 때로는 다정한 남자를 만나 말이라도 나누고 싶었으며, 한가하면 딴 생각이 드는 법이라고 여겨 하염없이 유리창을 닦았고 어느때는 하루종일 청소만 하기도 했다.
주부들이 할 수 있는 부업도 해봤으며 아줌마들과
고스톱도 치고 술도 먹고 성인나이트도 다녀봤다.

 

하루에 신용카드 두 세개 한도액까지 써가며 백화점 쇼핑을 즐기기도 했다.
하지만 이 모든게 결국은 1회용 탈출구에 불과하다고 결론을 내리고 만다.

몸부림을 칠수록 당혹·우울·짜증만 증폭될 뿐이다.

이젠 동원가능한 수단을 몽땅 써버렸다는 절망감,
갱생의 여지가 전혀 없다고 느끼는데서 찾아오는 황량함, 마침내는 손에 잡힐듯 말듯 죽음에의 공포마저 엄습하여 왔다.
꾸준히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직업을 갖고자 했지만
그녀를 기다리는 안성맞춤의 일터가 있을 리 만무했다.

 

적어도 우리나라에선 기혼의 여성들에게 능력발휘의 기회조차 주지 않고 있다.
그러다가 보니까 취미로 시작한 서예가 인사동을 무시로 출입하여
국전을 거론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돈에 좌우되는 끼리끼리 심사과정이 일간지에 널리 알려지면서 이마저 시들해지고 만다.

주부 우울증을 앓았던 올케가 있었다.

아이 키우기와 살림밖에 모르던 올케였는데 어느날 친구를 따라 세상 속으로 들어간 것이 큰 화근이 되었을 줄이야 알았겠는가.

살림밖에 모르던 주부가 일단 바깥 맛을 보자

순식간에 물불을 못가리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남편이 그만 가정으로 돌아오라고 애원했지만 그녀의 입장은 단호했다.


결국 가정은 풍비박산나고 상대방 남자는 가정으로 돌아갔으며
올케는 결국 혼자사는 처지가 됐다. 하지만 올케가 나쁘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그땐 그럴 수 밖에 없었을 처지가 이해되기 때문이다.

많은 여성들은 혼외정사 끝에 가정까지 저버린 중년여성을 탐탁하게 여기지는 않는다.

애인 신드롬이란 현실적으로 더 단단한 올가미를 쓰게 되는 환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륜은 중년여성 증후군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중년여성들은 불륜을 소재로 한 드라마나 영화에 심취하는 경향이 강하다.

 

김수현 작가같은 이는 주부들의 심리를 잘 파악하여 오랫동안 인기정상에 머물 수 있었다.
여성작가들이 쓴 베스트셀러 신작소설은 대채로 이 범주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다.

 

전경린씨의 '내 생애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 과 은희경씨의 '마지막 춤을 나와 함께', 공지영씨의 '존재는 눈물을 흘린다' 등이 그렇다.
전씨의 소설에서 보면 남편과의 섹스조차 '가사일'로 치부하게 된 주인공이
남편의 불륜 사실을 알고 자아찾기에 나선다는 줄거리다.

이른바 파멸이 예정된 섹스를 탐닉하는 셈이다.

중년기에 접어든 여성작가들이 같은 입장에서 불륜을 소재로
즐겨 다룬다는 것은 흔들리는 아줌마의 사회적 탈출구가 불륜 이외에는 드물다는 문학적 상징이라고 볼 수도 있을 법 하다.

여성에게 있어서 불륜이란 그 사회적 대가가 가장 혹독한 '일탈'이라고 할 수 있기에
자신이 증오하는 일상세계를 외면하는 최선의 상징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이처럼 중년여성의 위기가 도드라져 보이는 것은 전통적인 가부장적 가치관과
신세대의 가족해체적 사고방식 사이에 놓인 이른바 '샌드위치 세대'이기 때문이 아닐까.

앞 세대는 고통을 참아내는데 익숙하고 뒷 세대는 비교적 서슴없이
자신을 표현하는데 작금의 중년여성은 성차별과 남녀평등이 공존하는 전근대적인 시대를 갈등하면서 정체성이 크게 흔들린 것인지도 모른다.

이를 극복하려면 위기를 슬기롭게 넘기고 에너지를 긍정적으로 분출할 수 있는 대안이 필요하다.

가사와 육아에 전념했던 여성들에게 있어서 사회적 지평 위에서 다시금 정체성 확인이 필요한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