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12.

문성식 2010. 8. 30.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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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장. 지혜서 - 과거의 지혜와 현재의 지혜.
구약은 세권이 '지혜서'로 알려져 있다. 전도서, 잠언, 그리고 욥기 등.

 

지혜의 특성.
정확히 지혜란 무엇인가? 지혜란 진리를 경험의 빛하에서 개인의 생활에 적용하는 훈련이다.

 

지혜 문학의 오용.
전통적으로 지혜서는 다음 세가지 방법으로 잘못 사용되어 왔다.
1)이 책들을 단지 부분적으로만 읽는다. 영감받은 저자의 의도에 따른 전체적인 메시지가 있음을 알지 못한다.

2)사람들은 왕왕 지혜문학의 문체, 문학 형태 뿐 아니라, 지혜문학의 용어와 범주도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
(잠14:7) 너는 미련한 자의 앞을 떠나라 그 입술에 지식 있음을 보지 못함이니라
이 말씀은 신자들이 저능아, 무식한 사람 또는 정신지로한을 앓는 사람과 사귀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잠언에서 '어리석은 자' '미련한 자'는 기본적으로 '믿음이 없는 자'를 의미한다. 즉 이 단어는 이기심에 따라 생을 살며, 방자하고 변덕스럽고, 자기 자신 이외의 더 높은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불신자를 의미한다.

3)사람들은 종종 지혜 강설의 논쟁의 맥을 따라가지 못하는 수가 있다. 따라서 그들은 부정확하게 이해한 것으로 연명하려 한다.
(욥15:20) 그 말에 이르기를 악인은 그 일평생에 고통을 당하며 강포자의 햇수는 작정되었으므로
이 말은 악한 사람은 참으로 행복할 수 없다는 가르침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욥은 그것을 오히려 열렬하게 논박하였다. 엘리바스는 욥에게 그가 그렇게 많은 고난을 당하는 것은 욥 자신이 악한 자이기 때문이라고 설득하려고 애를 썼다. 욥기의 마지막 부분에서 하나님은 욥의 말을 변호하면서, 엘리바스의 말을 정죄한다.
욥기 전체의 논증을 따라가지 못한다면 이 사실을 알 수가 없다.

 

지혜자는 누구인가?
지혜는 논리적이거나 추상적인 어떤 것이 아니다. 지혜는 개인이 그가 경험을 통하여 습득한 진리를 따라 생각하고 행동할 때만 존재하는 어떤 것이다.
지혜 있는 사람은 단순히 이론적인 사람이 아니라, 매우 실천적인 사람이다. 종종 지혜는 건축 또는 항해와 같은 기술적인 문제들에도 적용된다.
지혜는 또한 다른 사람들의 복리에 영향을 끼치는 결정을 한 사람들에 의해 추구되었다.
구약 성경은 마음의 지적 기능 뿐 아니라, 도덕적, 의지적 기능도 가르친다.

 

지혜의 교사.
고대 이스라엘에는 지혜를 얻기 위해 전렴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지혜 얻는 법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 지혜의 교사들은 제사장과 선지자 '지혜로운 사람들'(현자들) 등으로 불리웠다.
이 특별한 지위에 있는 사람은 이스라엘의 왕정시대가 시작되는 무렵에 일어나서, 지혜를 찾는 사람들의 교사와 상담자 역할을 수행하였다.
지혜로운 사람이 그로부터 지혜를 찾고자 하는 사람에게 일종의 부모 대역을 했다.
요셉은 하나님에 의해 바로의 '아비'가 되었고(창45:8), 여선지 드보라는 이스라엘의 '어머니'라 불리웠다(삿5:7).
그래서 왕왕 잠언에서 지혜의 교사가 그의 생도들에게 '나의 아이야'로 부르는 것을 본다.
부모들은 자기들의 아이들을 보내어 지혜의 교사들에게 지혜로운 태도와 생활 습관을 배우도록 하였고, 이 지혜의 교사들은 그들의 생도들을 마치 자기 자식처럼 가르쳤다.

 

가정에서의 지혜.
지혜는 다른 상황에서보다 가정에서 더 많이 가르쳐지는 것이 보통이다. 잠언은 마치 기독교인 부모가 그러해야 하듯이 하나님의 지혜에 맞춰 충고를 한다. 그 충고는 매우 실천적이며 세속적 문제들과 관계되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이 도달할 수 있을 가장 지고의 선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동료들 사이의 지혜.
사람들이 자기들의 지식과 그에 부응하는 행위를 세련시키는 하나의 방법은 토론과 논쟁에 의한 것이다. 독백이나 대화 형식을 띨 수도 있다. 잠언에 특히 두드러진 지혜의 종류는 소위 잠언적 지혜라는 것이다. 반면, 전도서와 욥기에서 발견되는 지혜는 흔히 사변적인 지혜라 일컫는 것이다.

 

시를 통해 표현된 지혜.
구약시대에는 생도와 교사 모두 그들이 지혜를 기억하는데 도움이 되는 다양한 문학적 기교들을 사용하였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것들은 학습하기에 용이하고 기억하기에 수월하게 되었다. 시에는 문체상의 특징들이 있다. 그런데 잠언, 전도서, 욥기 등도 주로 시로 구성되었다. 특히 기교들 가운데 동의 대귀법, 반의 대귀법, 공식(잠21:16 - 처음 말이 알파벳 순서에 따라 쓰여진 시), 두운법, 비교법 등이 사용되었다.

 

지혜의 한계.
고대 세계의 모든 지혜가 경건하거나 일반적으로 옳다고 인정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근동 여러 지역에 지혜의 교사와 서기관들의 계급이 있었다.
이 상당수의 근동의 지혜는 구약의 지혜와 유사하다. 게다가 지혜는 삶의 전반을 다 망라하지는 않는다.
지혜는 대단히 실천적이기 때문에, 성경의 다른 곳에서 중요하다고 하는 신학적, 역사적 문제들을 다루고 있지는 않다.
솔로몬의 위대한 지혜는 그에게 부와 권세를 얻게 하는데 도움이 되었지만, 그의 말년에 하나님께 성실한 데서 돌이킨 것을 막지는 못하였다.
재능으로서의 지혜는 하나님께 순복할 때에만 구약성경이 의미하는 바 그 궁극의 목적에 도달하게 된다.

 

전도서 : 냉소적인 지혜
전도서는 종종 기독교인들을 당혹케 하는 지혜 독백이다. 그래서 전도서의 주요 내용은 인생이란 궁극적으로 허무하며, 죽음이 모든 것을 허망하게 할 것이므로, 누구든지 기회 있을 때마다 자기의 인생을 즐겨야 한다는 교사(전도자)의 충고의 말로 되어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전도서의 시종 일관한 메시지는 죽음의 실재와 종국은, 인생에는 궁극적인 가치가 없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사의 충고 역시 실존적이다. '당신이 살아 있는 동안 할 수 있는 대로 힘껏 인생을 향유하라'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거의 전부이고, 다른 것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 당신이 할 수 있는 한 윤택하게 살아라. 이것 이외에는 다른 의미가 없다.

그러나 전도서 마지막 12장에서 이렇게 경고한다.
(전12:13)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전12:14)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이 두 마지막 구절을 제외한 전도서의 대부분은, 가령 하나님이 인생에 직접적으로 간섭하는 일을 하지 않을 경우, 또한 사후의 생명이 없는 경우라면, 사람이 인생을 관조할 수 있을 만한 제 방법을 훌륭하고 예술적인 논법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 지혜는 실천적인 무신론자가 산출하는 세속적, 숙명론적 지혜이다. 하나님을 우리와 멀리 떨어진 위치에 놓을 때, 그리하여 우리와 전혀 상관이 없는 분으로 만들어 버릴 때, 전도서와 같은 결과가 나타난다. 그러나 전도서는 독자로 하여금 저너머를 보게 한다.

 

욥기의 지혜.
욥기에도 온갖 종류의 잘못된 충고와 바르지 못한 결론들을 포함하고 있다.
독자가 욥기를 통독해 보면, 욥기가 얼마나 잘 짜여진 대화 또는 담화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지를 발견하게 된다.
이 담화에서 독자들의 마음에, 인생에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은 그것이 항상 하나님께서 원하기 때문에 또는 그것이 공정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확신시켜 주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욥기는 전도서의 목적과 거의 정반대의 목적이 있다.

전도서는 인간 만사에 개입해 있지 않은 하나님을 묘사하려 하였다. 반대로 욥의 위안자들은,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지만, 금생의 사건들을 통하여 계속하여 그의 심판을 할당하신다는 관점을 제시한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통어하신다면 세상의 흥망성쇠가 다 그의 행하심과 그의 뜻에 따른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듯하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성경은 오히려 세상이 타락했고, 죄로 인해 더럽혀졌으며, 사단의 통치하에 있고, 인생에 일어나는 많은 것들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친다. 특별히 고난은 죄의 필연적인 결과는 아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들의 방법을 초월해 있다. 그가 고난을 허락하신 것은, 그가 무엇을 행하시는지 알지 못하고 계신다든지 그가 그것을 행할 권리가 의심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이 가장 세련된 의미에서 진정한 지혜이다.
욥기를 읽는 사람은 세상의 지혜 - 그것이 논리적인 듯하지만 사실은 그릇된 지혜임 - 가 무엇이며, 하나님의 지혜가 무엇이며, 또한 하나님의 주권과 의를 확신하게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된다.

 

잠언의 지혜.
잠언은 신중한 지혜 - 사람들이 책임 있는 삶, 성공적인 삶을 사는 데 필요한 규율들과 법칙들 - 의 중요한 보고이다. 잠언의 지혜는 주로 실천적인 태도들에 중점을 두고 있다.
잠언은 지혜로운 생활과 어리석은 생활 사이의 엄격한 대조를 제시한다.
특별히 종교적인 언어는 잠언에서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그것은 인생의 모든 것이 경건한 것이 되기 위해, 엄격히 종교적이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잠언의 사용과 오용.
잠언에 관하여 기억해 두면 좋은 한 가지 사실은 잠언이 히브리어로 메샬림(비유적 언어, 비유, 특별히 고안된 말)이라고 불리운다. 잠언은 간결하고 구체적인 진리의 표현이다.
히브리의 많은 잠언들에는 특히 배우기 쉽도록 하기 위한 음율, 음성 반복, 어휘의 특징들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히브리 잠언은 합리적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잠언은 잠언으로서 취급해야 한다. 잠언은 진리에 관한 모든 것을 진술하지 않고, 진리를 향한 방향 제시를 하는 것이다.
잠언은 비유적 언어를 사용하여 세밀하게보다는 암시적으로 사물을 표현하는 경향이 있다. 잠언의 말씀은 너무 문자적으로, 또는 너무 보편적으로 취급해서는 안된다.

(잠16:3)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직접적이고 분명하며 항상 적용 가능한 약속이어서 만일 누구든지 자신의 게획을 하나님께 철저히 맡기면 그 계획은 반드시 이루고야 말것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실망할 수가 있다. 그들은 어떤 아주 이기적이거나, 어리석은 계획을 하나님께 완전히 맡길 수 있다. 그런 것들은 실패로 끝날 것이다.
그러므로 잠언의 이 말씀이 절대적이고, 항상 적용 가능한 엄격한 약속이 아니라 좀더 일반적인 진리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잠언을 잠언으로 이해한다면, 그리고 그것을 암시하는 진리의 특수한 시금석으로 이해한다면 잠언이야말로 삶의 중요하고 도움이 되는 보조물이 된다.

 

해석학적 지침들.
잠언은 하나님의 법적 보증이 아니다.
잠언은 어떤 선별된 실천적 목표에 접근하기 위한 지혜로운 방법을 서술하지만, 그것을 하나님의 성공 보장과 같은 것으로 취급할 수는 없다. 잠언 어느 곳에서도 자동적인 성공을 가르치지 않는다.

(잠22:26) 너는 사람으로 더불어 손을 잡지 말며 남의 빚에 보증이 되지 말라 (잠22:27) 만일 갚을 것이 없으면 네 누운 침상도 빼앗길 것이라 네가 어찌 그리하겠느냐
이 말을 극단적인 단계를 취하게 되면, 융자를 얻어서는 안되니 집을 결코 살 수 없게 될지도 모르겠다. 또 신용 카드의 외상 거래의 빚 갚는 것을 태만히 하다가는 결국 침대를 포함한 당신의 모든 소유를 잃고 말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런 문자적이고, 극단적인 해석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잠언의 요지를 놓치고 만다.


본문의 말씀은 '저당잡힌 것을(기한이 지나) 되찾을 권한이 상실되면 대단히 가슴 아픈 일이 될 것이므로 빚은 조심해서 지도록 하라'는 사실을 시적으로, 비유적으로 서술한다.

잠언의 이 말씀은 전문적인 어떤 것을 표현하기보다는 광범위한 원리를 지적한다.

(잠29:12) 관원이 거짓말을 신청하면 그 하인은 다 악하니라
이 본문은 진리 대신에 거짓말 듣기를 좋아하는 관원의 주위에는 그 관원이 듣기 좋아하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몰려들게 된다는 것을 가르친다. 그 결과 그 관원은 부패할 수밖에   없다.
역시 비유적인 방법으로 원리를 지적하고 있다.

(잠15:25) 여호와는 교만한 자의 집을 허시며 과부의 지계를 정하시느니라
본문은 의도상 문자적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교만한 사람의 집이라도 든든히 서 있으며 탐욕스러운 채권자들이나 사기꾼들에 의하여 기만당하는 과부들이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말씀의 의미는 무슨 뜻인가?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대적하시고 곤고한 자들 - 과부, 고아, 나그네 등은 전반적으로 남의 신세를 지고 있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용어들이다 - 의 편이시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궁극적으로 이 세상의 악한 것들을 바로잡으시며, 교만한 자들을 멸하시고 외롭게 고난을 당하고 있는 자들에게 보상하신다는 일반적인 원리를 지적하기 위하여 성령에 의하여 기획된 간략한 비유이다.

잠언은 총체로 읽혀져야 한다.
잠언의 말씀은 다른 것들과 균형이 맞추어져야 하며, 성경의 나머지 부분과 비교해 가며 이해해야 한다. 개체의 잠언이 오해될 경우, 그것은 잠언을 전체로 읽는 경우보다 당신을 훨씬 더 온당치 않은 태도와 행동으로 이끌지도 모른다.
더욱이 당신은 잠언의 물질적인 것들에 너무 집요하게 실제적인 관심을 두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며, 이 세상이 여러분들에게 물질주의와 세속화주의를 경고하고 있는 성경의 다른 균형잡힌 가르침들을 망각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잠언은 종종 다양한 방법으로 단락이 지어 있어서, 잠언은 통독하는 중에 한 주제에서 다른 주제로 뛰어 넘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잠언은 논리적으로 정확한 말이 아니라, 기억하기 쉬운 말이다.
어떤 잠언의 말씀도 완벽한 진리 서술인 것은 없다. 어떤 원리가 간략하게 비유적으로 서술되면 될 수록, 그것을 온당하게 해석하기 위한 상식과 올바른 판단이 더욱 필요하게 되나, 그것은 더욱 효력이 있으며 기억하기 쉽다.
잠언은 시적 문장과 생생한 상상력을 대단히 많이 채용한다. 그래서 그 구성상 마음 속에 있는 영상을 자극하거나, 귀를 즐겁게 하는 음성들을 포함하고 있다.

 

잠언 31:10-31에 묘사된 현숙한 아내의 지극한 헌신은 사실 본받기에는 불가능한 생활 양식을 묘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의 묘사는 현숙한 아내가 그녀의 가정에 가져다 주는 기쁨을 과장법을 써서 강조하려는 데 목적이 있다는 요지를 파악해야 한다.

끝으로, 어떤 잠언은 이해하기 위하여 '번안될' 필요가 있다.
대단히 많은 잠언들이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일반적인 것들이었으나, 지금은 더 이상 존속하지 아니하는 관습들과 제도들에 따라 진리를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번안되어야 의미가 통한다.

잠언에서 나오는 '왕'은 항상 모든 지도자들에 대한 제유이다.

그래서 잠22:11은 지도자들과 책임맡은 자들은 정직과 사려 깊은 말에 일반적으로 감명을 받는다는 진리를 지적하기 위한 것이다.
(잠22:11) 마음의 정결을 사모하는 자의 입술에는 덕이 있으므로 임금이 그의 친구가 되느니라

 

적절한 잠언의 사용과 잠언의 신적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몇가지 법칙들을 간략하게 살펴보자.
1.잠언은 흔히 비유적이다. 즉, 비유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용어 그 자체 이상의 어떤 진리를 지적한다.
2.잠언은 실천적인 것이지 논리적으로 신학적인 것이 아니다.
3.잠언은 기억하기 쉬운 말로 되어 있으며, 기술적으로 정확성을 기한 말은 아니다.
4.잠언은 이기적인 행동을 지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 오히려 정반대이다.
5.고대의 문화를 강하게 반영하는 잠언은 그 의미를 손상시키지 않기 위해서 이해 가능한 '번안'을 할 필요가 있다.
6.잠언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어떤 보장이 아니라, 선한 행동에 대한 시적 지침들이다.
7.잠언은 그 핵심점을 이루기 위해 매우 특수한 언어, 과장법 또는 그밖의 다양한 문화적인 기교를 사용했다고 할 수 있다.
8.잠언은 생애의 어떤 면들에 대한 지혜로운 접근을 위한 훌륭한 충고를 제시하나, 생의 전반에 걸친 모든 사례를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9.잠언은 잘못 사용되어질 때 우둔하고 물질적인 삶의 양식을 정당화시키는 것이 될 수가 있다.

  그러나, 잠언은 올바르게 사용될 경우에는 매일의 생활에 대한 실천적인 충고가 된다.

 

 

 

출처 : Joyful 의뜰 원문보기   글쓴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