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13.
제13장 요한 계시록 - 심판과 소망의 상징들.
요한계시록에는 천사, 나팔, 지진, 짐승, 용 그리고 심연의 구덩이로 가득 차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해석학적 문제는 본질적이다.
풍부하고 다양한 상징들이 있고, 그 중의 어떤 것은 다루기가 쉽지만, 어떤 것은 애매 모호하다. 문제들의 대부분은 상징들에 기인하며, 게다가 본서가 미래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에도 있다.
맨 먼저 언급해야 할 것은 아무도 겸손함이 없이는 요한계시록에 접근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요한계시록의 특징.
요한계시록 석의의 첫 번째 열쇠는 그것의 문학 종류를 검토하는 일이다. 요한계시록은 세 개의 독특한 문학 형식 - 묵시, 예언, 그리고 서신서 - 으로써 특이하면서도 섬세하게 혼합된 조화물이다. 그리고 묵시는 오늘날 우리의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는 문학 형태라는 점이다.
묵시로서의 요한계시록.
계시록은 근본적으로 묵시이다. 그것은 주전 200년에서 주후 200년 사이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에게 잘 알려졌던 수십 가지의 묵시문학 가운데 하나이다.
계시록의 묵시에는 몇가지 공통적인 특징들이 있다.
1.묵시문학의 주근은 구약의 선지문학, 특히 에스겔, 다니엘, 스가랴 그리고 이사야의 일부이다. 묵시문학의 주된 관심은 임박한 심판과 구원이다. 그러나 묵시문학은 핍박시, 또는 대환난의 때에 탄생했다. 그러므로 묵시문학의 큰 관심은 더 이상 역사 내에서의 하나님의 활동이 아니다. 묵시문학가들은 하나님께서 역사에 격렬하고 과격한 종말을 가져오는 때만을 염원하였다.
2.선지서들과 달리 묵시문학은 처음부터 문학 작품이었다. 묵시문학에는 특별히 기록된 구조와 형식이 있다. 요한은 '그가 본 것을 기록하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그 반면 선지자들은 그들이 듣고 본 것을 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3.묵시문학의 가장 자주 사용되는 '재료'는 이상과 꿈의 형태로 제시된 것이며, 그 언어는 암호적이며 상징적이다.
4.묵시문학의 싱징들은 종종 실체가 아닌 환상의 형태들이다.
5.묵시문학은 문학이기 때문에, 그것들의 대부분은 형식을 갖춘 문체를 이루고 있다. 시간과 사건들을 세밀하게 구획하는 경향이 강하게 있다. 또 상징적인 숫자의 사용을 대단히 좋아한다.
계시록은 익명이 아니라는 점을 빼고는 묵시문학의 모든 특징을 다 가지고 있다.
예언으로서의 요한계시록.
요한의 묵시록이 익명이 아닌 이유는 아마도 요한 자신의 이미/아직으로서의 종말에 대한 인식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요한은, 단지 종말을 대망하기만 하던 그의 선례자들과 달랐다.
그는 종말이 예수님의 초림과 더불어 이미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런 이해의 결정적인 것은 성령의 강림이다. 요한은 새 시대에 속하며, 그가 본 것을 기록하라는 지시를 받았을 때 '성령 안에' 있었다.
그러므로, 요한의 묵시록이 여타의 묵시문학과 다른 것은 무엇보다도 바로 이 묵시와 예언의 요소들이 혼합되었다는 사실이다.
계시록은 묵시적 틀로 이루어져 대부분의 묵시문학적 특징들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박해시에 탄생하여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의 승리와 함께 종말에 관하여 말하려는 것이 목적이다.
요한은 이 묵시를 교회를 향한 예언의 말씀으로 의도한 것이 분명하다. 그의 책은 미래를 위해 봉함되어서는 안 되었다. 그 말씀은 대개 앞으로 올 심판과 구원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것이다.
서신서로서의 요한계시록.
1:4-7, 22:21을 보면 서신 형식의 모든 특징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그 최종의 형태에 있어서는 요한에 의해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에게 편지로서 보내어진다.
이것이 계시록의 상황적 면모이며, 그 상황이란 적어도 이 편지를 받는 특정한 교회들의 필요들과 관계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해석하기 위하여서는 그것의 원래의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도록 해야만 한다.
석의의 필요성.
1.계시록 석의의 첫 번째 과제는 저자의 원래 의도, 그리고 그와 함께 수반되는 성령의 의도를 찾는 일이다. 계기록의 일차적인 의미는 요한이 의미하려는 것이며, 이것은 또한 그의 독자들이 읽고 그러한 의미로 이해할 수 있었던 어떤 것이어야 한다.
2.계시록이 예언적인 의도를 지니고 잇으므로, 독자는 성령으로 영감된, 그러나 저자나 그의 독자들에 의해서는 충분히 드러나지 않은 부차적인 의미의 가능성에 대하여 개방적이어야 한다.
여기서 석의의 과제는 요한이 그의 원래 독자들이 듣고 이해하기를 의도한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3.계시록의 석의에 있어 '성경의 유비' 개념을 과잉 사용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성경의 유비란 성경을 다른 성경의 빛으로 해석해야 될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해석의 열쇠는 계시록 자체의 본문에 내재해 있든지, 아니면 원래의 수신인들이 그들 자신의 역사적 배경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든지 해야만 한다.
4.계시록의 묵시적, 예언적 특성 때문에 석의의 수준에서 난제들이 있다. 이것은 특히 상징들에 관한 것이다. 이점에 몇가지 제안을 열거한다.
①누구든지 요한계시록의 작성에 사용된 사상들의 풍부한 배경에 민감해야 한다. 이런 사상들과 상징들의 주요 원천은 구약성경이다. 물론 고대신화에서 인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영감하에서 그 의미가 파기되었거나 변형되어 '새로운 예언' 속으로 혼합되어 들어왔다.
②묵시문학적 상징은 그 종류가 다양하다. 또 어떤 상징들은 유동적이다. 유다 지파의 '사자'는 사실 '어린 양'인 것으로 판명된다. 12장의 여인은 긍정적인 상이지만, 17장의 여인은 악하다. 또 어떤 상징들은 특정한 사물들을 언급한다. 7촛대는 7교회를, 용은 사단을 지칭한다.
③요한 자신이 그의 상징들을 해석하였을 경우, 이 해석된 상징들은 다른 것들을 이해할 출발점 역할을 하며, 우리는 이것들을 견지해야만 한다.
계시록에는 해석된 6개의 상징들이 있다. 인자 같은 이는 그리스도이며, 그만 홀로 '죽었다가 ... 영원 무궁히 사실 분이다' 금 촛대는 7교회이다. 7별은 교회의 7천사들, 또는 사신들이다. 큰 용은 사단이다. 7뿔은 그 여인이 앉은 7언덕들(또한 7왕들)이다. 음녀는 큰 성읍 - 로마를 가리키고 있음이 분명하다.
④이상들을 전체적으로 보아야지, 알레고리적으로 세세한 설명을 가해서는 안된다. 전체의 이상은 어떤 것을 말하려 한다.
⑤계시록에서는 미래에 대한 자세하고 연대기적인 언급이 거의 없다. 계시록에서는 이런 관심을 초월하고 있다. 요한의 지대한 관심은 현재 상황에서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역사와 교회를 통어하신다는 사실이다.
교회가 앞으로 고난과 죽음을 경험할 것이지만, 그것은 그의 적들을 심판하고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를 쟁취할 것이다.
역사적 배경.
계시록을 통독하는 것이 좋다. 큰 장면을 읽고, 모든 것을 이해하려 하지 말라.
당신이 계시록을 읽을 때 저자와 그 독자들에 대한 암기용 간략한 노트를 하도록 하라. 요한의 독자들이 '고난에 동참한 자'(1:9)임을 지시하는 모든 언급들을 일일이 뽑아내라. 이것들은 결정적인 역사적 지시어들이다.
요한 자신은 그의 신앙으로 인해 유배당하였고, 다른 사람들도 '예수님의 증거'를 인하여 고난을 경험하며, 한 사람은 심지어 죽기까지 하였다(2:13). 요한이 성령 안에 있을 때, 그는 그들의 현재의 고난이 단지 '짐승에게 절하지 아니한' 자들에 대한 화의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동시에 그는 모든 교회들이 그들 앞에 있는 것들을 맞이할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다는 확신이 들지 않았던 것이고, 그리하여 이 예언을 기록하였다.
주요 주제는 분명하다 :
교회와 국가는 역사적 진행에서 계속 충돌하며, 승리의 기선은 국가가 잡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교회에게 고난과 죽음이 앞에 놓여 있다고 경고한다. 교회는 상태가 호전되기 전에 최악의 상태를 맞이할 것이다(6:9-11). 요한은 고난과 죽음이 속박의 때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것에 큰 관심을 기울인다(14:11-12, 21:7-8). 그러나, 이 예언의 말씀은 격려의 말씀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만물을 통어하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역사의 열쇠를 쥐고 계시며, 그는 그의 손으로 교회들을 붙들고 계신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망을 통하여도 승리한다(12:11).
로마는 심판을 받게 될 원수이다.
계시록 해석의 열쇠는 두 핵심적인 단어 또는 개념들에 대한 요한의 구별에 있다.
그것은 환난과 진노이다. 이를 혼동하거나 동일한 것으로 이해하면 계시록의 메시지 파악에 절망적이 될 것이다.
환난(즉 고난과 죽음)은 교회가 겪고 있는, 또한 앞으로 겪게 될 것임의 일부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게 한 사람들에게 부어질 그의 심판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두려우신 진노가 그들의 원수들에게 쏟아질 때 그것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 요한계시록의 여러 문맥에서 명백하게 나타난다.
또 이런 구별이 신약성경의 다른 가르침과도 정확히 일치한다.
살후1:3-10절에 사용된 '환난'은 요한계시록의 '환란'과 같은 헬라어이다.
(살후1:4) 그리고 너희의 참는 모든 핍박과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을 인하여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함이라
문학적 배경.
서신서에서는 '문단을 생각' 해야하는 것처럼, 요한계시록도 그렇다.
계시록은 하나의 거대한 드라마처럼 펼쳐진다. 맨 처음 장면은 무대와 배역들을 설정하며, 나중 장면들은 우리가 플롯(줄거리)을 따라갈 수 있도록 앞의 모든 장면들을 필요로 한다.
1-3장은 무대를 설정하며, 우리들에게 중요 '배역들'을 소개한다.
먼저, 책 전체를 걸쳐 해설자 역할을 할 요한 자신이 있다(1:1-11).
그는 그리스도의 신앙으로 인하여 유배되었고, 현재의 박해는 앞으로 있을 것의 전초전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는 예언자적 통찰력을 지녔다.
둘째, 그리스도가 있다.1:12-20). 요한은 단10장에서 나오는 찬란한 모습을 인용하여 그를 역사의 주요 교회의 주인으로 묘사한다. 그리스도가 홀로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쥐고 계신다.
셋째로, 교회가 나온다(2:1-3:22). 대표적인 7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서 요한은 교회들을 격려하며 경고한다. 이미 박해에 당면해 있다. 또 교회에는 더 많은 박해가 기다리고 있다. 이기는 자에게는 최후의 영광의 약속들이 있다.
4장-5장 :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말할 수 없이 놀라운 이상들과 함께 교회는 하나님께서 대주재의 엄위로써 통치하신다는 음성을 듣는다(4장). 하나님이 과연 거기 계시며 그들을 위하여 어떤 행동을 취하시는지에 대하여 의아해 하고 있을 신자들에게 요한은 하나님의 '사자'는 고난을 통하여 친히 인류를 구원한 '어린 양'임을 깨닫게 한다(5장).
6-7장에서는 실제의 드라마가 펼쳐지기 시작한다.
계시록을 통하여 3번이나 조심스럽게 7개씩으로 구성된 이상들이 제시된다(6-7장, 8-11장, 15-16장). 매 경우마다 앞의 네 개는 하나의 그림을 그리기 위해 한데 어울려 있다.
6-7장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진행되는지를 살펴보자.
1. 흰 말 탄 사람 = 정복
2. 붉은 말 탄 사람 = 전쟁
3. 검은 말 탄 사람 = 기근
4. 청황색 말 탄 사람 = 사망
5.순교자들의 탄원 :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6.지진(하나님의 심판) : 누가 능히 서리요.
⒜인 맞은 자 십 사만 사천
⒝큰 무리
7. 하나님의 진노 : 8-11장의 7나팔들
8-11장은 하나님의 심판의 내용을 계시한다.
처음 네 번째 나팔들은 자연계의 큰 혼란을 초래하는 것임을 지적한다.
다섯 번째 나팔과 여섯 번째 나팔은 야만인들의 무리와 큰 전쟁이 있을 것을 지적한다.
일곱 번째 나팔이 울리며 결론을 맺는다. '이 세상의 나라가 우리 주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었도다'
12-22장은 그 심판과 승리를 세세하게 묘사해준다.
12장은 요한계시록의 신학적 열쇠이다. 두 이상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멸하려는 사단의 시도와 그 패배를 읽는다. 그런즉, 신약성경이 되풀이하여 일어나는 이미와 아직 구조 가운데서 사단은 패배한 원수이나 그의 궁극적인 종말은 아직 임하지 않은 것으로 계시된다.
13-14장은 어떻게 그 복수가 요한의 교회에게는 종교적인 충성을 강요하는 로마제국와 그 황제들이라는 형태로 나타나는지를 보여준다.
17-22장에서 계시록은 '두 도시의 이야기'로 종결된다. 세상의 도시(로마)는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함으로 인하여 정죄된다. 그런 다음 하나님의 백성이 영원히 거주할 하나님의 도시가 뒤 따른다.
해석학적 질문들.
선지서와 요한계시록은 그들에게 장차 일어날 일들에 관하여 언급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장차 일어날 일'은 왕왕 시간적으로 즉각적인 경우도 있어서, 우리의 역사적인 입각에서는 이미 일어난 사건이다. 로마제국은 요한이 내다본 것처럼 부분적으로 야만인들의 물리로 말미암아 일시적인 심판하에 들어갔다.
그러나, 해석학적 난제는 이 책의 요지인 경고와 위로의 말씀을 경청하는데 있지 않다. 그 난제들은 예언의 다른 현상, 즉 '당대에 관한' 말씀이 종종 궁극적인 종말론적 실재들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데 있다.
몇가지 제안들.
1.우리는 미래의 그림들이 단지 그림이라는 사실을 배울 필요가 있다. 그림들은 실재를 표현하나 그것 자체는 실재와 혼동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그림의 아무리 세세한 부분들이라도 반드시 어떤 특별한 방법으로 '성취될' 필요는 없다. 그러므로 4 나팔들이 하나님의 심판의 한 부분으로서 자연의 재앙을 선포할 때, 우리는 이 그림들의 문자적인 성취를 기대해서는 안된다.
2.주로 하나님의 심판의 확실성을 표현하기 위해 고안된 어떤 그림들은 단시간, 적어도 우리의 제한된 시각에서의 단시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서는 안된다.
사단의 때가 얼마남지 않았다는 것이 '곧 바로'란 의미를 지닌다고 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단지 '제한된'이란 의미일 뿐이다.
3.'당대의' 사건과 '종말론적' 사건이 긴밀히 연결된 그림들을 동시대의 것으로 간주해서는 안된다. 심판과 구원의 '종말론적' 차원은 우리들에게 그 많은 그림들의 '아직'의 차원의 가능성을 경고한다.
계시록은 중공의 존재를 예언하려는 것이 아니며, 우리들에게 역사의 결과에 대한 문자적으로 세밀하게 설명하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4.명확하게 정의할 수 있는 열쇠가 없다. 신약 자체도 상당한 분량의 애매 모호성이 드러난다. 예컨대, 적그리스도는 특히 난해한 인물이다. 바울서신(살후2:3-4)에는 그 인물이 어떤 누구를 지칭하고 있고, 계시록 13-14장에서는 적그리스도가 로마의 황제로 등장한다. 두 경우 모두 적그리스도의 출현은 종말론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요한일서에서는 이 모든 것이 교회에 살며시 들어온 소위 영지주의자들을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것으로 재해석되었다.
그러므로 역사적으로 교회는 각양 각색의 세상 통치자들을 적그리스도의 표출로 간주하였다. 히틀러는 확실히 적그리스도에 적합한 인물이다. 이런 의미에서 많은 적그리스도들이 계속 출현할 것이다(요일2:18).
그러나, 종말의 궁극적인 사건들을 동반할 한 특정한 범세계적인 인물은 어떤 사람일까?
5.전체적으로, 종말론적인 것을 의도한 그림들은 여전히 그렇게 취급되어야 한다.
성경의 처음 시작의 말씀이 하나님과 창조에 관한 것이듯이, 그 결론의 말씀 역시 하나님과 창조의 완성에 관한 것이다. 이 모든 세사한 것들이 어떻게 이루어 나갈지가 모호하다는 생각이 들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그의 시간과 그의 방법으로 이루어 가실 것이라는 확신에는 전혀 모호함이 없다.
그가 오실 때가지 우리는 이미의 미래를 살며, 우리는 그의 말씀을 듣고 순종함으로써 산다. 그러나, 이와 같은 책들이 더 이상 필요가 없는 날이 올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다 나를 앎이니라'(렘31:34). 그리고 우리는 요한과 성령과 신부와 함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말한다.
출처 : Joyful 의뜰 원문보기▶ 글쓴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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