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참된 권위 확립을 위한 기초이론2.
-월간 현대종교 95년 9월호 <나채운/장신대 대학원장> |
Ⅱ. 영감(靈感)과 원본에 대한 바른 이해
영감을 의미하는 헬라어는 데오프뉴스토스(theopneustos)는 데오스(theos, 하나님)와 프네오(pneo, 숨쉰다)의 합성으로서, 딤후3:16에만 나오는 낱말(소위 hapakslegomena)로서 하나님께서 성경(원본)을 기록하는 사람에게 기록자가 인간적인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자신(하나님)의 영적인 통제력을 행사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영감으로 쓰였다고 할 때 그 표현은 기록에 보다도 기록자(성경의 원저자)에게 초점을 두는 것이다. 벧후1:21은 이 사실에 대하여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고 언급하고 있다.
성경영감설은 일찍이 유대교의 전통과 신약성경(딤후3:16과 벧후1:21 등)을 기초로 하여 형성된 성경관이지만 종교개혁 때까지는 로마 카톨릭교회의 강한 교황권 때문에 상대적으로 위축되어 있다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란 구호를 외쳤던 종교개혁자들에 의하여 그 권위를 확립하였다. 그러나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부정적인 성경비평학으로 인해 성경의 영감설 내지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의 권위가 도전을 받다가 금세기에 와서는 바르트의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Die Theologie des Wort Gottes)에 의하여 다시 그 권위를 되찾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의 권위에 관한 논쟁(영감설과 그에 따르는 성경 무오·유오설)은 그 후로도 바르트와 불트만 및 그의 제자들 사이에서 계속되는 논쟁으로 이어졌고, 미국에서는 1929년 메이첸(G. Machen)이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세움으로써 프린스턴신학교의 분열을 가져오기에 이르렀다.
그러면 이토록 신학의 논쟁점이 되어온 성경영감설은 어떠한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제 이 문제를 영감의 성질, 영감의 방법, 영감의 범위 등으로 나누어 고찰해 보자.
첫째, 성경의 영감은 그 성질에 있어서 기계적 영감(mechanical inspiration)이 아니고 유기적 영감(organic inspiration)이다. 극단적 보수주의 신학자들에 의하여 주장되는 기계적 영감설은 성경을 기록한 저자는 성령의 절대적인 지배를 받아 그들 자신이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성령이 지시하시는 대로만 기록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기록한 성경의 내용에는 저자 자신들의 개인적인 요소(그들의 지식, 경험, 사상, 개성 등)가 개입될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께서 그의 메시지를 기록하는데 사용된 기계에 불과하다고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유기적 영감설은 하나님께서 성경의 저자를 기계적으로 사용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개인적인 지식이나 경험, 사상이나 개성 등을 그대로 사용하시면서 당신의 메시지를 기록하도록 성령으로 감동하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에는 그 기록자의 개인적인 지식, 경험, 사상, 개성 등 뿐 아니라 심지어 그들이 즐겨 쓰는 용어나 문체까지도 반영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성경을 자세히 살펴볼 때, 성경의 내용이 밝혀 주는 진실은 결코 전자, 즉 기계적 영감이 아니고 유기적 영감임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유태인을 위하여 복음서를 쓴 마태는 그가 잘 알고, 또 그의 독자들이 잘 알고 있는 구약성경의 구절을 많이 인용하고 있으며, 누가복음에서는 누가가 당시에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 즉 죄인, 여자, 이방인 등에 특별한 관심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한복음에는 헬라의 이원주의 사상에 대한 요한의 관심이 반영되어 있으며 그가 애용하는 용어로 '빛', '생명', '사랑', '진리' 등이 특별히 많이 나타나 있다. 우리는 이상과 같이 성경의 실제적인 사실에서 저자의 개인적 요소가 다 나타난 것을 알 수 있으며, 또 이러한 개인적인 요소가 추호도 하나님의 영감을 제한하거나 배제하지 않은 것을 알아야 한다.
둘째, 성경의 영감은 그 방법에 있어서 축자적 영감(verbal inspiration)이 아니고 개념적 영감(conceptual inspiration)이다. 즉 성경의 영감은 저자(원본의 기록자, 로마서에서와 같이 원본의 기록자와 저자가 다를 때에는 저자)가 성경(원본)을 기록할 때 하나님께서 어휘의 선택이나 자구(字句)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지배하여 조금도 다름(相異)이나 틀림(相違)이 없도록 하셨다는 것이 축자적 영감설인데 대해 개념적 영감설은 저자가 성경을 기록할 때 하나님께서 하신 영감은 그러한 글자 한 자 한 자에 이르기까지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타내고자 하시는 내용을 개념(의미)상으로만 바로 기록하도록 영감하시고, 어휘의 선택이나 표현의 기술 방법 등은 저자에게 맡기셨다는 것이다.
우리가 얼른 생각하면 하나님의 영감이 전자와 같은 것이라면 아무런 논란의 여지가 없고 문제도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성경의 실제는 전자와 같지 않음을 증명해 주는 것을 우리는 부인할 수가 없다. 이러한 사실을 몇 가지 실례를 들어 논증해 본다. 우리는 이러한 실례를 성경 가운데, 그 사본이 아니라 원본에서 동일한 사건이나 사실이 문자적으로 동일하게 기록되지 아니하고 각기 다르게 기록된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논증을 두 가지만 들어보자.
먼저 예수께서 부활하신 사건을 기술하는데 있어서 4복음서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그 세밀한 부분에까지 언급하면 문자적으로 다른 것이 열 곳도 넘지만 그 중 세 가지 사실만 들어본다.
1. 무덤에 찾아간 사람에 대하여 네 복음서는 다음과 같이 달리 기록하고 있다.
마태 :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
마가 :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
누가 : "이 여자들…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와 또 저희와 함 께 한 다른 여자들"
요한 : "막달라 마리아"
2. 그들이 무덤에 간 시각에 대하여는
마태 :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에"
마가 :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은 때에"
누가 :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요한 :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
3. 무덤에 나타난 실체에 대하여
마태 : "주의 천사"
마가 : "흰옷을 입은 한 청년"
누가 :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
요한 : 언급이 없음
위의 예에서 보면, 예 1에서 무덤에 찾아간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만이 네 복음서에 공통으로 기록되었을 뿐 그 이외는 다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예 2의 무덤에 간 시각에 대해서는 안식 후 첫날 새벽이라는 점에서는 네 복음서가 공통되나 그 이상의 세밀한 서술에서는 네 복음서가 다 다르다. 예 3의 무덤에 나타난 실체에 대해서는 기록된 네 복음서가 다 다르다.
다음 가이사랴 빌립보 도상에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한 신앙고백의 내용에 대해서도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각각 다음과 같이 달리 기록하고 있다.
마태 : "주는(당신은)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가 : "주는(당신은) 그리스도시니이다"
누가 :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위의 예에서 보면 베드로의 고백에서 그리스도라고 한 점은 세 복음서에 공통되나 그 이외는 고백의 내용으로나마(마태에서는 "하나님의 아들"로도 고백), 그 표현에 있어서나(마가에서는 "하나님의 그리스도")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두 가지의 역사적인 사건을 기술함에 있어서 복음서는 분명히 세 복음서간에, 또 네 복음서간에 문자적으로는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 즉 성경이 독자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있어서는 전적으로 공통되고(동일하고) 상치되거나 결여된 것이 없다. 즉, 주님 부활하신 날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몇 사람이 무덤을 찾아갔다는 사실과 가이사랴 빌립보 도상에서 베드로가 주님께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사실은 조금도 틀림이 없이 기록하고 있다.
부활의 사건이 네 번이나 일어난 사건이 아니고 한 번 일어난 사건이요,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가이사랴 빌립보 도상에서는 한 번만 있었던 사건으로 믿을진대, 그리고 그 이야기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것을 믿을진대, 그 영감이란 축자적 영감이 아니고 개념적 영감이라는 것이 너무도 분명한 사실이다. 이러한 경우에 성경 저자에 대한 하나님의 영감을 믿으면서 축자적(문자적) 영감을 고집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감의 능력을 제한하는 중대한 문제에 부닥치게 된다.
그리고 동일한 사건에 대한 복음서간의 기록이 세밀한 부분에서는 문자적으로 같지 않다고 해서 그것이 성경의 오류가 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전술한 바와 같이 성경의 영감은 저자에 대한 기계적인 영감이 아니라 유기적인 영감이어서 저자 자신의 지식, 경험, 사상, 개성 등이 그대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네 복음서 저자는 모두가 영감을 받아서 기록했으며 각기 그들이 가진 지식과 경험의 한도 내에서 다시 말하면 그들의 들은 대로, 본대로, 아는 대로만 정직하게 기록한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성경의 메시지 내용을 저자로 하여금 기록하게 하는 데 있어서 낱말의 문자 하나 하나에 이르기까지 영감을 주어 기록하고자 하셨다면, 저자가 기계적으로 영감을 받게 하셨을 것이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시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을 기록하는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의 소식과,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행위에 관한 가르침을 주는데 있는 것이지 결코 어떠한 역사적인 보도를 정확하게 하는데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만일 성경의 영감을 그 성질에 있어서 기계적 영감이라고 한다면 축자적 영감이 그 당연한 결과가 될 것이나, 유기적 영감으로 이해한다면 축자적 영감은 논리상 성립될 수가 없으며, 그것이 유기적 영감이요, 개념적 영감인 것은 기록된 성경의 실상이 충분히 증명해 주고도 남음이 있다. 이러한 이해가 아니고서야 광야에서 죽임을 당한 이스라엘 사람의 소를 고린도전서 10장 8절에서는 23,000명이라 하고, 민수기 25장 9절에서는 24,000명이라 한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셋째, 성경의 영감은 그 범위에 있어서는 부분적 영감이 아니고 전체적 영감이다. 18세기 합리주의 사상의 영향 아래에서 어떤 성경학자들은 성경의 범위를 내용에 따라 구별하여, 영감은 교리적 내용에만 한정되고 역사적 내용에는 영감이 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성경 안에 있는 역사의 기술에 있어서는 다소간 오류가 있기도 하므로 그러한 구별을 하였으나, 역사적인 오류가 결코 성경의 영감의 사실을 배제할 수 없으므로 합당한 이론이 될 수가 없다.
성경의 저자에 대한 영감은 그 내용이 역사이거나 교리적인 것이거나, 문화적인 장르에 있어서도 산문이거나 시이거나 예언이거나 묵시이거나, 말의 주체가 하나님이거나 사람이거나 심지어 마귀이거나 간에 성경 내용의 전 범위에 미치는 것이다(여기 마귀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마귀가 말을 하는데 영감을 주셨다는 뜻이 아니라, 마귀의 말을 바로 그대로 기록하도록 성경의 저자에게 영감을 주셨다고 하는 뜻이다).
어떤 학자는 성경의 영감을 신약에만 국한시키나 그것도 성경의 내용(딤후3:16)과 상치된다. 그러므로 성경의 영감은 창세기 1장 1절부터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 마지막 절까지 되어진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성경의 영감은 정경에 한정되는 것이므로, 개신교의 입장에서는 로마 카톨릭교회와는 달리 외경(카톨릭 측으로는 정경)의 영감은 인정할 수가 없다.
넷째, 성경의 영감이란, 엄밀히 말하면 원본의 저자에 대한 것이다. 성경의 내용이 영감 되었다는 것은 그것이 영감을 받은 저자에 의해서 기록된 당연한 결과일 뿐이다. 어떤 사람은 영감이 사본의 필사자(筆寫者)에게도 주어졌다고 주장하나 이것은 옳은 견해가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본은 파피루스, 양피지 사본을 합쳐서 대문자 사본, 소문자 사본, 성서일과표 등 모두 5,500개도 넘는데 그 중의 단 둘도 완전히 동일한 것이 없으며, 바로 이 사실이 사본의 필사자에게는 하나님의 영감이 없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본 필사자에게, 원본의 저자에게와 같이 영감을 주셨다면 모든 사본이 어떻게 이처럼 다를 수가 있을까? 만일 하나님께서 사본의 팔사자에게 영감을 하셨는 데도 불구하고 사본간에 서로 다르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는 중대한 문제에 부닥치게 된다.
대다수의 성경학자들은 그들이 성경의 영감에 대하여 언급할 때, 사본이나 역본의 영감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을 하지 않는데, 이는 사본이나 역본의 필사자나 역자에게 영감이 없었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상식적인 이야기여서 도무지 언급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학자는 독자들이 만일에라도 오해를 할까 하여 사본의 필사자나 역자에게 영감이 없었다는 것을 분명히 지적하기도 하는데 그 사례를 셋만 들어본다.
미국의 유명한 보수주의 신학자인 루이 벌코프(L.Berkhof)는 그의 책「성경해석학(Principles of Biblical Interpretation)」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경이 모든 세부분에까지 완전무오하게 영감 되었다고 하는 주장은 다만 원본만을 언급하는 것이며, 지금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사본들이나 현대판 성경이나 번역본들을 같은 의미에서 언급한 것은 아니다"(위 번역서 44면)
피녹크(C. H. Pinnock)는 그의 책 「성경의 무오성에 대한 변증(A Defense of Biblical Infaiivility)」에서 "영감은 성령에 의해 영감된 사람들이 구술했거나 기록한 말씀에 관한 것이지 사본의 필사에 관한 것이 아니다"(15면).
「기독교대백과사전」(기독교문사 간행)은 영감에 대하여 "영감은 성서의 진리주장을 확실히 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본이 아닌 원본(친필)과 관련시켜야 한다. 왜냐하면 필사자들의 잘못이 있다는 것을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위의 책 641면).
우리는 영감이 성경의 원본의 저자에게만 해당된다는 데 대해서 더 이상의 증명이 필요치 않다. 그것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사본 필사자에게도 영감이 있었다고 억지 이론을 고집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가공할 도전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하나님의 말씀 앞에 모름지기 겸손하고 정직하지 않으면 안된다.
출처 : Joyful 의뜰 원문보기▶ 글쓴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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