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성경의 참된 권위 확립을 위한 기초이론3

문성식 2010. 8. 30.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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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현대종교 95년 9월호 <나채운/장신대 대학원장>

 

Ⅲ. 사본에 대한 바른 이해

맨 처음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이나 헬라어로 기록된 신약성경의 원본은 참으로 유감스런 일이지만 오늘날 한 조각도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한편 그 없어진 원본을 보고 베껴 쓴 사본은 수천 개나 남아 있어 없어진 원본의 내용을 알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른다.
사본의 필사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길이 보존하고자 하는 열정과 또 그 말씀을 널리 보급하고자 하는 사명감으로 그들의 심혈을 기울여서 원본을 베껴 썼다. 경건한 필사자들은 원문을 베껴 써내려 가다가 하나님의 이름 네 문자(Tetragrammaton)YHWH가 나오면 그때마다 손을 깨끗이 씻고 쓰기까지 그들의 정성을 다하였다. 그러나 이토록 정성을 다하여 필사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인간이 하는 일에는 한계가 있는 지라, 사본이 수백 년 동안 필사를 거듭해 오는 과정에서 거기에는 얼마간의 착오가 생기게 되었다. 이제 그러한 착오의 구체적인 사례를 몇 가지 들어본다.

첫째, 필사자의 비고의적인 착오로 본문이 잘못 베껴진 것인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가 있다.

1. 필사자가 잘못 보아서 생긴 착오로서 1) 서로 비슷한 헬라어 글자(모양이나 붙여쓰기, 띄어쓰기를 잘못함으로)를 잘못 구별하여 착오를 일으킨 경우(예 : 딤전3:16, 벧후2:13, 롬6:5 등)가 있는가 하면, 2) 필사하는 대본의 두 행이 같은 낱말이나 음절로 끝났을 때 필사자가 그 두 번째 행을 빠뜨리고 베낌으로 착오를 일으키는 경우(예 : 눅10:32, 고전9:2 등) 등이 있다.

2. 필사자가 잘못 들음으로 생긴 착오로서 이것은 받아쓰기를 하는 경우에 생길 수 있는 사례이다. 예컨대 롬5:1의 echomen(가지자)과 echomen(가진다), 마11:16의 heterois(다른 것들)와 hetairois(동료, 친구) 등이다.

3. 잘못된 기억 때문에 생긴 착오로서, 동의어가 혼동되어서 쓰이거나(apo와 ek), 낱말들이나 한 낱말 안의 글자의 자리가 바뀌어 필사되는 경우(예 : 막1:5, 14:65 등)이다.

4. 필사자가 자신의 간단한 주해를 본문 사이에 끼워 둔 것을 그 다음 필사자가 그것을 본문으로 잘못 판단해서 본문으로 베껴 씀으로써 생긴 착오로서 요5:3-4, 고후8:4 등의 경우이다.

둘째, 필사자들이 그 전 필사본의 어떤 부분이 문맥으로나 내용상으로 잘못된 것으로 알고, 그것을 바로잡으려는 의도로 첨가하는 경우이다. 예컨대 눅11:2-4에 있는 주기도문의 짧은 본문 필사자는 그것보다 더 친숙하고 긴 형태인 마6:9-13의 본문으로 보충하여 마태복음에 있는 주기도문과 같이 만들었으며, 눅5:32의 필사자는 마9:13의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에 한 마디가 빠져 있다고 생각하여 "회개시키려"란 말을 첨가한 것이다(이 점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의 메츠거의「신약의 원문, 그 전수와 오류 그리고 회복(The Text of the New Testament, Its Transmission, Corruption and Restoration))」을 보라).
어쨌든 성경의 사본은 이상과 같은 원인 등으로 그 필사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로 달라진 것이 사실이다. 마6:9-13에 이어지는 주기도문의 송영 부분은 비록 본문이 아니고 난하주(본문비평장치)에 수록되기는 하였으나 사본의 종류가 7가지로 달리 되어 있어 사본의 다양성을 잘 나타내주고 있는데, 이제 그 실상을 보이면 다음과 같다.

1) ".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당신의 것입니다. 아멘"
2) ",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당신의 것입니다. 아멘"
3) "권능과 영원무궁토록 당신의 것입니다"
4)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당신의 것입니다"
5) "나라와 영광이 영원히 당신의 것입니다. 아멘"
6)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나라가 영원히 당신의 것입니다. 아멘"
7) "아멘"

위의 7가지 다른 사본에서 마지막 것을 제외하고는 나라와 권능과 영광 세 가지 중에서 혹은 셋, 혹은 둘, 혹은 하나를 언급하는 차이는 있어도 그 내용에서 보면 송영(doxology)이라는 근본적인 의미상으로는 차이가 없다. 더욱이 첫째와 둘째 사본간에는 송영 바로 앞 문장의 마지막 낱말 포네루ponerou(악) 다음에 종지부(.)가 찍히느냐, 휴지부(,)가 찍히느냐의 차이 뿐이다.
그리고 이 7가지 다른 사본 중에서 학자들은 본문비평장치에서 첫째 것을 가장 권위 있는 것으로 수록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 본문이 시내산 사본, 바티칸 사본 등 가장 권위 있는 사본의 본문이며 또 터툴리아누스, 오리게네스 등 유력한 교부들이 그 본문을 인용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본문을 후대의 첨가라 해서 받아들이지 않는 로마 카톨릭교회를 제외하고는 절대 다수의 개신교의 주기도문은 첫째 것을 채택하고 있다.


마21:28-32에 있는 두 아들의 비유에서 보면, 위의 경우와는 달리 내용상 정반대의 두 가지 사본이 있다(문구상으로는 6가지). 즉 아버지가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하는 말에 대해서 한 사본의 본문은 맏아들이 가겠다고 했다가 안 가고, 둘째 아들이 안 가겠다고 했다가 간 것으로 되어 있는데 대해(우리말 성경 개역본과 새번역의 본문), 다른 사본은 맏아들이 안 가겠다고 했다가 가고, 둘째 아들이 가겠다고 했다가 안 간 것으로(우리말 성경 공동번역, 표준새번역, 한국천주교200주년 기념 신약성서 등의 본문) 되어 있다.


이상의 두 가지 다른 사본 중에서 여러 나라의 성경 번역에서는 어느 것을 택하였는가? 여기에는 한 가지 경향이 있다. 즉 옛 번역에서는 첫째 사본의 본문을 선택한 편이었으나(KJV, 중국의 문리역 등 예외도 있다) 최근의 번역에서는 둘째 사본의 본문을 택한 것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이다(RSV, GNB, NIV, LB, JB, NRSV, 일어 공동역, 신공동역, 중국의 현대중문역(現代中文譯), 금일성경(今日聖經), 당대성경(當代聖經), 독일의 현대역, 불어 현대역 등. 한편 KJV, 중국어성경文理역 등 오래 전의 번역도 예외적으로는 여기에 속한다). 따라서 우리말 성경도 개역과 새번역(1967년)에서는 전자를 따랐는데, 공동번역(1971년)과 표준새번역(1993년)에서는 최근의 본문비평의 결과를 따라 후자를 따르기로 하였다.

이상과 같이 여러 가지로 다른 본문의 사본을 세밀히 비교, 대조하여 없어진 원본의 본문을 재구성해 보고자 하는 노력이 본문비평인 바, 이 작업은 실로 어려운 작업이 아닐 수 없다. 그리하여 성경 연구가들은 원본의 본문을 재구성하는데 있어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원칙을 세웠다.

1) 어려운 본문과 쉬운 본문이 있을 때에는 더 어려운 본문을 원본에 가까운 것으로 본다.

2) 긴 본문과 짧은 본문이 있을 때에는 더 짧은 본문을 원본에 가까운 것으로 본다.

3) 조화가 잘된 본문 형태보다는 얼마간 불일치한 본문 형태를 더 원본에 가까운 것으로 본다.

4) 어떤 본문이 같은 문헌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된 저자의 일반적 용어나 문화적 양식에 맞지 않을 때, 또는 어떤 한 부분이 전체 문맥에 전혀 어울리지 않게 들어가 있을 때, 그러한 사본의 본문은 잘못된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본다는 것 등이다.

그런데 본문을 비평하고 사본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두어 가지 곡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첫째, 사본에 있어서의 영감의 문제는 사본 필사자에 대한 영감의 문제라는 점이다. 즉 사본 필사자에게 영감이 없었다고 하는 것(전술)과 사본의 내용의 영감 여부는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둘째, 사본의 내용이 영감된 것이냐 하는 문제는 그 대답이 너무나 쉽고 간단하다. 즉 사본이 원본을 정확하게 필사하여 보존하고 있는 범위 안에서는 그 내용에 있어 영감된 것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왜냐하면 성경의 원본이 영감된 것이기 때문이다.
패튼(Patton)박사는 그의 「성경의 영감」이란 책에서 "정확무오한 원본은 전사생들의 노고에 의하여 영구히 보존되었다고 본다. 상위(틀림)가 생겼다면 사생들의 잘못된 실수로 말미암아 일어난 중요치 않은 세부에 그치는 것뿐이다"라고 하였다(L. Berkhof, 「성경해석의 원리(Principles of Biblical Interpretation)」, 김진홍 역, 46면). 이것을 뒤집어 말하면 원본의 중요치 않은 세부에 있어서는 필사자들의 실수로 잘못 기록되어 원본과 다른 것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본의 필사자에게는 영감이 없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만일 성경의 원본이 기록될 그 때에 오늘날과 같이 복사기가 있어서 그것으로 복사를 하였다고 가정을 한다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영감이 작용할 여지조차 없으며, 영감이 없이도 원본과 100퍼센트 틀림없는 사본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며, 오늘날 우리가 하는 본문비평연구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 사본 필사자들의 사소한 실수로 인해서 본문비평이라는 성가신 일을 하기는 하지만, 한편 그들 사본 필사자들이(영감이 없이도) 그들의 신앙적인 정열과 성의 있는 노력으로 영감된 원본의 대부분이 잘 필사되고 전승되어진 데 대해서는 참으로 다행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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