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61] 서울대교구장직 이임
30년 사랑과 함께 환송해 주는 신자들 보고 가슴 울컥
<사진설명>
"추기경님 사랑합니다." 김수환 추기경이 30년만에 서울대교구장 이임 감사미사를 마치고 명동성당을 나오자 성당 마당을 가득 메운 신자들이 김 추기경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있다.
"공경하올 교황님, 곧 21세기가 시작됩니다. '새 술을 새 부대에' 담으려면 서울대교구에 새로운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개인적으로도 나이 탓인지 요즘 자주 피로를 느낍니다."
교황님께 제출한 교구장직 사임 신청서의 일부다. 서울대교구가 발전하려면 새로운 리더십을 가진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사임수락을 간청했다.
난 1998년 76세 나이로 교구장직에서 물러났다. 그런데 이 편지는 만 70세가 되던 해인 1992년에 써서 교황님께 보낸 것이다. 교구장 정년은 교회법상 만 75세지만 이미 5년 전에 사임의사를 표명했다.
당시 교황님이 내 사임신청을 수락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에 또 사임서를 내면 그때는 들어주실 수밖에 없도록 미리 손을(?) 써놓는 차원에서 제출한 것이다. 얼마 후 교황님께서 장문의 친서를 보내주셨다.
"무슨 뜻인지 알겠으나 교구를 위해 좀 더 봉사해주십시오. 정 힘들면 3개월이건, 6개월이건 장기휴가를 다녀오십시오. 휴식은 꼭 필요합니다. 나를 보십시오. 김 추기경보다 두 살이 많은 나도 이렇게 일하고 있지 않습니까…."
교황님이 '나이'를 따지면서 권고하시는데 무슨 군말을 덧붙이겠는가. 한동안 쥐죽은 듯 조용히 지내다 75세가 된 97년에 다시 사임서를 냈다. 그런데 연말은 고사하고 해가 바뀌어도 감감 무소식이었다.
드디어 3월 말쯤 교황청에서 편지가 도착했다. 그런데 사임수락 소식이 아니라 4월 중순부터 로마에서 열리는 아시아주교특별시노드에 참석하라는 통보였다.
시노드사무국에 전화를 걸어 "내일 모레면 은퇴할 텐데 몇년씩 걸리는 시노드에 어떻게 참석하느냐"고 말했다. 이튿날인가 사무국 관계자한테서 답신이 왔다.
"인류복음화성 장관 톰코 추기경님과 상의했는데 그래도 괜찮으니 참석하라고 하십니다. 시노드 의장인 교황님을 보필하는 공동 의장대리직을 맡아야 한다고 합니다."
별 수 없이 로마에 가서 한달 내내 주교 시노드를 진행했다. 그곳에서 기회 있을 때마다 톰코 추기경에게 "이번에 사임수락이 떨어지도록 힘을 써줘야 한다"고 인사청탁(?)을 했다.
그런데 나중에 공문을 보니까 이미 사임수락이 내려진 상태였다. 군대에서도 말년 병장은 열외(列外)시켜준다고 하는데 바티칸은 마지막 순간까지 나를 부려먹은 셈이다. 그것도 모르고 아쉬운 소리를 하고 다녔으니….
5월 29일 명동대성당 축성 100주년 경축미사가 명동성당에서 봉헌됐다. 마침 5월 29일은 내가 30년 전 서울대교구장에 착좌한 날이다. 내 사임소식은 이튿날 오전에 공식 발표되었기 때문에 미사 참례자 대부분이 몰랐을 것이다. 내 딴에는 은퇴미사라는 생각으로 미사를 집전했다.
"명동대성당은 우리 겨레와 기쁨과 고난을 함께 했습니다. 지금까지 이 사회를 밝히는 빛과 등대로 존재해 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서 있어야 합니다. 명동대성당이 그리스도의 빛을 더 환하게 밝히려면 우리가 더욱 더 열심히 그리스도를 믿고 따라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경축미사 강론)
한달쯤 뒤에 서울대교구 평협이 감사미사를 봉헌하는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정말 그날 미사에서는 "감사하다"는 것 외에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부족한 사람을 불러 써주신 하느님께 감사했고, 순간순간 도움과 위로의 손길을 내밀어주신 성모님께 감사했고, 기도와 봉사를 아끼지 않은 교구민에게 감사했다.
특히 사제들에게 "이 어리석은 사람이 혹시 마음의 상처를 준 일이 있거든 너그럽게 용서해 달라"고 청했다. 만일 한 국가의 대통령이 30년 동안 장기집권을 했다면 쫓겨나도 너댓번은 쫓겨났을 것이다. 자타가 인정하듯 부족한 점이 많았고, 나 때문에 상처를 입은 사람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날 신자들에게 영적예물도 많이 받았다. 과분한 선물이었다.
"고맙습니다. 내가 하늘나라에 갔을 때 베드로 사도가 나를 연옥으로 보내려고 하면 이 영적예물을 보여주겠습니다. 신자들이 나를 위해 이토록 기도를 많이 해줬는데 천당에 보내주면 안되겠냐고 떼를 써 보겠습니다. 이제 새로 오신 정진석 교구장님과 일치해서 더 복음적 교회를 만들어 나가십시오."
신자들은 30년 동안 참으로 분에 넘치도록 나를 사랑해 주었다. 감사미사를 마치고 나오니까 성당 마당에 신자들이 가득했다. "추기경님, 사랑해요.", "영원한 젊은 오빠, 사랑해요" 등의 글귀를 적은 피켓을 들고 환송해 주는 신자들을 보는 순간 가슴이 울컥했다.
내 스스로 교구장직 30년을 점수 매긴다면 얼마나 줄 수 있을까? 글쎄다. 이것 저것 따져 평균을 내면 약 60점 정도? 더 이상 후하게 매길 자신이 없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머문 자리에서 떠날 때 "시원섭섭하다"는 말로 소감을 대신한다. 그런데 난 솔직히 시원하기는 한데 섭섭한 감정은 없다. 30년 동안 짊어지고 온 무거운 짐을 내려놓았다는 홀가분한 기분 때문인 것 같다. 굳이 그때 내 기분을 한마디 말로 표현하면 "브라보 만세!"다.
아쉬운 점은 있다.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길 만큼 믿음이 굳건하지 않았고, 하느님께서 나에게 맡겨준 양떼를 죽도록 사랑하지 못했다. 하느님께 은총을 구하는 기도도 부족했다. 그러나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려 30년전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더 잘 할 자신이 없다.
아쉬운 게 한가지 더 있다. 명동대성당 종탑 십자가에 달이 걸려있는 야경을 못보게 된 것이다. 십자가에 달이 걸려있는 야경은 정말 일품이다. 나는 그 야경을 무척 좋아한다. 달밝은 밤에 외출했다 돌아올 때면 그 달빛 야경을 더 감상하기 위해 언덕을 오르락내리락하곤 했다.
명동성당에 대한 30년 정(情)이 금방 잊혀지겠는가. 요즘도 어디를 다녀오다 을지로 신세계 백화점과 롯데 백화점 사이를 지나갈 때면 고개를 빼고 명동 입구쪽을 쳐다본다. 그곳에서 명동성당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고개가 돌아간다.
아무튼 홀가분한 기분이 나를 들뜨게 했다. 자유를 만끽하고 싶어 몇가지 계획도 세워보았다.
'운전면허증을 따서 삼천리 방방곡곡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리라. 이젠 김추기경이 아니라 김삿갓이 되는 거다. 외국에도 나가리라. 사목방문이나 회의참석 때문이 아니라 여행을 위해서…'
[평화신문, 제785호(2004년 8월 15일), 정리=김원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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