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추기경

명동성당 경찰병력 투입과 노동운동

문성식 2011. 2. 11. 23:53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60] 명동성당 경찰병력 투입과 노동운동
 
예상 못한 '기습'에 한 뼘 성역마저 사라져
 
 
<사진설명>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김영삼 정부의 공권력 투입에 항의하는 사제단. 타종교 성직자들도 가세해 침묵시위를 벌이고 있다.
 
 
1995년 6월 6일 현충일 아침.
 
교구청 신부들과 둘러앉아 식사하고 있는데 갑자기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공휴일 아침이라서 별 일이 없을 텐데 무슨 소란인가 싶었다.
 
"추기경님, 명동성당에 경찰병력이 투입됐습니다. 한국통신 노조간부들이 모두 잡혀갔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기습'이었다. 그 보고를 듣고 입맛을 잃어 수저를 내려놓았다. 이루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심정이 착잡했다.
 
'아~ 그나마 있는 한 뼘 성역(聖域)마저 사라졌구나. 김영삼 정부가 큰 실수를 했어. 큰 실수를…."
 
한국통신 노조간부들은 명동성당과 조계사에서 보름 넘게 농성하고 있었다. 노조간부들은 성명을 통해 자신들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정부측과 한국통신 사장은 "단순 노사문제가 아니라 사상이 불온한 이들의 불법행위"라며 노조간부들을 비난했다. 명동성당 장덕필 주임신부는 공기업 민영화를 둘러싼 양측 주장을 들어주느라 진땀을 뺐다.
 
글쎄다. 나와 성당 입장에서 보면 누구 말이 맞는가 하는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그건 사법부에서 판단할 문제다. 정작 중요한 것은 억압받는 이들이 성당에 찾아와 억울함을 호소하는 이상 교회는 이들을 보호해야할 도덕적 의무가 있다는 점이다.
 
장덕필 신부는 노사 양측과 정부 당국자 사이를 바쁘게 오가면서 원만한 사태해결을 위해 무척 노력했다.
 
처음에는 "농성을 풀고 법적으로 떳떳하게 대응하라"고 노조를 설득하기도 했다. 경찰에서 영장집행에 대한 협조를 수차례 요청했지만 우리는 협조할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통신은 국가 중추신경이기 때문에 노조 농성은 국가전복 음모로 봐야 한다는 고위 당국자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리고 대화가 어느 정도 무르익어 곧 해결 실마리가 보일 것 같았다.
 
하지만 일부 언론이 그런 중재노력은 쏙 빼고 교회가 불온한 범법자를 무조건 감싼다는 식으로 보도하면서 경찰병력 투입을 부추겼다. "종교도 사회제도의 한 부분인데 명동성당에 경찰병력 투입을 망설이는 이유가 뭐냐", "성직자는 세속법을 초월해 범법자를 보호할 수 없다"는 주장이 나왔다. 명동성당 성역논쟁은 이로 인해 불거졌다.
 
이에 대한 내 입장은 분명하다.
 
교회는 명동성당을 치외법권지역이라고 주장해 본 적도 없고, 그렇게 생각해 본 적도 없다. 하지만 그동안 힘없는 사람들, 억압받는 사람들이 성당에 찾아와 자신들의 주장을 쏟아냈다. 70, 80년대 민주화운동 시절에는 더욱더 그랬다. 그들이 사회나 실정법에 호소하지 않고 성당에 기댄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당시만 해도 명동성당에 들어온 이들은 주로 벼랑끝에 몰려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명동성당만큼은 자신들의 피난처가 되어주길 바랐다.
 
명동성당 성역 개념은 그같은 사회적 공감대와 가난한 이들 편에 서야 하는 교회 본연의 자세가 합쳐져 형성된 것이다. 삼한시대에도 도망자가 피신할 수 있는 소도(蘇塗)라는 게 있었다. 그리고 어느 사회건 공권력과 국민 사이에 완충지대 하나쯤은 필요한 것 아닌가.
 
명동성당도 온갖 불편과 비난을 무릅쓰고 성역보호에 최선을 다했다. 나 역시 하소연할 곳이 없어 찾아온 이들에게 한 뼘 공간이라고 내줘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살아왔다.
 
서슬퍼런 역대 군사정권도 명동성당의 이런 상징성을 존중해 주었다. 유신정권과 제5공화국 정권도 명동성당에 경찰병력을 투입한 적이 없다.
 
난 특히 김영삼 정부의 도덕성에 실망했다. 가톨릭의 도덕적 힘을 무너뜨리려고 작정하지 않은 이상 어떻게 그런 비이성적 조치를 취할 수 있단 말인가. 김영삼 문민정부는 명동성당이 무대가 된 6·10 민주항쟁의 정당성이 결집돼 탄생한 정부다.
 
"문민정부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몰랐습니다. 정부 실세들도 한때 여기서 최루탄에 눈물을 흘려가면서 농성을 했습니다. 명동성당 유린은 정권 탄생의 모태(母胎)를 짓밟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아울러 사회적 약자의 피난처가 사라진 데 대한 슬픔을 가눌 길이 없습니다. 정부는 중재가 이뤄지고 있는 노사문제에 힘으로 개입해 사태를 악화시켰습니다."(6월 11일 미사강론)
 
정부는 국무총리가 사과성명을 발표하는 선에서 사태를 수습하려고 했다. 그러나 사제와 신자들의 분노가 이만저만 거센 게 아니었다. 사제들이 단식농성에 돌입하고 전국 성당에서 시국기도회와 촛불시위가 열리는 등 과거 민주화운동 열기를 방불케 했다.
 
교구는 정부 사과를 일단 받아들이기로 했다. 사태를 더 끌어봐야 교회와 정부 양측에 득이 될 게 없었다. 하지만 젊은 신부들은 단식농성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설득하고, 때로는 야단도 쳐가면서 농성을 멈추게 했다.
 
난 예나 지금이나 아무리 명분이 좋다고 하더라도 사목자가 사목현장을 오랫동안 비워두고 무슨 일에 몰두하는 것은 찬성하지 않는다. 사목자의 본분은 자신에게 맡겨진 양떼를 돌보는 것이다. 그 본분에 소홀하면서까지 정신을 빼앗길 만한 일은 사목자에게 없다. 과거 전주교구 신부들이 유신정권에 대한 항의 표시로 무기한 단식농성에 돌입했을 때도 이같은 논리로 농성을 중단시켰다.
 
사태는 그렇게 일단락됐지만 성전을 침탈당한 데 대한 마음의 상처까지 없어진 것은 아니다. 6·6 명동성당 경찰병력 투입은 김영삼 정부의 큰 실책이라고 생각한다.
 
노조 얘기가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난 요즘 매우 걱정스런 마음으로 노조파업을 지켜보고 있다.
 
고임금을 받는 큰 사업장 노동자들이 주도하는 최근의 파업행렬은 과거 생존권을 요구하던 파업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국제정세와 경제현실을 보건대 지금은 노사가 한마음이 되어 열심히 일해도 힘들 때다. 이건 한국인 특유의 '너죽고 나죽자'는 그릇된 자세다.
 
중국인은 '너살고 나살자', 일본인은 '너죽고 나살자'고 한다는데 왜 우리는 어리석게 다 함께 죽는 길을 걷고 있는지 답답하다. 우리나라가 국민소득 1만불 정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최근 일본에 거주하는 교민한테서 받은 편지를 잠깐 소개한다.
 
"일본에서 오랫동안 살았지만 일본인 회사 취직은 처음입니다. 이곳에서 일본 젊은이들이 1층에서 5층까지 뛰어다니면서 부지런히 일하는 모습을 보고 감동받았습니다. 일본인은 국민소득이 우리나라 3배를 넘는데도 이토록 열심히 일합니다…." 
 
[평화신문, 제784호(2004년 8월 1일), 정리=김원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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