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추기경

은퇴 후의 생활

문성식 2011. 2. 11. 23:55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62] 은퇴 후의 생활
 
물러나자마자 석달 동안 미국, 캐나다 여행
 
 
<사진설명>
김수환 추기경이 서울 혜화동 집무실을 찾아온 제주교구 한림본당 복사단 어린이들과 뜰을 거닐면서 웃음꽃을 피우고 있다. (2002.11.16)
 
 
한평생 어떤 그리움을 가슴에 담아두고 살았다.
 
방랑시인 김삿갓처럼 바람따라 구름따라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고 싶은 욕망이다. 바람같은 자유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한시도 떠나지 않은 것을 보면 내게 '방랑끼'가 있는 것 같다.
 
내가 어디를 가게 되면 운전기사와 비서신부가 항상 제 시각에 데려다준다. 혼자 비행기를 타더라도 도착지 공항에 어김없이 마중객이 나와 있다. 사람들 시선과 관심이 때론 불편할 때가 있다.
 
교구장 재직 시절에는 해방감을 맛보기 위해 가끔 혼자 외출을 하곤 했다. 남방 차림으로 전철을 타고 수원에 있는 피정의 집에 가보고, 전철과 버스를 갈아타고 경기도 일산에 있는 어느 수녀원에도 가봤다. 부천 근처에 있는 성바오로 피정의 집에 가려면 역곡 전철역에서 내려 마을버스를 갈아 타야 하는데 한두번 해보니까 제법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전철에서 사람들이 인사하면 나도 인사하고, 자꾸 쳐다보면 고개를 돌리고, "혹시 추기경님 아니세요?"라고 반색하는 사람이 있으면 "나도 그런 말을 자주 듣습니다"라며 시치미를 떼는 척하고….
 
교구장직에서 물러난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해외여행이다. 3개월 동안 마음 편히 미국과 캐나다를 쏘다녔는데 로키산맥 근처와 밴쿠버에 가본 게 참 좋았다. 내가 서울에 있으면 새 교구장님께 행여나 불편을 끼칠까봐 겸사겸사 떠난 장기여행이었다.
 
지금도 여행을 떠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다. 그러나 중이염 치료 때문에 일주일에 한 두번 이비인후과에 가야하는 데다 무릎 관절도 시원찮아 멀리 나갈 수도 없다. 한동안 재미를 붙였던 북한산 등반도 중단한 지가 꽤 된다. 요즘 특별히 아픈 곳은 없지만 병원에 가면 '퇴행성(退行性)'이라는 진단을 주로 받는다. 나이 들어 신체 기능이 떨어지는 것을 어찌 막을 수 있겠는가.
 
운전면허증을 취득하겠다는 계획은 퇴임 전부터 공약(公約)처럼 얘기하고 다녔다.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언제든지 차를 몰고 떠날 수 있다는 건 상상만 해도 신나는 일이다. 때마침 미국에서 75세 노인이 운전면허증을 땄다는 소식이 내게 용기를 주었다.
 
실제로 기사한테 '출발' '정지' 요령을 배운 뒤 주교관 숙소 앞에서 신학교 마당까지 차를 몇 번 몰아보았다. 기사가 "운전에 소질이 있다"면서 점수도 후하게 줬다. 운전학원에 등록해 정식으로 배울까 생각하던 차에 비서신부가 운전면허 시험문제집을 갖고 오더니 풀어보라고 했다. 결과는 낙제점수였다. 공부를 안하고 시험을 봤으니 오죽했겠는가.
 
솔직히 이 나이에 운전학원에 나가 필기시험과 실기시험 준비한다는 게 쉬운 일이겠는가. 사법고시에 붙은 사람도 몇번씩 떨어지는 어려운(?) 시험이라고 하는데.
 
면허증을 취득한다고 해도 운전을 하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다. 난 현기증을 자주 느끼는 편이다. 운전 중에 현기증이 나서 사고를 내면 누굴 다치게 할 수도 있다. "면허증을 꼭 따라"는 격려성 전자우편을 많이 받았는데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면허증 취득 약속은 공약(空約)이 되어 버렸다.
 
사실 은퇴 직후에는 바쁘기도 바빴다. 교구장직에서 물러나면 시간이 꽤 많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현직에서 물러났으니 이제 가진 것이라곤 시간밖에 없다고 생각했는지 여기저기서 주례와 강연요청이 쇄도했다. 대부분 거절하기도 힘든 부탁이었다.
 
특히 예나 지금이나 젊은이들이 부르는 곳은 다른 요청에 우선해 가려고 노력한다. 이 늙은이가 미래사회의 주역들에게 참 삶의 의미를 조금이라도 전해줄 수 있다면 그보다 더 보람된 봉사가 어디 있겠는가.
 
아직까지 청중 앞에서 내 생각을 피력할 수 있는 기력과 정신력이 남아있는 것은 하느님께 참으로 감사해야 할 일이다. 일전에도 저녁에 강연 일정이 잡혀 있는데 전날 밤에 잠을 한숨도 못잤다. 고질병 같은 불면증 때문에 뜬눈으로 밤을 새는 경우가 더러 있다. 그래서 "이제와서 강연을 취소할 수 없으니 도와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했다.
 
당일 낮에 잠깐 눈을 부친 뒤에 저녁에 가서 강연을 했는데 청중 반응이 참 좋았다. 강연 내용이 감동적이었다는 칭찬을 받고 맛있는 식사까지 얻어먹고 돌아왔다. 나의 하느님은 이처럼 사소한 것까지 보살펴주신다. 그런데도 드러내고 자랑할만한 하느님 체험이 없다고 생각하니 난 아무래도 하느님 은혜를 제대로 못느끼는 사람인 것 같다.
 
교구내 본당이나 수녀원 같은 곳에서 미사 주례 요청이 오면 머뭇거리게 된다. 은퇴한 이상 가급적 교회 안팎의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이 교구와 교구장님을 돕는 길이다.
 
그런데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몸을 낮추려고 해도 사람들이 자꾸 불러낸다. 은퇴 후 언론 접촉을 피했는데 언론사에서 보내온 인터뷰 요청서가 쌓이고 쌓여 마지못해 합동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얼마 전에도 어느 수녀회에서 전 총원장 수녀 장례미사 주례를 부탁하길래 "교구와 먼저 의논했으냐"고 물어보았다.
 
모름지기 공동체에 지도자가 바뀌면 새 지도자를 중심으로 일치해야 한다. 과거에 연연하면 발전할 수 없다. 교구장직 이임 감사미사에서 세례자 요한의 말을 빗대어 "그분(새 교구장)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고 말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은퇴 직후에 비하면 좀 뜸한 편이지만 요즘도 심심찮게 손님들이 찾아온다. 일전에 충북 제천 배론성지에서 우연히 한 중년 부인을 만났는데 그는 "추기경님을 뵈려고 혜화동 주교관까지 찾아갔는데 못 만나고 그냥 돌아왔다"며 무척 반가워했다. 그 부인은 내게 선물하려고 한복을 손수 지어 갖고 왔는데 수위실에서 약속없이 찾아온 방문객이라 제지한 것 같다. 그런 아름답고 고마운 마음을 제대로 못받아주는 것이 미안할 따름이다.
 
내가 혜화동으로 이사오니까 수위실 아저씨들과 신부들이 문 단속에 많은 신경을 쓴다. 생면부지의 사람이 예고 없이 밤늦게 내 방 앞까지 들어와 놀란 일이 몇 번 있다. 한 사람은 전과자인데 도움을 청하러 서너번 찾아온 모양이다.
 
그 이후로 내가 무슨 변을 당할까봐 출입을 더 엄격히 통제하고 있는데 꼭 그럴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낯선 방문객에 시달려도 좋으니 사람들이 자유롭게 들락거릴 수 있도록 하자고 해도 내 말을 듣지 않는다. 
 
[평화신문, 제786호(2004년 8월 22일), 정리=김원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