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추기경

연재를 마치며

문성식 2011. 2. 11. 23:56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63] 연재를 마치며
 
남은 삶 온전히 하느님께 맡길 터
 
 
인생을 하루에 비유하면 난 지금 해거름에 와있다. 정상에서 내려와 황혼 들녘에 서 있는 기분이다.
 
예나 지금이나 붉게 물들어가는 저녁 하늘을 바라보면 마음이 편해진다. 고향 풍경과 어머니 품이 느껴진다.
 
어릴 때 저녁이 가까워오면 신작로에서 서성거리며 행상나간 어머니를 기다렸다. 어머니는 산등성이로 기우는 석양을 등지고 돌아오실 때가 많았다.
 
내 나이 82세. 하느님 곁으로 한발짝 한발짝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 하늘나라에 가면 보고 싶은 어머니도 만날 수 있으리란 기대를 품어본다.
 
요즘 병세가 위독한 선후배 신부님들 병문안을 가면 귀에 바싹 대고 이런 말을 되풀이한다.
 
"하느님한테 맡기세요. 하느님한테 모든 걸 다 맡기세요."
 
이는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내 여생과 건강뿐 아니라 모든 걸 하느님께 맡기고 살려고 노력한다.
 
그동안 부족한 점이 많았다. 특히 근심 걱정까지 하느님께 모두 맡겨드리는 믿음이 부족했던 것 같다. 하느님께 대한 완전한 믿음과 신뢰, 그것은 그분을 믿고 높은 빌딩에서 몸을 내던질 수 있을 정도여야 하는데 그 경지까지 이르지 못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태양이 구름에 가려 빛나지 않을지라도/ 나는 태양이 있음을 믿습니다/ 사랑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을지라도/ 나는 사랑을 믿습니다/ 하느님께서 침묵 속에 계시더라도/ 나는 하느님을 믿습니다"
 
이 시는 제2차 세계대전 때 군사용으로 건설된 독일 쾰른의 어느 지하동굴에 새겨져 있다. 이 시를 쓴 사람은 어두운 동굴에서 전쟁의 공포에 떨면서도 눈부신 태양을 보았고, 하느님을 신뢰했다.
 
그리스도인이란 무엇인가? 하느님은 사랑이시며, 우리 희망의 전부임을 굳게 믿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분이 희망을 이뤄주기 위해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고 계심을 믿는 사람이다.
 
또 '사랑'이란 단어를 입에 달고 살았으면서도 진정한 사랑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한 점도 후회스럽다. 좀더 몸을 낮추고 가난한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었어야 했는데…. 난 가난한 사람들에게 마음이 끌린다. 하다못해 부자 동네 성당보다 가난한 동네 성당에서 미사를 드릴 때가 더 마음 편하고 정이 느껴진다.
 
부족한 점이 어디 이것뿐이겠는가. 그런데도 하느님은 내게 분에 넘치는 은총을 내려주셨다.
 
예수님을 따라나선 베드로가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마르 10, 28)라며 은근히 뭔가를 기대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복도 백배나 받을 것이며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이 말씀이 내게 그대로 이루어졌다. 아니, 백배가 아니라 천배의 복을 받았다. 혈육을 떠나 성직의 길로 들어선 이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형제자매와 아들딸을 얻었다.
 
물질적으로 궁핍을 느껴본 적도 없다. 집이 가난해서 소신학교 시절에 친구들 다 걸치고 다니는 외투를 못사 입고, 사전(辭典) 살 돈이 없어 매번 빌려 쓰면서도 그걸 가난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부잣집 아들 티가 난다"는 소리를 듣고 다녔다.
 
이제 내게 남은 일은 기도밖에 없다.
 
그동안 위로와 격려로 나를 도와준 은인들을 위해, 그리고 서울대교구와 한국교회 발전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요즘은 우리 민족의 화해와 통일, 그리고 세계평화를 위해서도 기도를 많이 한다.
 
또 최근 들어 빼놓지 않고 바치는 기도가 한국교회에 훌륭한 추기경을 보내달라는 것이다. 나 역시 새 추기경 탄생을 학수고대하고 있고, 기회 있을 때마다 그 바람을 바티칸에 전하고 있다.
 
이제 내 얘기를 접어야 할 때가 됐다. 내세울 것 없는 삶이지만 사람들이 하느님 사랑과 은총을 조금이라도 더 깊이 느끼길 바라는 마음 하나로 내 살아온 얘기를 털어놓았다. 독자들이 내 얘기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과 메시지를 한 점이라도 발견했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지난해 5월부터 평화신문 지면을 통해 독자들과 만나온 시간은 참으로 행복했다.
 
평화방송·평화신문 오지영 사장신부님을 비롯한 신문 관계자 여러분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전한다. 
 
[평화신문, 제788호(2004년 9월 5일), 정리=김원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