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내용을 미학 용어로 환산하면 ‘생색(生色)’이 된다. 생색은 흔히 ‘생색낸다’처럼 잘난 체 한다는 부정적 의미로 쓰이지만 본뜻은 그렇지 않다. 국어사전을 보면 ‘낯이 나도록 하는 일’이라고 되어 있다. ‘낯’이란 체면인데, 유교에서는 이것을 개인적 명예에 한정하지 않고 집안, 문중, 나아가 국가사회의 집단적 가치를 모자라거나 비뚤어지지 않게 발현하는 단계로까지 확장한다. 생색을 유교미학의 관점에서 정의하면 일체성의 한 형식으로 일체성에 진정성이 더해진 상태이다. 이런 경지로서의 생색에 이르면 일부러 드러내지 않아도 그 기품이 혁혁히 빛날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굳이 드러내는 것을 보고 ‘생색낸다’며 부정적으로 본 것이다.
어쨌든 생색은 인격미에서 출발해서 전범에 이르는 유교의 이상적 사회미가 잘 구현된 상태이다. 잘 구현되었다는 것은 유교의 도덕률을 내적으로 충분히 소화해서 내 것으로 만들었다는 내적 일체를 필수조건으로 삼아 여기에 머물지 않고 이것을 적절한 외적 구성으로 형식화 했다는 뜻이다. ‘신언판서’라는 말도 있듯이 유교에서는 겉으로 드러나는 형식도 잘 갖추어야 비로소 미와 도덕과 법도가 완성된다고 믿었다. 단, 반드시 내적 깊이에서 우러나온 외적 형식이어야 했다.
한옥에 적용시켜 보면 전경은 ‘집안의 가풍이 가감 없이 밖으로 드러난 상태’라는 뜻이 된다. 평생을 학문과 절제로 수양한 선비는 옷고름을 매도 다르며 멀리서 걸음걸이만 봐도 다른 법, 하물며 십수 명의 대가족이 모여 사는 집은 더 말할 필요가 없어서 불화가 잦은 집은 서까래 하나를 내도 다른 법이며 집 주인이 욕심으로 가득 찬 탐관오리라면 그 집도 야비한 욕망으로 번들거리게 되어 있다. 반대로 가풍이 화목하고 집안이 안정되어 있으며 집 주인이 절제를 훈련하고 인정을 실천하는 사람이라면 그 집은 딱 그렇게 보이게 되어 있다. 낯을 들고 밖으로 돌아다니지 않아도 사람들은 나의 집을 보는 것만으로도 나와 우리 식구의 심성과 가족 살이의 분위기를 낱낱이 알아차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