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대방광 개념에 의하면 이런 공간 개념은 헛것이거나 잘해야 부질없는 욕심이 된다. 이 문제는 벽의 본질에 대한 문제로 볼 수도 있다. 인간에게 공간은 물론 최소한의 공리성을 가져야 한다. 육체와 생활을 담아내서 최소한의 물리적 존재 조건을 확보해주어야 한다. 물질적 벽은 당연히 필요하다. 문제는 정도인데, 불교적 세계관에 의하면 공간은 대방광의 상태를 닮아야 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아무리 사람 사는 공간이라고 해도 사람이 왔고 사람을 낳은 근원적 공간 상태인 대방광을 닮아야 한다. 비움에서 불이로 이어지는 한옥의 공간은 대방광을 닮은 좋은 예이다.
대방광은 반드시 큰 공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최고의 대방광은 물론 우주 전체이지만 모든 완결된 존재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확장할 수 있다. 이때 완결된 존재 상태를 구성하는 개체와 개체, 그리고 개체들이 모여서 이루는 전체 사이에 불이의 관계가 성립되어야 대방광의 상태에 이를 수 있다. 지극히 큰 것(=전체)과 지극히 작은 것(=개체) 사이에 분별과 차별이 없이 하나로 통하는 상태 역시 대방광의 중요한 조건 가운데 하나이다. 큰 것과 작은 것은 상즉상입(相卽相入)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우주로서의 대방광은 이 둘이 아예 하나로 같아져 있는 상태이다.
한옥의 방은 좋은 예이다. 벽을 고정시키기보다 가변형으로 해서 방과 방 사이를 가능한 한 많이 열고 소통하려 한다. 창문도 면적은 전면 유리보다 작지만 방의 앞뒷면에 나는 경우가 많아서 외부와 통하는 경로가 여럿이다. 벽과 창의 재료도 흙과 창호지를 써서 외부와의 단절성을 최소화했다. 개체와 개체는 원활히 통하며 이것들이 모여 집의 전체 구성을 이룬다. 도형적 윤곽과 그것이 한정하는 면적의 합으로 집의 전체를 구성하는 현대식 개념과 다른 한옥만의 공간 개념이다.
한옥의 전체 구성은 면적의 합보다는 경로의 합에 더 가깝다. 개체의 합보다는 개체 사이의 관계와 연결의 합에 가깝다. 전통 한옥에 대해서 얘기할 때 집의 평수는 보통 거론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현대식 개념으로 정확한 평수를 찾아내는 일부터 쉽지 않다. 30평이면 한옥으로는 작지 않은 편에 속하는데, 한옥에서는 공간 이용이 벽이 한정하는 면적 속에서만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주변과 소통하며 주변까지 사용 영역으로 확장되기 때문에 콘크리트 벽으로 막힌 현대식 30평집보다 훨씬 넓게 사용할 수 있다.
원융무애
대방광의 개념이 적용된 한옥 공간은 원융무애(圓融無礙)한 상태로 발전된다. 원융무애란 막힘과 분별과 대립이 없이 두루두루 통하는 상태로 흔히 불교에서 가장 이상적인 존재 상태로 여긴다. 한옥 공간은 건축에서 원융무애가 구현된 예로 볼 수 있다. 직접적 연관성을 증명할 문헌 자료 같은 것은 물론 없지만 불이 공간과 대방광을 매개로 유추 해석하면 큰 무리 없이 적용할 수 있어 보인다. 특히 불교의 원융무애 사상이 노장의 무위 사상과 유사한 점이 많기 때문에 이것까지 연결 고리로 삼으면 연관성은 더 커진다.
관건은 역시 벽과 공간 사이의 관계이며 공간의 본질에 대한 물음으로 모아진다. 이쪽 벽도 저쪽 벽도 공간이 생겨나기 위한 방편일 뿐, 벽이 공간을 만드는 것은 아니며 벽 자체가 공간인 것은 더더욱 아니다. 공간은 이것들을 관통하고 싸고돌며 순환하고 원통하는 흐름의 상태이다. 벽과 벽 사이를 융통하며 이쪽 비움과 저쪽 비움을 서로 포함하는 흐름의 상태가 공간인데 이것이 곧 원융무애의 상태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