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문화,풍물,생활

한옥의 미학 2

문성식 2010. 8. 29. 02:57

유교로 본 한옥

인격미와 전범

한옥은 유교시대 반가이기 때문에 당연히 유교사상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 한옥에 반영된 유교사상은 사회미의 좋은 예이다. 사회미는 예술(=악樂)이 사회적 교화기능을 갖는다는 가정을 전제로 한다. 예술을 인간의 본능적 욕망으로 인정은 했으나 일정한 범위 내에서 절제되어야 하며, 즐김이 궁극적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되며, 사회적 가치를 함양하고 정화하는 기능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맹자도 세 가지 즐거움 가운데 하나로 아름다움을 향한 즐거움을 들었는데, 이것이 인간의 본성임에는 틀림없으나 여기에 머물면 미가 될 수 없으며 도덕률로 구현되어야 비로소 미가 된다고 했다. 

 

 

노안당 유교미학에서는 각 집이 각자의 위계와 본성에 합당한 차별성을 가져야 한다고 본다. 왕실 한옥답게 장대석 기단 위에 타고 앉아 마당을 둘로 가르며 권위를 드러낸다.

 

 

유교미학은 주로 시, 악, 화에 집중되어서 건축에 대한 구체적 언급은 적은 편이나 유추 작용을 통해 건축도 유교의 사회미를 발휘하는 장르로 해석할 수 있다. 특히 본고장 중국보다도 더 강한 원리주의 유교가 꽃피웠던 조선시대 지배계층의 주거인 한옥은 좋은 예이다.

 

유교미학의 출발점은 인격미이다. 유교에서는 미를 단순히 화려한 화장이나 시각을 자극하는 외관의 꾸밈이 아니라 개인의 다듬어진 속마음으로서의 인격이 외적 형식으로 드러나는 통로, 혹은 그렇게 드러난 결과라고 본다. 인격미를 집단화하면 전범(典範)으로 발전한다. 전범은 사회가 추구하는 집단적 가치를 하나의 전형적 모범으로 굳힌 상태이다. 이때부터 사회미가 구체적 예술형식으로 드러나는 단계이다. 건축에서는 기능유형이 좋은 예이다. 각자의 계급과 속성과 기능과 형편 등에 합당한 공통적 건축형식이 있다는 뜻이다. 왕궁은 왕궁답게, 관아는 관아답게, 서원향교는 그것답게, 한옥은 한옥답게 보여야 하고 그렇게 작동하여야 한다는 뜻이다. 관아가 기생집 같아서는 안 되며 왕궁이 한옥과 같을 수는 없다. 건축은 사회적 법도와 기강이 드러나는 대표적인 외적 형식이다.

 

 

안동 숭실재 유교를 지탱하던 중요한 축인 제사를 담당하던 건물인 ‘재사’는 숭고미를 드러내서 그 본성과 일치한다.

 

 

이 가운데 한옥은 전경에서 유교사상을 잘 드러낸다. 유교의 사회미는 아무래도 외적 형식에 치중하는 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절대 겉치레나 잘난 체 같은 치졸한 외적 형식은 아니었다. 유교에서는 외적 형식이 반드시 내적 깊이와의 일체를 전제로 하여야 한다고 강하게 가정한다. 마음의 깊이에 의해 자연스럽게 드러난 외적 형식만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았으며 거꾸로 이런 외적 형식은 보는 것만으로도 교육적 전범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수양과 도덕이 경지에 오른 곧은 선비는 젓가락질 하나만 봐도 다른 법이며 몸가짐 걸음걸이 말투 하나만으로도 다른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어 교육효과를 줄 수 있다는 뜻이다.

 

 

생색(生色)

똑같은 내용이 집에도 적용될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한옥의 전경이다. 한옥의 전경은 어딘가 모르게 반듯한 선비의 기개를 닮았다. 곧은 수평선이 여러 겹 겹치면서 중심을 단단히 잡는다. 가벼운 감정에 휩쓸려 촐랑대고 출렁거려서는 안 되며 하늘을 향한 허황된 과욕을 엄하게 경계한다. 한눈 팔지 않고 앞을 똑바로 응시하며 인간의 본성에 치중해서 인격을 갈고 닦으라는 유교의 인본주의 가르침을 드러내는 장면이다. 하루에도 십수 번을 들락거리며 바라보고 그 속에 직접 들어가서 매일을 생활하는 곳이 집이기 때문에 집이 어떻게 생겼느냐는 사람의 인격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 이는 현대의 환경심리학을 통해서도 과학적으로 입증된 사실이려니와, 한옥에서는 이미 수백 년 전부터 집의 교화기능을 알아채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반영한 것이다.

 

 

안동 의성김씨 종택 집의 전경은 집안의 가풍을 드러내는 통로로 사람의 인상에 해당된다. 유교미학에서는 이것을 생색이라고 부른다.

 

 

이런 내용을 미학 용어로 환산하면 ‘생색(生色)’이 된다. 생색은 흔히 ‘생색낸다’처럼 잘난 체 한다는 부정적 의미로 쓰이지만 본뜻은 그렇지 않다. 국어사전을 보면 ‘낯이 나도록 하는 일’이라고 되어 있다. ‘낯’이란 체면인데, 유교에서는 이것을 개인적 명예에 한정하지 않고 집안, 문중, 나아가 국가사회의 집단적 가치를 모자라거나 비뚤어지지 않게 발현하는 단계로까지 확장한다. 생색을 유교미학의 관점에서 정의하면 일체성의 한 형식으로 일체성에 진정성이 더해진 상태이다. 이런 경지로서의 생색에 이르면 일부러 드러내지 않아도 그 기품이 혁혁히 빛날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굳이 드러내는 것을 보고 ‘생색낸다’며 부정적으로 본 것이다.

 

어쨌든 생색은 인격미에서 출발해서 전범에 이르는 유교의 이상적 사회미가 잘 구현된 상태이다. 잘 구현되었다는 것은 유교의 도덕률을 내적으로 충분히 소화해서 내 것으로 만들었다는 내적 일체를 필수조건으로 삼아 여기에 머물지 않고 이것을 적절한 외적 구성으로 형식화 했다는 뜻이다. ‘신언판서’라는 말도 있듯이 유교에서는 겉으로 드러나는 형식도 잘 갖추어야 비로소 미와 도덕과 법도가 완성된다고 믿었다. 단, 반드시 내적 깊이에서 우러나온 외적 형식이어야 했다.

 

한옥에 적용시켜 보면 전경은 ‘집안의 가풍이 가감 없이 밖으로 드러난 상태’라는 뜻이 된다. 평생을 학문과 절제로 수양한 선비는 옷고름을 매도 다르며 멀리서 걸음걸이만 봐도 다른 법, 하물며 십수 명의 대가족이 모여 사는 집은 더 말할 필요가 없어서 불화가 잦은 집은 서까래 하나를 내도 다른 법이며 집 주인이 욕심으로 가득 찬 탐관오리라면 그 집도 야비한 욕망으로 번들거리게 되어 있다. 반대로 가풍이 화목하고 집안이 안정되어 있으며 집 주인이 절제를 훈련하고 인정을 실천하는 사람이라면 그 집은 딱 그렇게 보이게 되어 있다. 낯을 들고 밖으로 돌아다니지 않아도 사람들은 나의 집을 보는 것만으로도 나와 우리 식구의 심성과 가족 살이의 분위기를 낱낱이 알아차린다.

 

 

호연지기, 배의여도, 집의소생

유교에서는 개개 인격의 굳건함과 위대함이 사회 기강과 국가 법도의 기틀이 된다고 믿는다. 인격미가 전범으로 집단화되어 사회미로 발전하는 단계론적 세계관의 좋은 예이다. 선과 미는 단계론을 이어주는 주요 고리이다. 유교의 사회미에서는 미를 선으로 정의한다. 도덕적 본능과 심미적 본능을 하나로 만들어주는 매개, 혹은 이 둘이 하나로 일치한 상태를 선이라 했으며 이것이 예술 형식을 통해 구현된 상태가 미인 것이다. 미란 보기 좋은 장식이나 유려한 곡선 형태나 화려한 색채배합 같은 것이 아니라 도덕이라는 사회적 가치를 드러내서 강조하는 형식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유교의 강령을 드러낸 한옥의 전경은 미의 좋은 예이다. 선비의 덕목인 호연지기가 출발점이다. 호연지기란 지극히 크고 강한 기를 곧게 키워 손상시키지 않음으로써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차게 된 상태라는 것이다. 허망한 과욕으로 날뛰라는 뜻이 아니다. 한없이 뻗어나가고 싶은 개인의 자유의지를 도덕 윤리와 교융(交融)하도록 다듬어 사회적 질서 내에서 발휘하도록 하라는 뜻이다. 호연지기는 의가 모여 훈련을 거쳐 내 속에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이다. 한옥의 전경에 드러난 이상적 생색으로서의 반듯한 몸가짐과 안정된 구성은 이것의 좋은 예이다.

 

호연지기는 배의여도로 발전한다. 배의여도란 의를 따르고 도에 의존한다는 뜻으로 호연지기가 개인의 차원을 넘어 사회적으로 작동함으로써 얻어지는 도덕 윤리의 상태이다. 배의여도는 다시 집의소생으로 발전한다. 집의소생이란 의를 모아 생명으로 말미암는다는 뜻으로, 도덕 윤리에 종속된 정도가 더 심한 상태이다. 기는 의와 도덕과 떨어지면 곧 시들어버린다. 건축에 적용시키면 개별 한옥에 나타난 탕탕한 기풍이 집단으로 구현되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된다.  


한개마을 유교에서는 개별 집의 기풍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것이 모여서 이루는 마을 전체의 분위기도 유교의 덕목에 합당해야 한다.

 

공시 공소(共所)로 집단화되면 문중 마을 특유의 분위기가 된다. 하회마을, 한개(한계)마을, 양동마을, 개평마을, 인흥마을, 남사마을 등이 아직 남아있는 예들이며 조선시대에는 각 지방마다 그 지역을 대표하고 다스리던 문중이 모여 사는 마을들이 많았다. 통시적으로 집단화하면 기능유형에 요구되는 건축적 기풍에 해당된다. 행랑채가 주인 채를 압도해서는 안 되며 사랑채가 안채처럼 포근한 것을 굳이 탓할 바는 아니나 사랑채라면 최소한 유교적 가부장제의 가장에 합당한 권위와 기개를 폭압이 아닌 모범적 성품과 곧은 기개로 드러내 보여야 하는 식이다. 이는 집 주인이 누구인지 상관없이 유교시대 반가라면 반드시 지켜야 했던 사회적 동의사항이었던 것이다.

 

 

 

글·사진 임석재 / 이화여대 건축학과 교수
동서양을 막론한 건축역사와 이론을 주 전공으로 하며 이를 바탕으로 문명비평도 함께 한다. 현재까지 37권의 저서를 집필했다. 공부로 익힌 건축이론을 설계에 응용하는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 jyimis@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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