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초기 한국 천주교회의 새로운 이해(4)

문성식 2019. 2. 23. 01:06

 

 

초기 한국 천주교회의 새로운 이해(4)

 
 
[신유박해 200돌] 박해의 배경 - 박광용 교수
 
신유박해가 발생하기 이전인 정조시대에 이미 천주교에 대한 다양한 이해 방향이 제기 됐다. 당시 사람들은 서학을 '사학'(邪學)이라고 평가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양(揚), 묵자(墨子), 도(道), 불교와 같은 이단 사설이라는 것이다. 영의정 채제공이나 비판적인 남인들의 경우가 이에 속하는데 이들은 '무군무부'(無君無父) 또는 요술로 가는 사학이가는 하지만, 잘 이용하면 체제 내에서 일정한 순기능, 곧 일반 백성에 관한 교화 기능을 할 수도 있다고 보았다.
 
둘째는 명말 청초 시기의 패관 소품 같이 언행이 경솔하고 신중하지 못한 학문에, 경박한 무리들이 물들었기 때문에 나타난 사학이라는 것이다. 이는 정조의 견해가 대표적이다. 따라서 치세기에 진정으로 정학(올바른 학문) 실력이 깊어지면 자연히 해소된다고 보았다.
 
셋째는 난세에 나타나는 농민 반란군인 황건적이나 백련교도 같은 혹세무민하는 반사회 세력이므로, 난세기의 국가 변란 세력이라는 것이다. 이는 노론 중심의 척사파들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신유박해 이후 천주교 박해의 배경은 대체로 난세의 종교로 평가돼 처단됐다. 특히 1801년 신유박해는 정조가 내세운 교화 우선의 '책은 불태워 버리되 사람은 사람 되게 한다'는 치세기의 교화 우선 원칙을 폐기함으로써 시작됐다.
 
신유박해를 공포한 정순왕후는 천주교 신자들에게 명령 불복종 죄를 역률로 다스린다는 죄안을 추가하여 "그 괴수는 다스리고 책은 불태워 버린다"라는 원칙으로 바꿀 것을 천명했다. 이로써 이가환, 정약용 등 남인 지도층, 김건순, 강이천 등 노론과 북인의 인재들, 정조가 특별하게 보호한 은언군 집안 등을 겨냥한 벽파의 정치적 옥사가 시작됐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인재들을 단순히 사학에 종사했거나 관련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죽이고 유배시켰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좀더 보강된 증거를 내놓으려는 시도에서 이른바 '대박청래 일장판결'로 표현되는 유항검 등의 옥사가 나타났고, 황사영의 '백서'가 결정적인 증거물이 됐다.
 
초기 천주교 신자들의 사고 방식이나 사회 개혁 이념들을 살펴보면, 체제 밖의 교회를 건설하려 했다고는 결코 생각할 수 없다.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성교요지"에 나타나 있는 이벽의 글을 살펴보면 군주제를 인정하고, 4민 평등을 인정하는 공상적 농업 사회의 건설을 상징하는 것 같다. 이는 현실 개혁 우선보다 도덕 우선 원칙이라는 입장에서 성리학과 근본적으로 같다.
 
'초기 천주교회가 왜 박해를 받았는가?'하는 문제는 실제로 정설이 없어 대단히 복잡한 문제이다. 따라서 '문화' 운동의 충돌이라는 새로운 관점에서 박해 배경을 이해하는 시도가 요청된다.
 
 
[신유박해 200돌] 순교의 길 - 최석우 신부(한국교회사연구소 명예소장)
 
한국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일반적으로 순교의 결과인 용덕(勇德)은 중시하면서, 그 원인인 증언은 등한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순교의 본질은 신앙의 증언이지, 죽음의 증언은 아니다. 즉 박해시대 순교자들의 순교는 우리의 영원한 구원을 위한 증언이지, 우리의 죽음 자체를 위한 증언은 결코 아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직전만 하더라도 우리는 순교자들의 초인간적인 용덕에 경탄해 마지 않았고 그것으로써 교회의 신적 기원을 증명하는 기적으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공의회는 순교에 있어서도 호교적인 의의보다는 사목적 의의를 더욱 중시하여 순교의 '증거성'을 강조하게 되었고, 동시에 순교의 본래 뜻을 되찾으려 했다.
 
순교자들은 세상의 구원을 위해 기꺼이 죽음을 받으신 스승 그리스도를 가장 닮은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들의 순교를 사랑의 최고의 증거로 여긴다. 그러나 순교는 뛰어난 은혜이고 예외적인 선물이다. 예외적 선물로 간주하는 까닭은 순교가 영웅적인 행위여서가 아니라,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죽음으로써 증거한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명한 데 있다.
 
한국 천주교회에 있어 순교자 공경은 1791년의 순교자 윤지충과 권상연에 대한 깊은 존경심, 특히 그들의 순교 때 일어난 기적에 대한 경외심에서 비롯됐고, 그것은 순교자들의 유해를 모시고 필요한 도움을 청하는 대중 신심으로 발전했다. 그리고 순교자의 피가 복음의 씨앗이 되어 가장 궁벽한 지역에까지 전파됨으로써, 박해기 한국 교회는 순교전통, 순교 신심을 토대로 유지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의 뿌리인 순교자들을 공경하고 현양해야 한다. 동시에 순교자들이 목숨을 바쳐 증거했던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그들이 추구했던 가치, 그리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당당했던 모습들을 깊이 생각하고 본받는 것,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우리들이 걸어가야 할 순교의 길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렇게 볼 때, 신앙 선조들의 순교의 길은 오늘날 보다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신앙 활동을 통해 하느님을 증거하는 내실 있는 신앙 생활로 귀결된다고 할 수 있다.
 
<평화신문, 645호(2001년 9월 23일), 정리=리길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