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초기 한국 천주교회의 새로운 이해(1)

문성식 2019. 2. 23. 01:00


 초기 한국 천주교회의 새로운 이해(1)

 
 
우리 민족과 천주교 신앙의 만남, 수용, 발전 문제를 되짚어 보고 재조명해 21세기 이 땅에서 가톨릭 신앙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그리고 신앙인으로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지를 전망하는 '초기 한국 천주교회의 새로운 이해' 학술 강좌가 명동대성당에서 9월 순교자 성월 한달간 매주 토요일 오후 5시에 개최된다. 이번 학술강좌를 공식 후원하고 있는 평화신문은 4회에 걸쳐 매주 열리는 강의 내용을 요약 보도한다.
 
 
▧ 동아시아와 천주교의 만남
 - 김성태 신부(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 교황청의 새로운 선교 정책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의 개혁 교황들은 선교 사업에 있어 세속 군주들의 영향에서 벗어나 교황의 지도 아래에서 복음화가 수행될 수 있는 선교정책을 세워 시행하기에 이르렀다. 1568년 교황 비오5세(1566~72)는 '비그리스도인의 개종을 위한 추기경위원회'를 구성했고, 교황 클레멘스 8세(1592~05년)는 '선교성'을 설립했으며, 교황 그레고리오 15세(1621~23년)는 1622년 1월6일에 정치적 식민 선교를 순수한 교회 선교로 전환하기 위하여 교황청 상설 기구로 '포교성성'을 창설했다. 교황 우르바노 8세(1623~44년)는 1627년 선교지방 출신의 사제 양성을 위해서 로마에 '포교성성 우르바노 신학교'를 설립했다.
 
포교성성은 선교 지방의 교회들이 국가 주도의 선교에서 독립하여 직접 교황청과 밀접한 관계를 갖게 하기 위해 주교좌를 증설했다. 포교성성은 식민지 정책에 따른 서구 중심의 선교에서 벗어나기로 결정하고, 가톨릭 신앙을 어기지 않는 한 원주민의 관습에 순응하도록 노력할 것을 지시했다. 이에 예수회는 적응화 또는 토착화라는 새로운 선교방법을 개발했는데, 프란치스코 사베리오는 일본에서, 마태오 리치는 중국에서, 로베르토 데 노빌리는 인도에서 이 선교방법을 사용했다.
 
포교성성은 그리고 선교사들에게 그 지방의 젊은이들을 사제로 양성할 것을 권유하였고, 수도회 선교사들과 균형을 이루기 위해 재속 성직자들이 선교활동에 참여하도록 권장하였다. 그 결과 1658년에 새로운 형태의 선교 조직을 갖춘 '파리 외방전교회'가 창설되었다.
 
△ 조선 왕국의 선교 시도
 
임진왜란 중 예수회 선교사들은 조선 왕국에 복음을 전파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예수회의 재정 문제와 선교사들의 건강 문제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스페인 도미니꼬 수도회는 1602년에 일본에 진출해 선교활동을 하면서 조선에도 복음을 전파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1618년 토마스라는 조선인 신자의 안내로 3명의 수사 신부들이 나가사키에서 조선으로 떠나기 위해 배에 올랐으나 영주가 출항을 금지시켜 조선 선교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중국 천주교에서는 1620년 고관이던 서광계가 조선 왕국에 파견되기를 자원했다. 그가 자원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조선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려는 마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황제의 인가를 받은 서광계는 조선 선교에 사용할 교리서를 인쇄하도록 조처를 취했고 예수회 신부를 대동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그의 조선 선교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1644년 소현세자는 귀국할 때 아담 샬 신부가 천주교 신자인 중국인 환관을 데리고 가서 조선에서 교리배우기를 원하는 이에게 선교하도록 선처해 달라는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소현세자가 귀국한지 두달만에 사망해 왕실의 개종을 통해 조선을 그리스도교화하려는 시도는 실패하고 말았다.
 
이어 1650년 프란치스꼬회 수사신부가 조선에 복음을 전파하려고 국경까지 왔었으나 경계가 삼엄하여 북경으로 돌아갔고, 1703년 예수회 신부가 조선 왕국의 선교 계획을 세운 적이 있었다.
 
이와 같이 일본 기리시탄과 중국의 천주교를 통한 조선 선교 계획은 실천에 옮겨지지 못하고 시도에 그치고 만 이유가 있었다. 첫째로 조선 왕국은 건국 초기부터 왜구의 침략 때문에 해금정책을 시행하여 선교사들이 해로를 통해서 입국할 수 없었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정치적 변동(명나라와 후금의 전쟁)이 일어나 육로를 통한 교통이 두절됐고, 조선의 쇄국 정책은 외국인이 입국해 머무르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외국과의 유일한 접촉은 다만 조선의 부연사들이 북경 천주당을 방문해 선교사들을 만나 받아 온 서구 문물과 한역 서학서에 대한 조선 학자들의 연구뿐이었다.
 
 
▧ 중국을 통한 서양과 천주교의 이해
 - 한역서학서의 역사적 의의/ 장정란(덕성여대 강사, 중국사)
 
한역 서학서란 16세기말 이래로 중국에서 활동한 서양 선교사들이 그리스도교를 전파하고 서양 문물을 전달하기 위하여 서양의 종교, 윤리, 지리, 천문, 역사, 수학, 과학, 기술 등에 관해 한문으로 저술 또는 번역한 일체의 서적을 말한다.
 
한역 서학서는 16세기말 이후부터 18세기말까지 서양 선교사들, 주로 예수회 선교사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때 출간된 한역 서학서는 대략 400여종이 넘는데, 종교서로는 "천주실의", "교우론", "기인십편", "칠극", "직방외기", "성경직해", "성체요리", "천주교리"등이 유명했다. 저술과 역술로 가장 많은 한역 서학서를 남긴 인물은 리치, 알레니, 아담 샬, 페르비스트, 로 불리오, 바뇨니, 디아즈, 판토하, 브란카티, 롱고바르디 등이었다.
 
△ 조선에 전래된 한역 서학서
 
서양 문물이 조선에 전래돼 소개된 것은 17세기 초부터였으나, 18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본격적으로 학문 연구의 대상으로 수용되기 시작했다.
 
한역 서학서가 조선에 전래된 기록은 1614년에 출간된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처음으로 언급됐다. 비슷한 시기에 유몽인은「어우야담」에서 천주실의와 교우론을 읽고 천주교가 불교 도교와 다르다는 점, 천당 지옥설과 천주교인이 결혼하지 않는 것에 대해 논평했다. 그러나 서양의 학술과 종교에 대한 본격적인 관심은 조선 실학의 대가인 이익과 그의 문인들에게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역 서학서를 연구한 학자들의 서학에 대한 태도는 결과적으로 세 흐름으로 갈라졌다. 첫째는 안정복 신후담 홍정하 등과 같이 서학을 거부하고 배격하는 입장을 취한 학자들로서, 이들은 많은 젊은 학인들이 유학의 가르침을 떠나 사학으로 기울어지는 데 대해 우려하며 서양의 학문과 종교가 조선의 전통적 가치관과 사회 질서를 해칠 것을 경계하고 비판했다.
 
둘째는 서양 과학기술의 효용성과 선진성은 인정하고 받아들이나 종교나 윤리는 배격하는 이원적 태도를 취한 비판적 수용론자들로서, 주로 조선시대 실학자 중 북학파 계열의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이덕무 등이 이에 속했다.
 
셋째는 서학을 체계적으로 연구한 결과, 학술과 종교 모두 받아들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이해함으로써 전면 수용하여 실천한 남인계 소장 학자들이었다. 권철신 권일신 이가환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이벽 이승훈 등이 그들인데 바로 이 셋째가 우리나라에 천주교를 이끌어 들인 흐름이었다.
 
△ 한역 서학서의 역사적 의의
 
첫째, 한역 서학서에 의해 전파된 그리스도교는 일개 종파로서의 의미가 아닌 서구 문화의 근간을 이루는 사상적 지주로서 동양 세계에 이해될 수 있었다. 따라서 한역 서학서를 통해 서양과 중국 문화의 본격적 접촉이 이루어졌고 특히 동양의 지배 계층에 서양 문화가 논의되고 수용되는 계기가 마련됐다. 둘째, 한역 서학서를 통해 유럽의 자연 과학과 기술이 체계적으로 소개되고 최초로 활용될 수 있었다. 셋째, 한역 서학서에 의해 소개된 서양의 자연 과학 지식과 실용적 학문은 명말 청초 경세 사상의 출현을 자극했다. 넷째, 한역 서학서는 중국과 문화적 접촉이 많았던 인접국, 특히 조선에 전래되어 자생적 천주교 창설을 가능하게 했고, 또한 조선 실학의 형성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평화신문, 642호, 2001년 9월 2일, 정리 리길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