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초기 한국 천주교회의 새로운 이해(3)

문성식 2019. 2. 23. 01:04

 

 

초기 한국 천주교회의 새로운 이해(3)

 
 
▲ 초기 신자들의 교리 이해 - 하성래(안양대 교수)
 
마태오 리치의 "천주실의"는 우리 나라 선비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면서 천주교를 도입하여 신앙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도록 힘을 준 책이다.
 
우선 "천주실의"에서는 우주만물의 창조자, 주재자로서의 '천주'의 존재를 새롭게 인식시키고 있다. 상고 시대 동양 사상에서도 주재자, 창조자로서 '천'(天)의 존재를 인식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투명하지 못했다. 과거 동양의 성리학자들은 특히 '성'(性)에 치중해 성을 탐구하여 도를 닦고 가르치는 데에는 열중했으나 그 으뜸되는 '천'의 개념이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데에는 소홀했다. 그런데 그 '천'의 개념이 "천주실의"에 의해 창조자, 주재자로서 명확해진 것이다.
 
마태오 리치는 "천주실의" 수편에서, 천주님께서 처음으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주재, 안양하심을 논하며 서양에서 '데우스'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천주'라고 했다. 이렇게 창조주로서 천주를 설명한 리치는 천주는 본디 한 집에 한 가장이 있고 한 나라에 한 임금이 있듯이 이 우주를 통괄하는 전지전능한 천주는 오직 한 분뿐이라고 했다. 그는 천주는 모든 사물의 근원이라고 했다.
 
이러한 "천주실의" 내용을 우리 초기 신자들은 얼마나 이해하고 수용했을까?
 
그 대표적인 인물로 권철신, 권일신, 정약종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정약종의 "주교요지"는 한마디로 "천주실의"의 요약판이라 할 수 있다.
 
한문 기도서로는 디아즈의 "수진일과"가 일찍이 들어와 초기 신자들은 그 기도서의 천주경, 성모경, 성호경을 사용했다. 그들은 과연 어느 나라 말로 된 기도문을 사용했을까? 그들은 아마 한문으로 된 기도문의 독음을 한글로 적은 기도서를 사용했을 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820년 중국을 여행하던 아벨 레무사츠는 다음과 같은 흥미 있는 '천주경'을 수집했다. 이 자료는 이때까지 천주경은 우리말로 번역되지 않고 한자의 독음을 한글로 표기해 그대로 읽은 것임을 알 수 있게 해주고있다. 그것은 1838년 앵베르 주교가 포교성성에 보낸 보고 서한의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서한에서 "한국 신자들은 천주교를 받아들인 그 시초부터 방언(우리말)을 천시하는 관습에 따라 천주님께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을 그렇게 합당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라고 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앵베르 주교가 입국해 "천주성교공과"를 번역할 때까지는 한문 기도문에 한글 독음을 달아 암송하였을 것이 거의 확실하다.
 
 
▲ 초기 교회의 내적 발전 - 이원순 교수(서울대 명예교수, 한국교회사연구소 고문)
 
1784년에 창설된 조선 천주교회는 서학 활동을 통해 보유론적으로 천주 신앙을 깨우친 일단의 조선 후기 사회 지식인들이 자율적으로 신앙 공동체를 이루고 천주 신앙 생활을 그들 나름대로 실천하게 된 자치적 교회 조직이었다. 그 교회는 넘어야 할 두 가지 문제를 안고 출했다. 그 하나는 초기 신자들의 천주 신앙이 보유주의적인 해석에 입각한 천주 신앙이었고 나머지는 성직자를 모시지 못한 신앙 공동체였다는 점이다.
 
교회 창설 후 신앙 공동체 창설 주역들은 계속 한역 교리서를 통해 교리 학습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조상 제사 금지의 규례를 알게 된 후 보유론적 천주 신앙이 지니는 한계를 과감하게 떨쳐 버리고 교회의 규례를 따라 전통적으로 지켜오던 제사를 폐하고 참 천주 신앙의 길을 택하는 어려운 결단을 취했다. 이로 말미암아 천주교 신자들은 '폐제패륜지도'로 몰려 끊임없이 박해를 받게 되는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됐다. 그러나 그들은 참 천주 신앙을 지키기 위해 생명마저 봉헌하였으며 천주 신앙을 지켜 오늘의 한국 천주교회를 키웠다.
 
한편 성직자를 모시지 못하고 미사 성제가 없는, 신자들만의 자율적인 기도 공동체로 출발한 조선 교회는 교회 창설 후의 계속적인 한역 교리서의 학습을 통해 성직 조직이 천주교 신앙 생활의 기본 조직임을 알게 됐다. 이에 초기 교회 지도자들은 이른바 가성직 조직을 이루고 성사를 집행했다. 이런 활동은 교회법적으로 중대한 과오인 가성직자에 의한 성사 집행이었다.
 
그러나 교중 내에서 이의가 제기되자 서슴없이 활동을 정지하고 북경으로부터 성직자를 모셔들이기 위한 '성직자 영입 운동'을 과감하게 추진하는 현명함을 발휘했으며 주문모 신부를 맞이해 들일 수 있었다. 주문모 신부는 조선입국후 6년 동안 큰 공을 이루고 신유박해 때 순교했다.
 
어려운 시기에 단 한 분뿐인 성직자를 잃은 조선 교회는 1811년부터 다시 제2차 성직자 영입 운동을 추진했다. 이때의 성직자 영입 운동은 제1차 때와는 달리 북경 주교만을 상대로 한 것이 아니고 가톨릭 교회 최고의 수위권자인 로마 교황을 상대로도 전개됐다. 또 단지 신부만을 요청한 것이 아니라 조선 교회에 영속적 발전을 보장받기 위해 결정적인 조치도 요청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교황청은 1831년 9월 '조선 대목구'를 설정했다.
 
이후 계속해서 대목구 소속의 주교와 신부가 조선 교회로 부임해 왔으며 조선의 신자들과 박해의 고난을 같이하며 활동하게 됨으로써 조선 교회는 실질적으로 '사도 전승의 가톨릭 보편 교회'와 일치를 이룬 그리스도 공동체의 지체 교회, 개별 교회로 발전할 수 있었다.
 
<평화신문, 644호(2001년 9월 16일), 정리=리길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