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초기 한국 천주교회의 새로운 이해(2)

문성식 2019. 2. 23. 01:02

 

 

초기 한국 천주교회의 새로운 이해(2)

 
 
■ 양반과 천주교 - 서종태 박사(스테파노, 한국교회사연구소 책임연구원)
 
□ 서학에 대한 학문적 관심을 일깨운 성호 이익
 
처음으로 한역 서학서에 비상한 관심을 보인 유학자는 성호 이익(1681-1763)이었다. 그는 서양 과학기술에 대한 이해를 선비가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필수적인 소양의 일부로 생각했다. 또한 천주교에 대해서도 유교를 보충하는 면이 있다고 인정했다.
 
이익의 계몽활동에 힘입어 성호학파 내에서 서학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그 결과 서학에 대한 학문적 이해가 점차 깊어졌다. 그들은 천문학 수학 등 서양 과학기술에 대한 남다른 인식을 갖게 됐으며 중국 중심의 화이관(華夷觀)에서 벗어나 서양을 세계의 중심으로 이해하게 됐다. 그리고 동양의 성학(聖學)과는 다르지만 서양의 학문을 성학으로 인정하게 됐다.
 
□ 성호학파 양명학자의 천주교 수용 주도
 
선교사의 전교도 없이 천주교를 자발적으로 수용한 양반들은 대부분 성호학파 가운데서도 좌파로 알려진 양명학자들이었다. 성호학파의 소장 학자들은 천주교 수용에 앞서 명나라 때의 학자인 왕양명이 주자학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새로이 수립한 양명학을 수용했다. 이익의 제자이자 조카인 이병휴(1710-76)가 양명학을 수용한 뒤 그의 제자인 이기양(1744-1819)에 의해 양명학은 성호학파 내에 널리 전파됐다. 천주교 수용에 앞장선 권철신 이벽 이승훈 권일신 정약용 홍낙민 윤유일 이존창 등은 모두 양명학자들이었다.
 
또 지방 각지의 신앙공동체의 창설과 발전을 주도한 사람들도 대부분 성호학파의 양명학자들이었다. 우선 경기도 양근지방 신앙공동체의 창설과 발전은 권철신·일신 형제와 윤유일에 의해 주도됐다. 경기도 광주지역의 신앙공동체는 정약전, 약종, 약용 형제에 의해 형성 발전됐고, 포천지방 신앙공동체는 홍교만이 주도했다. 충청도 내포지방은 이존창이 충주지역 신앙공동체는 이기연이 전라도 지방은 전주에 사는 유항검이 신앙공동체를 성립 발전시켰다.
 
양반 중에서도 근기 남인에 속하는 성호학파의 양명학자들이 천주교의 수용과 발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한 것은 정치적인 좌절로 인한 염세적 경향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들이 당시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을 척결한 새로운 이념 체계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서학에서 어떤 희망의 메시지를 발견했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사상 체계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민중과 천주교 - 차기진 박사(루가, 양업교회사연구소 연구소장)
 
□ 조선 후기 사회와 민중의 질서
 
처음의 종교운동은 양반 지도층에 의해 주도됐다. 그러나 얼마 안되어 피지배층으로서의 민중들이 여기에 참여하게 됐고 1790년의 '조상제사금지령'과 1791년 신해 진산사건 이후 양반 지도층이 교회로부터 이탈되어 나가면서 '민중 종교 운동'으로 변모해 가게 됐다. 교회 창설 당시 조선사회는 신분 변동이 아주 심화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양반층은 수적으로 크게 증가했으나 그 안에는 대가, 명가 등 문벌 가문이 있는 반면에 잔반, 한족으로 불리는 하층 양반층도 있었으며 지방에서는 명문 사족과 유림·향임 등이 섞여 있었다.
 
또 경제적 부를 쌓은 서민이나 중인층이 향임을 사는 경우도 있었고 반대로 향임층으로 부터 탈락해 가는 하층 양반들도 있었다.
 
□ 교회 안에서 드러난 민중 신자들
 
이벽 이승훈 권일신 정약용 등 양반신자들에 의해 교회가 창설된 후 천주교 신앙은 역관 최창현(요한) 역관 최인길(마티아)과 최인철(이냐시오) 형제 의원 김종교(프란치스코) 역관 김벙우(토마스), 김이우(바르나바) 형제 궁중 악사 집안인 지황(사바) 등 중인 계층으로 전파됐다.
 
이후 중인 신분으로 입교한 이들은 1790년에 세례를 받은 의관 집안의 최필공(토마스)과 종제 최필제(베드로) 약국을 개업하고 있던 회장 손경윤(제르바시오), 손경욱(프로타시오)형제 역관 출신의 성 현석문의 부친인 현계흠(바오로) 유업에 종사했던 서얼 출신의 홍익만(안토니오) 성균관 전복 이합규 등이 있었다.
 
상민 출신으로 가장 먼저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것으로 추정되는 이는 서울 대묘동에 거주하면서 김범우의 집을 오가며 교리를 배운 변득중이다. 또 내포출신 배관겸(프란치스코), 충청도 덕산 출신 황심(토마스)과 정산필(베드로), 면천 출신 박취득(라우렌시오), 예산의 김광옥(안드레아)와 김정득(베드로) 등이 상민 출신이었다. 당시 지방 상민들의 직업은 주로 농업이었는데 비해 서울 상민들은 갓장이, 필공, 목수, 엿장수, 나막신 장수, 뱃사공 등 경제적으로 어려운 경우가 많았으며, 여성 신자들은 실 장수, 김치 장수, 침선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천민 출신으로는 홍주의 백정 집안에서 태어난 황일광(시몬), 전라도의 사도 유항검의 종이었던 김천애(안드레아), 보령 역촌 출신의 김유산(토마스) 등이 유명하다.
 
□ 민중 신자들의 복음 수용과 전파
 
교회 창설 이후 중인 출신의 신자들 중에서 뛰어난 활동을 한 신자들이 주로 서울에 거주하고 있었던 반면에 상민 출신 신자들은 충청도 지역에 많았다. 반면에 경기도 양근· 여주 공동체와 충청도 충주 공동체는 주로 양반 출신의 신자들이었다.
 
민중 신자들은 대부부 이웃과 친지 등 지면이 있는 신자들의 권유에 의해 복음을 받아들였으며 자신의 신세를 비참하게 생각하거나 의탁할 데가 없어 신앙에 귀의하는 경우가 많았다. 양반층 신자들이 가족들의 권유로 입교하는 경우가 많았고 학문적 호기심에서 천주교 신앙에 접근하는 경우가 많았던 점과는 아주 대조적이었다. 실제로 천주교 신앙은 '양반→중인→상민'의 형태로 전파되어 나갔으며 역으로 상민이나 천민이 양반, 중인에게 복음을 전파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 민중들의 신앙생활과 희원, 순교의 용덕
 
중인 출신의 신자들을 제외한 상민· 천민 출신의 신자들 중에는 한문을 해득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들 중에는 정산의 순교자 이도기(바오로)와 같이 언문조차 배우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도층 신자들이 착안해 낸 것이 바로 언문체 기도문과 교리서였으며 그중에서도 정약종이 저술한 교리서 "주교요지"와 창현이 번역한 "성경직해"가 유명하다. 또 주문모 신부도 한글본 "고해요리", "고해셩챤", "셩톄문답" 등을 저술했고 황사영, 정인혁 등도 서적을 번역해 신자들에게 나눠 주었다.
 
민중 신자들의 궁극적인 희원은 "교리의 가르침에 따라 생활하다가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함으로써 천상의 영복을 얻는데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 천주교 신앙은 진리요 "구세의 양약(良藥)"이었다. 또 황사영이 알고 있었던 것처럼 신자들은 "순교자의 피는 성교회의 씨앗이 된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살아서 육화론적 신심을 쌓고 마침내 순교의 영광을 얻기를 바라는 종말론적 구원 사상을 지니고 있었다. 이를 위해 신자들은 일상 생활에서 나눔의 실천과 스스로를 위한 고신 극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평화신문, 643호(2001년 9월 9일), 정리=리길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