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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황실-순중황제

문성식 2019. 1. 6. 05:53


대한제국 황실-순중황제


 

 

 

 

순종황제 즉위식 모습을 담은 사진


☞ 그 동안 일반적으로 순종의 즉위식은 돈덕전에서 행해진 것으로 알려졌고, 문헌에는 즉조당에서도 즉위와 관련된 행사가 있었다는 기록은 있다. 그러나 행사의 내용에 중화전의 행사가 포함되었다는 기록은 밝혀진 바가 없었으며, 더구나 사진은 알려진 바가 없었다. 이 사진은 순종의 즉위식 행사가 중화전에서도 행해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순종황제 영정

 

 

세자 시절의 이척(순종)

 


1905년 순종의 모습 '대한황태자 척 모습 광무 9년 경운궁에서라고적혀있다


 

순종황제 이척 김은호 화백 그림

 


 

조선 27 대 순종 이척

 

 

예복을 입은 순종 황제  1909년

 

 

순종황제 1907-19110


1905년 1월 순종의 첫번째 비인 순명효황후 국장 때 모습으로 영성문 오른쪽 행각 너머로 선원전과 흥복전 흥덕전등 덕수구의 전각 기와 지붕이 솟아 있다 영성문 지붕 왼쪽에는 멀리 영국공사관이 보인다

 

 

순종황제와 순정효황후 1907-1910

 






순종황후 윤황후(純貞孝皇后尹氏)



영친왕 이은(李垠), 순종황제(純宗), 고종황제(高宗), 순종황후(純宗皇后), 덕혜옹주(徳恵翁主)



덕혜옹주(徳恵翁主),이은비이방자(李垠妃方子),순종황후(純宗皇后),순종황제,이은 (李垠),이진(李晋)


영친왕과 이방자비와 아들 이진​

  

 

 

 

16세의 순종비 윤씨

  

 

순정효황후 


순정황후(純貞皇后) [1894 ~ 1964]의 마지막 사진


본관 : 해평, 아버지 : 윤택영 (해풍부원군) , 어머니 : 부부인 유씨 (기계유씨, 父 유진학)

황태자비 : 1906년 13세 때 , 황후: 1907년 14세 때, 소생없음.


 

영친왕 귀국기념 사진 궁내부와 총독부 관리들-하세가와총독,영친왕,고종,순종,의친왕

 

 

고종황제의 붕어, 가운데 옅 모습이 <순종 > 1919 년 1월 22일.

온백성이 몰려와 통곡을 하였고, 국장은 3월3일에 거행 됐다.

 

 

순정효황후(순종황제의 비) 낙선재에서 사용했던 침대

 

 

순정효황후의 어차

 

 

순종의 어차

 

 

낙선재의 황손 이구(영친왕 자)순정효황후, 이방자여사(영친왕비),줄리아(이구 부인)

 

 

윤비와 궁중여인들1900

 

 

황실가족 사진  의친왕, 순종, 영친왕,고종,순정효황후, 양귀비, 덕혜옹주

 


 

황실 가족 영친왕 순종 고종 순정효황후  덕혜옹주 1918.1.21. 석조전 내부 모습 보인다

 

 

황실가족 덕혜옹주,이방자비,순정효황후,순종황제,영친왕,이진(영친왕자 사무관안음)

 

 

1907 남부순행 후 인정전에서 대신들과 기념촬영 순종 왼쪽에 이또히로부미가 서 있다 

 

 

1907 일본 황태자(대정천황)의 방한 기념 사진 오른쪽 앞 줄 영친왕 일황태자 순종황제

 

 

순종의 친경식

 

 

순종의 친경식

            

 

순종이 대리 즉위식도 하고 '진짜 즉위식'도 한 이유

 

'고종실록' 1907년 7월 18일 기록에 의하면, 대한제국의 광무황제 고종은 황태자에게 대리청정 하게 하는 조칙을 발표하고 의식을 거행하라는 어명을 내렸다.

"짐은 지금 군국(軍國)의 대사(大事)를 황태자로 하여금 대리(代理)하게 하노니, 의식절차는 궁내부(宮內府)와 장례원(掌禮院)에게 마련하여 거행하도록 하라.”
-- '고종실록' 고종 44년(1907년, 대한 광무 11년) 7월 18일

대리청정 의식은 다음 날인 7월 19일 오전 7시에 덕수궁 중화전에서 거행되었다. 그런데, 고종과 순종은 참석하지 않았다. 대신 궁중의 누군가(내시로 추정) 대리청정 의식을 대행했다. 이런 중요한 의식을 대리로 거행했다는 사실을 믿기가 쉽지 않지만, '고종실록'에도 대리로 거행하라는 어명이 기록되어 있다.



대한매일신보 1907년 7월 19일자 호외   


황태자가 정사를 대리하게 된 것을 진하(陳賀)하는 의식을 규례대로 중화전(中和殿)에 친림하는 것으로 마련하고, 황태자가 예를 행하는 의절도 규례대로 마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권정례(權停例)로 하라.”하였다. "
--'고종실록' 고종 44년(1907년, 대한 광무 11년) 7월 19일

권정례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임금이 참석해야 할 조정의 축하 의식에 임금이 나오지 아니한 채 임시방편으로 거행하던 식()'이라고 나와있다.

그리고1907년 8월 4일자 이탈리아 잡지 '라 트리부나 일루스트라타( La Tribuna Ilustrata)'에는 '권정례'로 거행된  대리청정 의식 그림이 실렸다. 그림의
장소도 '고종실록'에서 "권정례로 하라"면서 언급한 중화전이다
 


1907년 8월 4일자 이탈리아 군사 주간지 '라 트리부나 일루스트라타(La Tribuna Ilustrata)' 1면에 '조선의 새 황제 즉위식'이라는 설명과 함께 실린 삽화 그림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 소장)

이태진 교수(현 국사편찬위원장)도 일본 도쿄대학 고마바 캠퍼스 총합문화연구관 대학원생들을 상대로 한 강의에서 이 그림을 소개하면서 "1907년 7월 20일 경운궁(덕수궁) 중화전에서 내관(환관)들의 대역으로 치루어진 양위식 그림"이라고 설명했다. (<동경대생들에게 들려준 한국사>(이태진, 태학사, 2005)  
       
1907년 7월 21일자 '대한매일신보'도 "상오 칠시에 중화전에서 권정례로 하였다더라."라고 보도했고, 통감 이토 히로부미도 같은 내용의 외교전보를 일본 외무차관에게 보냈다.(통감부 전보 번호 제76호 : 今朝七時宮中中和殿ニ於テ權停禮ヲ施行) 그러나 누가 대신했는지를 알려주는 공식 기록은 없다.    
 대한매일신보도 1907년 7월 19일(광무 11년 금요일)에 호외를 발행해서 "상오 8시에 황제폐하께서 황태자전하께 대리를 명하시옵고 조칙을 반포하였다."라는 소식을 전했다.  

고종이 사용한 "대리"라는 단어에는, 황태자에게 권력은 주지만 황위는 자신이 계속 갖고 있다는, 고종 나름의 의미심장한 뜻이 담겨있었다.

고종 전에 가장 가까운 대리청정은 영조 51년(1775)에 있었다. '영조실록' 1775년 12월 7일(양력)자에 보면, 만약 대신들이 계속해서 왕세손의 대리청정을 반대할 경우 아예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말한 기록이 있다.("만약 이 하교를 따르지 않을라치면 전위(傳位)하는 하교를 내리겠다.”)

따라서 조선왕조에서의 대리청정은 양위가 아니었고, 황태자도 이런 고종의 의중을 정확히 읽었다. 그래서 대리청정 조칙을 취소해달라는 상소를 올렸다.

"정사와 기무(機務)가 어떤 모양인 줄 살피지 못해 막연하기만 한데 천만 뜻밖에
정사를 대리하라는 칙령
을 받들게 되었습니다. "

"소자는 나이가 비록 한창 때지만 어리석음이 아이 때와 다름이 없으니, 어떻게 복잡한 정사를 대리할 수 있겠습니까?
--'고종실록' 고종 44년(1907년, 대한 광무 11년) 7월 19일, 첫번째와 두번째 상소 부분

"장례원 경(掌禮院卿) 박용대(朴容大)가 아뢰기를,
태자가 정사를 대리할 길일(吉日)은 언제쯤으로 잡을까요?”
하니, 비준하기를, “오늘 거행하라.”하였다.
--'고종실록' 고종 44년(1907년, 대한 광무 11년) 7월 19일

당시 고종과 황태자 그리고 측근 대신 박용대는 조칙이 '대리청정'임을 계속 강조했다. 

 

'대리청정'과 '권정례'는 일본과 이완용을 비롯한 친일파 대신들의 퇴위 요구에 대한 고종의 반발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고종이 고분고분 하지 않았던 임금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일본 역시 고종이 자신들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임금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강제 합병에 걸림돌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고종을 눈엣 가시처럼 생각하고 있던 중에 헤이그 밀사 사건이 발생하자, 일본은 이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 퇴위' 시킨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고종이 황제의 지위를 유지하는 대리청정을 선언했으니, 1907년 7월 19일 덕수궁 중화전에서 거행되었던 대리청정 의식을 어떻게 불러야할까?
 

그림 왼쪽이 통감 이토 히로부미다.(이 인물이 이토라는 건, 2년 후 안중근 의사에 저격 당했을 때 같은 잡지에 실린 그림을 통해 확인된다.'안중근, 이토를 저격하다' 참조)

 '라 트리부나 일루스트라타(La Tribuna Ilustrata)' 1907년 11월 7일자 1면 
 

       

    '대리청정 의식'에 참가한 이토 히로부미            1909년 안중근 의사에게 응징 당한 이토 히로부미

이토 히로부미는 식이 끝난 후 일본 외무 차관과 총리대신에게 '한제 양위식 거행 건(韓帝讓位式 擧行 件)'(왕전 往電 제76호)이라는 제목으로 외교 전보를 보냈다.
덕수궁 중화전에서 권정례로 양위식을 거행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일본 관료들 사이에서 대리로 한 이 '대리청정' 의식을 양위로 인정할 수 있느냐는 의문이 많았는지, 외무장관은 '한국황제 양위확인(韓國皇帝 讓位確認) 및 양위식(讓位式)에 관한 件'(내전 來電 제846호)이라는 제목으로 일본 정부의 이사관과 부이사관들에게 내부문건을 회람시킨다. '대리청정 조칙은 양위의 의미가 명백하다'라는 내용이었다.

양위식이라면 고종의 대리청정 선언은 역사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는 선언이 되고, 순종이 권정례로 어좌에 앉아 하례를 받는 의식은 즉위식이 된다. '조선의 새 황제 이척 즉위식'이라는 이탈리아 잡지의 그림 설명도 맞는 설명이 된다. 그런데 순종은 약 40일 후인 8월 27일에 즉위식을 했다. 그렇다면 순종은 즉위식을 두번한 것일까?

순종은 일본에 의한 고종의 '강제 퇴위'로 임금이 되었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상황들이 발생했고, 이런 모순은 즉위식이 거행된 8월 27일까지 계속된다.  

'고종실록'은 7월 18일의 "권정례로 거행하라"는 어명이 마지막 기사다. 영조때도 세손인 정조가 대리청정을 한 적이 있지만 '영조실록'은 유지되었다. 그런데 고종은 대리청정임을 밝혔는데도 '고종실록'을 끝내고 '순종실록'을 시작했으니 전례에 맞지 않는 모순이다.  

# 일그러진 절차 끼워 맞추기

조선의 마지막 임금 순종의 시대는 이렇게 억지스럽게 시작되었다.

명을 받들어 대리청정(代理聽政)하였다. 선위(禪位)하였다.

--'순종실록' 순종 즉위년(1907년, 대한 광무(光武) 11년) 7월 19일

'순종실록' 첫번째 기사이다. 고종은 대리청정에 대한 조칙을 내렸을뿐 선위(양위)는 하지 않았는데, 그렇게 기록했다. 훗날 '순종실록'을 편찬할 때 일본의 강압에 의해 '선위'라는 단어를 끼어 넣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부분이다.

이렇게 '양위'를 끼워 넣었다는 정황은 일본 황제의 축하 전보 날자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일본 황제는 7월 19일이 아니라 다음날인 7월 20일에야 "황제를 이어 받은 것에 대해 충심으로 경하한다"라는 내용의 전보를 보냈다. 일본 정부는 통감 이토히로부미의 외교전보를 받은 후, 그의 보고대로 대리청정을 양위로 인정할지에 대한 논의를 하느라 전보를 하루 늦게 보냈을 가능성이 있다.

신하들이 순종에게 '황제'의 칭호를 사용한 것도 7월 19일부터가 아니라 7월 22일부터다. 고종을 '태황제'로 봉존하는 절차를 밟아야 순종을 황제라 부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일그러진 절차를 거꾸로 끼워 맞추는 형국이 계속되었다.  먼저 이완용이 대리청정이 아니라 양위임을 분명히 밝힌다.

내각 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과 법부 대신(法部大臣) 조중응(趙重應)이 아뢰기를,
 

“이번에 왕위를 주고받은 예전(禮典)은 바로 대성인(大聖人)의 정일(精一)한 심법(心法)에 말미암은 것이니... 
-- 순종실록 즉위년(1907) 7월 21일

당시 민심은 흉흉했다. 성난 백성들은 이완용의 집으로 몰려가 불을 질렀다. 친일 대신들은 집에 들어가지 못할 정도라고 당시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은 보도했다. 그래서 내부 대신(內部大臣) 임선준(任善準)은 “도성 안의 민심이 동요하고, 심지어는 대신에게 돌을 던지고 집을 불살라버리는 일이 날마다 발생" 한다며 서울의 치안을 담당한 한성부윤을 해임하라는 건의를 했다.(실록 7월 21일)

이런 와중에서도 친일대신들은 순종을 확실한 황제로 만드는 작업을 계속 추진한다.

이제부터 조서, 칙서, 아뢰는 글들에 ‘대리(代理)’라는 칭호는 ‘황제(皇帝)’라는 대호(大號)로 높여 부르는 것이 실로 하늘의 뜻과 백성들의 마음에 부합되므로 신들은 같은 말로 호소합니다.”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대조(大朝)의 처분을 받들어 힘써 따르겠다.” 하였다.
--'순종실록' 순종 즉위년(1907, 광무 11년) 7월 22일

다음 날인 7월 23일에는 '윤비'도 황후로 진봉(進封)했다. 그런데도 순종은 고종때 사용하던 '광무' 를 계속 사용했다. 일본과 친일 대신들은 고종시대의 연호 사용이 훗날 '역사적 약점'이 된다고 생각하고, 새 연호를 사용하게 했다. 

내각 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이 ‘개정할 연호(年號)의 망단자(望單子)를 융희(隆熙)와 태시(太始)를 의정(議定)하였습니다.’라고 상주(上奏)하니, 받든 주권(硃圈)에 융희 두 글자로 하라고 하였다
-- '순종실록' 순종 즉위년(1907, 광무 11년) 8월 2일 (양력)

순종 시대의 연호인 '융희'는 이런 절차를 거친 후 1907년 8월 3일부터 '순종실록'에 사용되었다. 같은 날, 고종이 태황제가 되는 절차가 끝났으니 거처하는 경운궁의 이름도 바뀌어야 한다며 덕수궁으로 바꿨다.

일본과 친일파 대신들은 '일그러진 절치 끼워 맞추기'의 마지막 절차인 즉위식 날자를 8월 27일로 정한다. 그리고 장소는, 대리청정 의식을 권정례로 거행했던 덕수궁 중화전이 아니라 외국 외교사절들을 접견하는 장소인 돈덕전으로 정했다.

돈덕전(惇德殿)
에 나아가 황제의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축하를 받고 대사령(大赦令)을 반포하고 조문(詔文)을 반포하였다. --중략 --
아! 짐이 깊이 생각해보건대 임금 노릇하는 것만 어려울 뿐 아니라 신하 노릇하기도 어렵다. 이완용(李完用)은 총리(總理)이니, 너의 부하들을 통솔하고 경계하여 그대의 임금을 인도하되, 조금이라도 바르지 않게 인도하지 말라
.
--'순종실록' 즉위년(1907, 대한 융희 1년) 8월 27일

순종은 이왕 외에 각부 대신들의 이름을 거명하며 "나라만 생각하라"고 당부한 후, 육군과 해군을 통솔하는 황제의 상징인 대원수복으로 갈아 입고 어좌에 앉았다. 
 


 

 

김은호 <순종황제어진 초본>, 종이에 수묵초본, 60 x 45.7cm, 1923,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김은호가 그린 순종의 어진은 완성본은 남아있지 않고 초본만 남아 있다. 1912년,1923년, 1923`28년사이에 1번 총세번 순종어진을 그렸다. 오른쪽 그림은 나이가 들어보이는 것으로 봐서 가장 나중에 그린 것인 듯하다 김은호는 일본화풍의영향을 받아 기존 하눅화와는 다른 느낌을 준다



조선시대와 대한제국 시절 임금의 행사를 기록한 <일성록>에는 즉위식 광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돈덕전에 나아가 즉위한 뒤, 진하(進賀)를 받고 조문(詔文)을 반포하였다.'

대례복을 갖추고 나아가 탑(평어좌)에 앉았다. 총리대신(이완용)이 표문을 둔 책상 앞에 나아가 하례 표문을 낭독하였고 끝나자 연주가 시작되었다. 대원수 정복으로 갈아입고 나아가 어좌에 앉자 연주가 끝났다.

통감(이토 히로부미)이 하례사를 낭독하고 외국영사관 총대표가 하례사를 낭독하고 총리대신이 탑전에 나아가 북쪽을 향하고 서자 애국가가 연주되었다. 애국가 연주가 끝나고 총리대신이 손을 모아 이마에 대고 만세 삼창을 하자 문무백관도 일제히 따라서 삼창을 하였다.
--<일성록> 1907년 8월 27일 (한국고전번역원 오세옥 연구원 번역)

'대리청정'과 '대리 양위' 를 앞세운 고종과 순종의 '항거'는 이렇게 끝났다. 미국의 재야사학자 캐롤 쇼 여사에 의해 발굴된 삽화 그림은 당시 고종과 순종의 절박한 마음을 보여주는 귀한 자료고, 그래서 역사적 가치가 크다.

 

 

우리나라 '마지막 황제' 미공개 사진 나왔다

 

8월 27일 순종 즉위 100주년- 의친왕 손자 이혜원 씨 개인 소장 자료 공개
황성신문·대한매일신보에 즉위식 기사 실려… 실질적 재임 3년, 열차로 부산· 함흥 등 순행

 

 

 

제복을 갖춰 입은 순종

 

비운의 조선 마지막 황제 순종이 짧은 재위 기간 전국을 순행하던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들이 최초로 공개됐다. 본지가 순종 즉위 100주년(8월27일)을 맞아 국립고궁박물관 이혜원(52) 연구원에게서 단독 입수한 사진들은 순종이 일제 강압을 받던 어려운 환경에서도 국정에 역투했음을 시사한다. 이혜원 연구원은 순종의 동생인 의친왕의 손자로 이번에 공개한 사진은 그가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자료다.

 

1910년 한일합병조약 이후 일본은 대한제국 황실을 일본 천황가의 하부단위로 격하시키고 순종을 ‘창덕궁 이왕(李王)’으로 낮추었다. 일본인들이 말하는 이른바 ‘이왕직체제’다. 때문에 순종이 실질적으로 국왕 역할을 한 시기는 즉위한 1907년부터 1910년까지 3년에 불과하다.

 

사료에 따르면 이 짧은 기간 순종은 주로 열차를 이용해 전국을 순행했다. 일종의 민정시찰이었던 것. 순종의 전국 순행에는 부산도 포함됐고, 부산에 기항한 일본군함에 올라가 선내를 둘러봤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연구원은 “순종의 전국 순행 때, 일본이 자국 군함을 부산항에 띄운 것은 자신들의 군사적 파워를 순종에게 과시하기 위한 것”이라며 “순종이 일본천황에게 ‘귀국에서 보내주신 함대 잘 관람했다’는 내용의 전보를 보냈고 천황에게서 답신이 왔다는 기록이 실록에 실려 있다”고 설명했다.

 

순종의 순행은 개성, 의주, 함흥으로 이어졌다. 순종은 함흥에 들러 조선 창업기 태조의 즉위식이 거행됐던 함흥본궁(咸興本宮)도 둘러본다.

 

100년전 순종의 즉위식을 전한 당시 신문기사도 이번에 발견됐다. 황성신문은 1907년 8월 27일자 논설란에 황제 즉위를 축하하는 내용의 사설을, 대한매일신보는 8월 29일자 잡보란에 돈덕전에서 즉위식 거행 기사를 다룬 것이 영인본을 통해 확인됐다.

 

사실 순종의 황제 즉위식과 관련해서는 지금껏 많은 미스터리가 남아있다.

 

 

순종이 부산에서 일본 군함을 시찰 할 때 모습. 일제는 순종이 부산에 도착하자 일본에서 들여온 군함 선상에서 만찬 축하연을 열었다

 

즉위식 사진조차 아직까지 국내에서 발견된 적이 없다. 당시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고종이 강제 폐위된 뒤 순종의 즉위를 결정한 터라 순종은 즉위를 완강히 거부했다고 알려진다. 즉위식 관련 사료가 많지 않은 이유를 추정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순종이 덕수궁 돈덕전에서 황제 즉위식을 했으며 순명비 민 씨(순종의 비(妃)로 순종 즉위 전 사망)를 순명효황후로 책봉했다는 정도로 다루어져 있다.

 

일각에서는 순종이 왕위 계승을 완강히 거부해 대리인이 즉위식을 했다는 주장도 있다. 이탈리아 잡지 ‘라 트리부나 일루스트라타’는 1907년 8월 4일자 1면 표지에 순종황제 즉위식 그림을 실었다(음력 기준 7월 20일에 즉위식 거행). 그림에는 순종황제 대신 어좌(御座)에 다른 대리인이 앉아있는 것으로 나타나있다. 당시 일제가 병력을 동원해 대리 즉위식을 강제 연출했다는 관측이다.

 

 

함흥 시찰 출발 때 모습. 순종은 함흥 본궁에 들 러 태조의 즉위 장소를 둘러봤다.

 

이 연구원은 “아버지인 고종이 살아 있지만 일본에 의해 강제 폐위되고 왕좌를 물려 받은 거라 대리인이 즉위식을 대행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견해를 보였다.

 

1910년 한일협약이 체결되고 창덕궁으로 간 순종은 이때부터 ‘은신의 세월’을 보낸다. 1926년 4월 25일 승하한 순종은 6월 10일 창덕궁 희정당에서 장례식을 치른 후, 경기도 유름에 순명효황후와 합폄(합장)했다.

 

당시 순종 장례식은 우리나라 국장으로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공식행사에서 일본의 국장 제도를 그대로 따랐다. 출상(궁 밖으로 나와서 장지까지 가는 길)은 우리나라의 예를 따르도록 일본이 묵인해줬다고 한다. 이를 ‘반차행렬’이라고 부른다.

 

“지금 한 병이 침중하니 일언을 하지 않고 죽으면 짐은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리라. 이 조칙을 중외에 선포하여 내가 최애최경하는 백성으로 하여금 병합이 내가 한 것이 아닌 것을 효연히 알게 하면 이전의 소위 병합 인준과 양국의 조칙은 스스로 과거에 돌아가고 말 것이리라. 여러분이여 노력하여 광복하라.”

 

 

1907년 8월 27일자 황성신문(왼쪽)과 8월 29일자 대한매일신보 국한문 혼용판. 황성신문의 경우 논설란에 순종 즉위 축하 내용을 실었고, 대한매일신보는 2면인'잡보'란에 즉위에 관한 간단한 소식을 게재했다.

 

순종의 이 유언을 들은 것일까? 장례식을 마친 순종의 인산행렬이 창덕궁 돈화문을 나서 단성사 앞을 지날 때였다.

중앙고등보통학교, 중동학교의 대표자 박용규, 곽대형, 이광호, 이선호 등이 주도해 사림고보생 2만 4,000명을 동원해 태극기를 제작, 배포했다. 6.10만세 운동의 시작이다. 만세운동은 을지로, 종로 3가, 동대문, 청량리로 퍼져나갔다. 인산일 하루 동안 체포된 학생은 1천명에 달했다.

 

순정효황후의 가례식 사진도 공개

 

 

 

이혜원 연구원은 순정효황후의 가례식 사진도 함께 공개했다. 순정효황후는 순명효황후 이후 책봉된 순종의 계비(繼妃)다. 1906년 동궁 계비가 되었다가 1907년 황태자비로 책봉됐고 순종이 즉위하면서 황후가 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1910년 국권이 강탈될 때 병풍 뒤에서 어전회의를 엿듣고 있다가 친일파들이 순종에게 합방조약에 날인할 것을 강요하므로 이를 저지하고자 치마 속에 옥새를 감추고 내놓지 않았다고 한다.

 

일본인이라도 황후의 속치마를 볼 수는 없는 일. 이를 지켜본 숙부인 윤덕영에게 강제로 빼앗겼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