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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이후 62년 화폐개혁전 대한민국 화폐

문성식 2019. 1. 6. 05:09

 

광복이후 62년 화폐개혁전 대한민국 화폐

1. 대한민국 정부의 조선은행권
 해방이 되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15일에 우리나라의 국호는 조선에서 대한민국으로 변경되었다. 일반적으로 국호와 함께 중앙은행 명칭도 변경되는 것이 대부분 국가에서 관례이지만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나라는 당시 재무부에 중앙은행 설립을 추진하려는 연구가 있었지만 실현되지는 못한 채 조선은행이라는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한국전쟁이 발발되기 전까지 화폐는 1949년 9월1일 태어난 독립문이 도안된 10원권과 5원권이 있으며 이 외에 보조 화폐로서 1949년 11월15일 태어나 50전, 10전, 5전 등 세종류의 지폐가 새롭게 등장했을 뿐이다. 이 시기에는 이들 5종류의 화폐이외에도 구조선은행권과 일본정부의 소액보조 화폐등도 1950년 6월 한국은행이 설립되면서도 한국은행 법에 따라 대한민국 법화로서 지위를 누리며 통용되었다. 독립문 10권과 5원권은 기존의 조선은행권과 달리 종이의 지질이 상당히 고급스럽다.

 2. 대한민국 정부의 조선은행권 소액지폐
우리나라 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15일부터 한국전쟁이 발발한 2년도 채 안되는 기간 중에 태어난 5종류의 지폐중에서 소액 은행권이 세 종류있다. 이 지폐역시 대한민국이라는 국호가 아닌 조선은행 이라고 표기된 채 발행된 비운의 지폐라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정부의 중앙은행 법이 정비가 되지 않아 종전과 같이 한국은행이 아닌 조선은행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조선은행에서 한국은행으로 명칭변경이 늦어진 것은 중앙은행 설립과 관련하여 당시 재무부에서는 미 연방 준비제도 이사회에 자문을 구하였고 자문에 응하기 위해 뉴욕연방 준비 은행의 불름필드 박사등 일행이 한국의 금융과 경제 상황을 조사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앙은행으로서 한국은행법에 의한 한국은행이 업무를 개시한 뒤에도 한국은행에서 발행한 것과 같이 법화로서 효력을 인정한다고 간주되어 유통되었다. 이 지폐는 해방이 되고 다양하고 무분별한 화폐제도를 개선시키기 위해 발행 되었지만 이듬해 한국전쟁으로 인해 그다지 유통되지는 못했다.

 3. 한국은행의 설립과 최초의 한국은행권 탄생
조선은행에서 한국은행으로 설립을 변경하여 중앙은행으로서의 기능을 찾고 통화가치 안정 등 산적한 금융과 경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재무부에서 초빙한 미국의 금융이론 전문가 및 실무자들이 1949년 9월초에 한국을 찾았다. 전문가들이 한국의 금융제도와 경제 상황을 면밀히 조사, 분석한 결과를 토대로 재무부에서는 1950년 2월4일 한국은행법안을 정부에 제출하였다. 한국은행법은 1950년 5월5일 국회의 동의를 얻어 법률 제 103조에 의해 재정 공포되었다. 근대적 화폐가 발행된 지 반세기 만의 쾌거였다. 조선은행과 한국은행간의 업무 승계로서 구체제의 화폐를 새롭게 태어난 한국은행에서 동일하게 법화로서 효력이 인정되었지만 1950년 6월12일 불과 13일 후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대구로 피난 간 한국은행은 1950년 8월17일 최초의 한국은행권으로 1000원권과 100원권 두 종류를 발행하였다. 하지만 인쇄를 담당하는 조선서적 인쇄 주식회사가 전쟁으로 파괴되었기 때문에 연합군 사령부의 협조로 급히 일본으로부터 두 종류의 지폐를 제작하여 미군 군용기로 운송하여 발행하였다. 최초의 한국은행권 이지만 일본에서 제조되어 다소 자주성이 희박한 불행을 안고 있다. 1000원권은 기호가 500번 까지는 일본에서 제조되었으며 500번 이후의 기호는 한국에서 인쇄된 것이다. 화폐단위로는 조선은행 시대에 사용된 원단위를 그대로 계승하였다.

 4. 한국은행 좌이박지폐 시리즈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북한군이 남한으로 진군하면서 각종 보잘 것 없었던 국가기관 시설 파괴는 물론 경제를 교란시킬 목적으로 탈취한 화폐를 남발시켰다. 이런 폐단과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1950년 8월26일 긴급명령 제10호인 “조선은행권의 유통 및 교환의 관한 건”을 발표함으로써 조선은행권의 법적인 지위를 없애버려 통용을 금지시켰다. 이것이 최초의 화폐개혁이었다. 일차적으로 worker line을 구축하여 서울, 경기, 강원도를 대상으로 신구 화폐교환이 이루어 졌으며 점차 전국으로 확대 시켰다. 이 시기에 발행된 지폐가 좌이박 1000원 및 500원권 일명 좌이박 지폐 시리즈가 발행 되었는데 이유는 물품거래의 편의를 위해 1000원권 외에 남색개통의 500원권의 추가로 발행되었다. 이때까지도 화폐의 유통량이 98%까지 대량으로 유통되던 조선은행권 100원을 제외한 중,소액권의 지폐는 이때까지도 한국은행권과 함께 사용되었다.


 5. 제 2차 화폐개혁의 시기의 화폐 (미국에서 제조된 거북선 지폐시리즈)
한국전쟁이 휴전협정 체제로 움직이고 있었고 전쟁의 피해를 지원하기 위한 우방국들의 지원에 힘입어 경제 구조가 호전되고 있었다. 이와 같은 국내 정세는 국민들의 구매력을 높아지게 하였으며 또한 정부에서는 경제 산업 활동 및 금융제도를 안정을 기반으로 한 시책으로 추진하고 국민들의 높아진 구매력을 다소나마 억제시키기 위하여 1953년 2월에 제2차 긴급통화 조치와 금융조치를 전격 시행 하였다. 이 조치의 중요한 부분을 크게 세가지로 요약하면
첫째. 1953년 2월17일부터 원표시의 한국은행권, 전표시의 조선은행권 및 일본정부 발행의 모든 화폐는 유통을 완전히 금지시킨다.
둘째. 화폐표기 단위는 원에서 환으로 변경시킨다.
셋째. 모든 금융거래는 100;1로 절하하여 시행한다.
이때 발행된 지폐는 모두 5종류로 1환, 5환, 10환, 100환, 1000환으로 거북선을 도안으로 전량 미국조폐창에 의뢰하여 제조 되었지만 전면의 화폐단위는 한자로 환 이지만 뒷면은 한글로 원표시로 되어있다. 신뢰성을 중시하는 한 국가의 지폐로서 치명타가 아닐 수 없었다. 또한 거북선 도안도 전문가의 고증을 거치치 않고 역사적 사실에 근접하지 못한 일반 민화수준의 거북선이다. 이들은 미리 미국에서 인쇄시켜 놓았기 때문에 원 표시와 환 표시의 이중성이 그다지 신뢰성을 주지 못해 보인다.

 6. 신체제 환표시 은행권
1953년 제2차 긴급통화조치시 한국은행은 미국에 의뢰하여 제조된 지폐를 국내에서 제조된 지폐로 대체하여 유통시키고자 1953년 3월 7일 신체제 10원과 1953년 12월 18일 신체제 100원권을 한국조폐공사에서 제조토록 하였다.
이때 제조된 두 종류의 은행권은 미국에서 수입한 노란색 인쇄용지를 사용했다. 수집가들 사이에서는 황색지 지폐라 불리는데 잠시동안 발행된 후 몇 개월 후 국산 백지를 사용하여 계속 발행되었다.
신체제 10환 황색지와 신체제 100환 황색지는 인쇄용지 품질이 뛰어나고 단기간에 생산되었기 때문에 희소도가 높아 수집인기가 높으며, 신체제 100환의 경우 기호가 {1}부터 {5}까지 인쇄된 것이 황색지로 분류되며 일반적으로 신체제 지폐와 국산백지로 발행된 지폐는 육안으로 쉽게 구별된다.

 7. 환권 체제정비와 우이박 지폐시리즈
한국은행에서는 경제활동의 다양화 및 금융과 물품거래의 융통성을 원활히하기 위해 1000환권 고액권과 100환권 지폐 사이의 중간단계인 500환권의 필요성을 느끼고 1956년 3월 26일 지폐 중앙에 이승만박사를 도안한 500환권을 발행하였다. 수집가들 사이에서는 일명, 중앙이박이라 불린다.
이어서 미국에서 제조된 거북선 100환권을 순수 국내에서 인쇄된 화폐로 유통시키고자 우측에 이승만박사를 도안소재로 한 신1000원권을 발행하는 등 국내??? 지폐제조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렇게 하므로서 거북선이 도안된 5종류 중 1환권과 5환권을 제외한 지폐가 전부 국산지폐로 대체되었다.
이후 소규모 화폐유통을 원활히 하기 위해서 1958년 8월 15일 광복절을 기해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산물인 독립문도안을 주제로 50환권 지폐가 발행되었다. 독립문이 도안된 50환권지폐는 주로 인물위주의 지폐에 익숙했던 수집가들 사이에 인물이 아닌 독립문이 삽입되었고 유통기간이 짧았던 관계로 인기가 상당히 높다.
특히 지폐중앙에 이승만대통령이 도안된 500환권은 당시의 정치 및 사회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반영하고 있어 웃지 못할 일화로 유명하다.
이승만대통령이 지폐중앙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지폐가 접혀졌을 때 얼굴이 접히고 이러 인해 대통령을 경멸한다하여 지폐제조를 중단시키고 1958년 8월 15일 도안을 우측으로 변경한 신500환권이 발행되었던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또한 1953년에 발행된 100환권도 도안의 위치를 약간 변경하여 우측에 이승만대통령의 모습을 도안한 게100환권을 1957년에 발행하였다. 공교롭게도 당시의 3종류의 지폐는 우측에 이승만대통령의 도안이 있다하여 우이박지폐시리즈로 불리고 있다.

 8. 정치격변기의 한글표시 환권지폐
자유당의 이승만 대통령 정권이 자행한 1960년 3.15 부정선거는 4.19혁명이 일어나는 빌미를 주었고 이 시대의 정치적 불안정은 경제질서 및 물가불안정으로 이어졌다. 당시 정부는 이러한 혼란한 정세에서 국면전환을 탈피하고 경제질서를 안정시키기 위해 1960년 8월 15일 세종대왕이 도안된 1000환권을 발행하였고 이듬해 4월 19일에는 세종대왕 500환권을 발행하였다.
기존의 지폐가 이승만 대통령이 도안된 지폐일색이었던 것에 비해 모든 국민의 존경을 받던 세종대왕을 지폐도안으로 채택하므로서 국면전환을 시도하였고,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였기 때문에 지폐의 모든 글자도 한자에서 한글로 변경하여 국민에게 친근감을 심는데 노력하였다.
또한 1962년 5월 16일 발행된 100원권 지폐는 경제발전을 하기 위해 떨어진 국민의 저축율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어머니와 아들이 저축통장을 들고 있는 도안으로 제조하였으나 일부에서는 영부인과 영식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던 지폐이다. 그러나 이 지폐는 제3차 화폐개혁으로 태어난 지 24일만에 유통이 금지되어 한국화폐사상 가장 단명지폐로 기록된다.
 
 
1962년 이후 대한민국 화폐
▣ 대한민국시대
 1. 영국에서 제조된 원권지폐

 정부에서는 국민의 건전한 경제질서를 확립하고 지하에 숨겨진 자금을 양성화하여 경제발전에 이용할 목적으로 제3차 화폐개혁을 1962년 6월 10일 전격 실시하였다.

이 시기의 화폐개혁에서는 화폐단위가 환에서 원으로 변경되었으며 단지 소액거래의 교환을 위해 50환권 및 10환권 주화만 유통을 허가하였다.

환가비율로 10환대 1원의 비율로 변경되었다. 종전의 환표시 지폐는 유통이 금지되고 지하자금으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도움이 되고자 화폐개혁을 단행했으나 목적달성에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것이 후대의 평론이다.

화폐개혁을 극비리에 추진하기 위해 국제적으로 유명한 화폐전문제조회사인 영국의 토마스 데라루(Thomas De La Rue Co)사에 의뢰하여 비밀리에 도입되어 1962년 6월 10일부터 유통시켰다.
1원부터 50원까지는 평판인쇄로 발행되었지만 고액권인 100원과 500원은 요판으로 인쇄되어 있다. 그리고 500원권은 위조방지를 위해 은선(隱線)이 삽입된 특수용지를 사용하였고 100원권부터 1원권까지 하위지폐는 色絲를 삽입하여 위조에 대비하였다.

이중에서 총석정이 도안된 50원권은 바탕색이 붉은계통의 색상으로 도안소재도 인물이 아닌 자연경관인 총석정을 도안소재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고액권 지폐보다 가격도 월등할 뿐만 아니라 수집인기가 상당히 높아 지금도 많은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2. 영국제조 지폐에서 국산지폐로 대체

한국은행에서는 과거에도 그랬듯이 제2차 화폐개혁 때 시도하였던 것과 동일하게 외국에서 제조된 지폐를 국내에서 제조된 지폐로 대체하는 사업에 착수하였다. 그 첫 작품으로 저액권지폐중 사용빈ㅇ도가 제일 많은 10원권에 첨성대를 도안소재로 채택하여 1962년 9월 2일 발행하였다. 특이한 점은 이 때부터 한국은행 인장이 한글로 바뀌어 명실상부하게 화폐에 사용되는 모든 글자는 한글로 변경되었다. 과거에도 모자상이나 세종대왕 1000환 및 500환권이 한글표시가 되었지만 인장만큼은 한자로 되어 있었다.

이어서 1962년 11월 1일 앞면에 독립문과 뒷면에 경회루를 도안으로 하고 크기는 영국에서 제조된 100원권과 동일한 지폐가 태어났다.

또한 소액물품거래 및 수소점이 발생되는 금전거래의 처리를 돕기 위해 10전과 50전 지폐가 1962년 12월 1일 발행되었지만 그다지 활용되지 못하고 1980년 발행이 중지 되었다.
이렇게 하므로서 영국애ㅔ서 태어난 6개 권종은 2종류 지폐를 국내산으로 대체하고 액면종류도 2종류가 증가하여 8개권종으로 세분화되어 국민의 경제활동 및 거래에 도움을 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부터 국내의 지폐제조기술은 진일보하는 발판을 마련하는데 요판인쇄에 의해 순수 국산지폐를 생산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화폐제조기술의 획기적인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또한 지폐에 삽입하는 도안의 소재도 다양해 졌다는데 커다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과거에는 환권체제의 지폐에서는 대부분 이승만대통령이 도안되거나 아니면 미국과 영국 등에서 제조된 지폐는 우리의 정서와는 약간 거리감이 있는 분위기 였다. 그러나 국내에서 제조되면서 우리나라의 역사와 자주성에 근본을 두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3. 요판인쇄기술의 지폐

한국은행은 우리나라 화폐사의 숙원이자 현대사회의 부응에 따라 그 동안 숙원사업이던 요판인쇄기를 도입하였다. 요판인쇄는 특수인쇄방식으로 서 이미 선진국에서는 수십년전부터 요판인쇄로 지폐를 제조하였던 기술로서 인쇄하고자 하는 선이나 글자부분의 음각부분에 잉크를 채워 넣고 인쇄압력을 가하는 방식으로 인쇄가 끝난 지폐부분이 돌출되어 손으로 만지면 질감이 느껴지는 독특한 인쇄기술이다.

첫 번째 작품으로 기존의 경회루가 도안된 100원권 지폐대신 세종대왕을 도안의 소재로 한 100원권을 1965년 8월 14일에 제조하고 뒷면에는 사적지로 지정된 지금의 한국은행 본관 전경을 평판으로 발행하였다. 이어서 1966년 8월 16일에는 요판인쇄기술을 진일보시켜 앞면과 뒷면을 요판으로 인쇄한 남대문 도안의 500원권을 발행하였다. 그리고 1969년 3월 21일에는 저액권 50원 지폐에 팔각정을 도안하여 발행하였는데 이 때는 고액권이 아닌 관계로 평판으로 인쇄하여 영국에서 제조된 50원권과 대체하기 시작했다.


 4. 고도성장기의 고액화폐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박정희 정권이 추진하던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본궤도에 접어들어 점차 탄력을 받게 되자 자연히 경제규모가 커지면서 고액권 발행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한편

 

1970년 100원권 주화 발행으로 소액거래에 대한 화폐의 역할이 세종대왕 100원권 지폐에서 동전으로 대체되는 등 화폐의 개념이 점차 바뀌어 갔다. 한국은행에서는 이러한 사회 경제적 현실에 부응하여 10000원권 지폐를 발행하기 위해 신문에 공고까지 냈으나 10000원권 도안이 석굴암과 불국사를 도안해서 특정종교를 두둔한다는 이유로 종교단체의 저항에 부딪쳐 1963년 6월 12일 세종대왕을 소재로 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고액 10000원권이 탄생되었다.

또한 5000원권은 1972년 7월 1일 발행하였으나 도안의 소재인 율곡 이이의 초상에서 동양인이 아닌 서양인의 이목구비와 같다는 파문이 일어 이후부터는 표준영정을 정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당시 5000원권이 서양인을 닮은 이유는 인쇄원판을 영국의 토마스 데라루사에 의뢰해서 크게 검증 없이 외국인의 의해서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1973년 9월 1일에는 종전의 남대문 500원권이 전체적인 색상이 흑색이어서 복사하기 용이하다는 우려 때문에 다양한 색상으로 교체된 이순신 500원권이 발행되었다.


 5. 국산용지와 표준영정을 채택한 지폐

한국은행에서는 그 동안 도안의 소재문제로 논란이 있었던 것을 계기로 도안에 대한 표준 영정을 정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러한 결과 1977년 6월 1일 새로운 5000원권이 탄생되고 1979년 6월 15일에는 새롭게 변경된 10000우너권이 발행되었다. 이 두종류 지폐에 사용된 인쇄용지는 종래까지 영국에서 사용되던 용지대신에 은화가 삽입된 구???산용지로 대체하여 국산용지의 고품질을 증명하였다. 국산용지는 내구성이 월등하고 인쇄방식에 적합하여 점차 국산용지로 대체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와는 별도로 도안에 사용되는 영정은 정부의 엄격한 심의를 거쳐 제조되었기 때문에 이후부터는 영정에 대한 시비는 상당히 줄어들게 되었다.


6. 화폐체제를 정비한 지폐

한국은행은 금융통화위원회의 의결에 따라 1982년 1월 21일 대대적으로 화폐체제를 정비하였다. 종전까지 사용하던 지폐가 크기가 커서 휴대하기 불편하였으며, 국제적으로도 소형화 추세에 따라 이를 수용하기로 하였다.

변경된 특징은 도안은 지폐에 대한 국민의 공감대가 형성되도록 변경없이 인물도안을 그대로 채택하였다. 이외에 인쇄용지의 고품질로 지폐의 사용기간을 늘리고 시각장애인도 지폐의 권종을 쉽게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점자를 삽입하였다.

또한 자판기 및 은행의 ATM기 등에서 쉽게 감별하도록 전자감응요소를 넣는 등 지폐 체제 혁신에 주안점을 두었다.


 7. 위조방지강화와 저작권의 화폐

한국은행은 날로 정교해져 가고 첨단장비로 위조 및 변조지폐가 유통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이에 대한 방지책으로 다양한 방법을 강구한 지폐를 선보였다.

우선 1994년 1월 20일 10000원권을 발행하면서 은화부분을 복사할 경우 팔랑개비형태의 모습이 나오도록 강화하는 한편 부분 은선을 삽입하기도 하였다.

또한 화폐제조가 하나의 예술성을 가진 작품으로서 이에 대한 저작권을 표시하기 위해 2000년 6월 19일에 10000원권을 그리고 2002년 6월 12일에 5000원권을 발행하므로서 화폐의 도안에 대한 지적재산권을 강화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