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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황실-고중황제 2

문성식 2019. 1. 6. 05:37


대한제국 황실-고중황제 2

 


[1897] 고종황제 즉위식 축하행렬

                       

 

      권오창 화백의 명성황후 영정

 

 

준명전의 고종과 대신들    

               

  

을미사변 1년전의 일본 신양당 출판사의 서적에 실린 명성황후 석판화

 

 

이태리 공사 칼르로가 꼬레아 꼬레아니와 헐버트가 대한제국멸망사에서 명성황후로 소개한 사진. 최근까지 명성황후로 오해됐던  ’정장한 궁중 여인’이라는 제목을 달았던 이 사진은 본래 1895년 2월 일본에서 발행된 ’전국(戰國)사진화보’에 ’조선궁녀’로 소개되는 등 당초부터 궁중 여인임이 밝혀져 있었다고 한다. 

  

위에 사진이 실린 미국 신문 사진 그러나 헐버트는 한국견문기에서는 궁녀라고 했다

 

 

독일인이 명성황후로 소개한 사진 궁녀로 추정

 

 

 

 이승만이 옥중에서 집필해 1910년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간행된 '독립정신'에서 '명성황후'라고 소개된 초상. 이초상이 명성황후의 사진으로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주목할 가치가 있다고 주장이 있다.  물론 같은 초상이 1927년 사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장도빈의 저서 '대원군과 명성황후'에도 명성황후라는 설명과 함께 실렸으나 책은 발매 직후 종적을 감추고 출판사의 ’전체 출판목록’에서도 빠진 점으로 미뤄 조선총독부의 통제를 받은 것이 확실하다는 것이다.

 

이승만이 옥중에서 집필해 1910년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간행된 '독립정신'에 명성황후라고 실린 사진과 인상착의와 옷 주름 등이 같은 '규중(閨中)에 숨은 고운 각시' 사진. 1935년 조선일보 신년특집호에 실렸다. 물론 이 사진을 두고 사학자 문일평이 “살아있던 명성황후의 상궁들을 찾아가 확인했더니 한결같이 부인했다”고 부정적으로 논평한 바 있지만 “명성황후와 한 세대 정도가 차이 나는 문일평의 말만으로는 이 초상을 명성황후가 아니라고 단정하기 어렵다는 주장이 있다. 명성황후를 직접 보았을 박영효나 윤치호, 한규설, 김종한, 김가진 등은 ’독립정신’이 간행된 이후 상당기간 생존해 있었으므로 이들이 ’독립정신’ 게재 초상에 대해 언급한 것을 찾는 것이 우선이라고 주장이 있다.

  

 명성황후 옥쇄

 

  

고종황제의 어차

 

 


덕수궁 대한문 앞 고종임금 행차모습



 


  

       황실 시진  영친왕 순종황제 (순원효황후순종의 윤황후) 덕혜옹주

 

 

 

 참배후 함녕전을 나서는 고종

 

 

 

황실 모습 의친왕 이강공 순종 , 영친왕 고종,순원효황후,양귀비,덕혜옹주

 

 

 아관 파천시 황제와 황태자 침실 황제는 더블 황태자는 싱글 침대와 간편한 응접세트만 있다

 

 

 

명성황후 국장 추정 사진 - 러시아 표트르대제 박물관 소장

 

 


  

 

 보스턴 선데이포스트지에 브라운양과 고종의 결혼기사 1903.11.2자 기사

 

 

 

고종황제의 행차 영국인의 책에 수록

 

 

  퇴위후 고종이 일본인 관리들과 함께하는 초라한 행차

 


국화장 일본황족이 패용 고종,순종,영친왕 의친왕등이 패용하였다

 

상복 입은 고종황제
흥선대원군 별세 때 상복을 입은 고종의 모습. 대원군은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운현궁에서 은둔생활을 하다 79세로 별세했다. 대원군은 임종 때 장남 재면을 통해 주상을 만나기를 원했으나 고종은 아버지와의 상면을 거절했다. 대원군이 명성황후 시해를 묵인했다고 여긴 고종은 대원군 빈소에 참배하지 않았다.(18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