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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황실 - 고종황제 1

문성식 2019. 1. 6. 05:26


대한제국 황실 - 고종황제 1

 

 

고종  영정 (황제 즉위 전이라 붉은 곤룡포)

 

 

고종과 세자( 순종)

 

  

                 

 

 

젊은 시절의 고종

 

 

 

 대한제국 고종황제 영정(황룡포)     

       

고종황제(高宗皇帝) 49세때 초상화


고종 황제 초상.


이 그림은 미국인 화가 휴버트 보스(Hubert Vos)가 1898년 그린 그림이다. 보스가 한국을 방문한 기간은 짧았으나, 당시의 정세를 잘 통찰하였고, 그림 속 고종 황제의 불행한 일생과 한국의 불운, 일본의 횡포 및 한국인의 우수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자서전 속에 기록하고 있다. 보스가 그린 자신의 초상을 보고 고종은 사진과 같은 유화의 독특한 느낌을 만족하였다고 전해진다.


"일본인들은 한국 미술의 모든 건축과 유적을 파괴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 미술가들을 포로로서 일본에 끌고가 작품을 만들게 하는 한편 일본인들에게 미술을 가르치도록 했였습니다. 일본 미술은 오늘날까지도 매우 한국적인데.... 제가 그린 민상호의 초상화를 보신 후 황제는 폐하 및 황태자의 실물 크기 전신 초상화를 그리라는 어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저는 제 개인이 소지하기 위해 황제의 전신상 하나를 더 그려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냈습니다. .... 저는 황제로부터의 선물, 그리고 황제와 그 백성들의 장래에 대한 슬픈 예감을 안고 한국을 떠났습니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 황제.


이 초상화는 프랑스 화가 드 라네지에르가 1902년에 그린 것으로 1903년 발간한 [극동의 이미지]에 수록되어 있다. 그는 고종의 인상에 대해 '우아하고 선량하며 성격도 쾌활하며 영리하다'고 적고 있다. 일본이 우리 미술인을 왜국으로 데리고 가서 일인에게 미술을 가르쳤단는 이야기가 제삼국의 화가가 말하고 있다
어쩐지 도양화에서 비슷한 점이 있다. 수묵산수 화조는기법 운치가 한국이 앞 셨고 일본은 채색화가 있다

       

 

고종 황제

 

 

    

 

고종과 순종

 

      


 

황제복 차림의 고종황제(高宗皇帝)

 

   

 

 

 

명성황후 영정 (明成皇后 閔氏 : 1851-1895, 44歳没)

 

              

이승만이 "독립정신"에서 명성황후로 밝힌 사진



진위 논란이 있는 명성황후 사진


       

영친왕의 모후인 슌헌황귀비 엄씨(純献皇貴妃 厳氏 통칭  엄귀비:1854-1911,57歳没)

 


 

명성횡후 뒤를 이은 엄황귀비 (영친왕의 생모)

명성횡후 뒤를 이은 엄황귀비의 양장 모습 (영친왕의 생모)


순헌황귀비 (純獻皇貴妃) [1854 ~ 1911] 향년 58세, 역사책에서 글로만 읽던 엄비사진이다. 민비가 죽은후 엄비가 중전이 되였다.

본관: 영월 ,아버지 : 엄진삼의 맏딸 ,1861년 8세 때 대궐에 입궐, 황귀비(1품) 책봉(1903년) 소생 : 1남 (황태자 은)

1885년 32세 때 고종의 승은을 입었으나 명성황후에 의해 대궐 밖으로 쫓겨났다가 1896년 고종의 명으로 대궐로 다시 입궐하였다. 여성교육에 관심을 가져 내탕금으로 숙명여학교와 진명여학교를 설립하였다. 시호는 순헌, 궁호는 망덕, 원호는 영휘이다. 명성황후의 상궁으로 있다가 고종황제를 모셨고, 이어 왕자 은(영친왕)을 낳았다.1906년에 진명여학교를 설립, 한국 근대교육사업에크게 이바지하였다

 

  

                                    

덕혜옹주의 모후인  양귀비(1882년생)

 

 

 

 양귀비 (1882-1929, 47歳没)

 

귀인 양씨(貴人 梁氏) [1882 ~ 1929] 향년 48세, 고종의 6번째 후궁, 본관 : 충주 , 아버지 : 양언환 ,

1893년 12세 때 대궐에 입궐 , 소생 : 1녀 (덕혜옹주)

 

 

순원황귀비 엄씨와 이토 히로부미 부인과 자녀

 

 

양장 차림의 순원황귀비 엄씨(영친왕 모)

 

 

고종의 어쇄가 찍힌 헐버트에게 보낸 고종의 편지

 

 

고종 황제즉위식때의 대한문 앞 광경

 

 

고종황제 행차 사진

 

 

종묘제례에 참석한 고종

 

이건 영친왕(당시 이왕세자)이 일본에서 귀국하면서 고종황제(당시 이태왕), 순종황제(당시 이왕), 순종황후(당시 이왕비), 덕혜옹주와 더불어 1918년 1월 20일에 덕수궁 석조전에서 일본요리를 시식한 후에 기념 촬영한 사진.

 

 

왼쪽부터 의친왕 이강, 순종, 영친왕, 고종, 순종비,
  의친왕비, 의친왕 장자 이건, 앉아있는 아기 덕혜옹주
*.영친왕(당시 왕세자 이건)의 사진을 조합한 합성사진

 

1919년 집무를 보기 위해 겨울옷을 입고 선원정에서 인정전으로 부축을 받으며 집무실로 향하는 고종황제 (1918년1월 15일 촬영)         


부축을 받으며 집무실로 향하는 고종황제 확대 사진

 

 

일본 관리들이 쓰는 모자와 의상을 입고 궁궐을 나선 고종황제의 어가행열(1918년1월 23일촬영).
*.왕의 행차때 사용하는 일산을 받쳐들고 있지만 어가를 매고 있는
람들은 일본인들이다.





준명당에서 신하들과 기념  촬영
1910년 한일병탄 직후 덕수궁 석조전 앞에서 자리를 함께 한 조선총독부 고위관리들과 황족의 기념촬영 (좌측 영친왕,우측 순종왕1918년1월 23일 촬영) *영친왕 좌측옆은데라우치 초대 조선총독
아관파천 [俄館播遷]을 한 구 러시아공사관 전경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貞洞). 사적 제253호.
 
 
아관파천 [俄館播遷]시 러사아 공사관의 침실 내부 전경
 
 
고종의 어필

영친왕 이은 , 의민황태자(懿愍皇太子) [1897 ~ 1970], 고종의 7번째 아들

1900년 4세 때 '영친왕(英親王)' 책봉 , 1907년 11세 때 '황태자(皇太子)' 책봉 ,

아버지 : 고종(高宗) [1852 ~ 1919], 어머니 : 귀비 엄씨(貴妃 嚴氏) [1854 ~ 1911]

1920년 나시모토 마사코(일본 메이지 국왕 조카)와 결혼, 자녀 : 2남 (진, 황태손 구)

1963년 의민황태자비와 함께 한국에 귀국

영친왕 [英親王, 1897~1970.5.1] , 호 명휘(明暉) , 본명 이은(李垠)
한말의 마지막 황태자로 고종의 일곱째 아들. 이토 히로부미에 의하여 강제로 일본에 끌려가 교육을 받고 일본인 마사토와 정략결혼을 하였다.
고종의 일곱째 아들, 순빈(淳嬪) 엄씨(嚴氏) 소생.


순종황제의 이복동생이다. 1900년 영왕(英王)에 책봉되었다가 1907년(융희 1) 황태자에 책립되었으며 그해 12월 통감(統監)으로 부임해 온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 의하여 11세 때 강제로 일본에 끌려가 교육을 받고 일본 나시모토노미야[梨本宮]의 딸 마사코[方子]와 정략결혼을 강요당하여 비(妃)로 맞았다.


1910년 국권피탈로 융희황제(隆熙皇帝)가 폐위되자 왕세제(王世弟)로 불렸고, 1926년 순종이 승하하자 이왕(李王)이라 하였다. 일본의 육군사관학교 ·육군대학을 졸업하고 육군 중장에 이르렀다.


8 ·15광복 후 일본 왕족의 몰락과 더불어 고난의 세월을 보내다가 1963년 11월 56년 만에 환국을 하였으나 귀국 후 7년여 병상생활을 하다가 한많은 생을 마쳤다. 미망인 방자(方子) 여사는 창덕궁 낙선재(樂善齋)를 지키면서 명휘원(明暉園)을 경영하였다.

덕혜옹주(德惠翁主) [1912 ~ 1989] 향년 78세, 고종(高宗)의 3번째 딸

아버지 : 고종(高宗) 조선 제 26대 왕 [1852 ~ 1918] , 어머니 : 귀인 양씨(貴人 梁氏) [1882 ~ 1929]

결혼 : 1931년 20세 때 소 다케유키와 결혼 , 소생 : 1녀 (소 마사에, 1932년 생)

 

덕혜옹주 [德惠翁主, 1912.5.25~1989.4.21]
1912년 고종의 고명딸로 태어났다. 1925년 일본으로 끌려가 쓰시마섬 도주의 후예인 다케유키와 강제 결혼하였다. 조발성치매증을 앓았는데 결혼 후 병세가 더욱 악화되었다. 이혼, 딸의 자살 등 비극을 겪었으며 1962년 귀국해서도 순탄치 않은 생활 끝에 세상을 떠났다.

1912년 5월 25일 조선 제26대 왕(황제) 고종(高宗)과 후궁인 복녕당(福寧堂) 양귀인(梁貴人) 사이에서 태어났다. 고종의 고명딸로, 여섯 살 때인 1917년 정식으로 황적에 입적하였다. 1919년 일제에게 딸을 빼앗기기 싫었던 고종에 의해 황실의 시종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金章漢)과 약혼하였다.

그러나 1925년 4월 '황족은 일본에서 교육시켜야 한다'는 일제의 요구에 의해 강제로 일본으로 끌려갔다. 이어 일본의 학습원을 마친 뒤, 1930년 봄부터 몽유증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영친왕(英親王)의 거처로 옮겨 치료를 받았다. 증세는 조발성치매증으로 진단되었고, 이듬해 병세는 좋아졌다.

1931년 5월 쓰시마섬[對馬島] 도주의 후예인 백작 소 다케유키[宗武志]와 강제 결혼해 딸 마사에[正惠]를 낳았다. 그러나 결혼 후에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이후 계속 병상생활을 하다가 1953년 다케유키와 이혼하였다. 하나 있는 딸마저도 결혼에 실패하고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하는 비극을 겪었고, 1962년 1월 26일 귀국할 때까지 조선의 마지막 황녀로서 비극으로 일관된 삶을 살았다.

한국에서의 생활도 순탄하지 않아 귀국 20년 만인 1982년이 되어서야 호적이 만들어졌고, 결국 실어증과 지병으로 고생하다 1989년 4월 21일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金谷洞)에 있는 홍유릉(洪裕陵)에 묻혔다.

 

 
 
고종황제 승하후의 제단
 
 
고종황제 국상에 참석한 주요 인사들
 
 
국상에 참여하여 통곡하는 사람들(대한문앞)
 
 
국상에 참석하여 통곡하는 사람들
 
 
고종 장례식때의 의친왕 장남 이건
 
 
대한 문앞을 지나는 국상 행열과 운집한 사람들
 
 
국상 행열과 운집한 사람들
 
 
국상 행열과 운집한 사람들
 
 
고종황제 국상때의 홍릉 입구
 
 
국상 식장의 나인들
 
 
릉 조성후의 홍살문(연대 미상)
 

의친왕비와 이건 황손

의친왕비(義親王妃) [1878 ~ 1964] 향년 87세, 본관 : 연안, 아버지 : 김사준, 1894년 17세 때 의친왕(당시 의화군)과 결혼 , 소생없음.   이건 황손 [1909 ~ 1991] 향년 83세 , 의친왕(義親王)의 맏아들, 수관당 정씨 소생

 

의친왕의 자녀들

의친왕의 자녀들

상단좌측부터: 5남 이택 도련님(황손),1녀 이영 아가씨(황손), 4남 이창 도련님(황손), 3남 이방 도련님(황손)

(하단좌측부터: 6남 이곤 도련님(황손), 2녀 이진 아가씨(황손)

 

의친왕의 자녀들


의친왕 2녀 이진(이해원) 아가씨(황손)


이진(이해원) 아가씨(황손) 당시 19세, 1937년 결혼 ,
의친왕의 2녀 , 현재 경기도 하남시에 살고 계신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