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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62 <東九陵 소재>
사 적 : 제 193 호
健元陵의 특징 조선조(朝鮮朝)의 건국자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1335-1408, 재위7년)의 건원릉은 전형적인 조선조 왕릉의 형식을 갖추고 이후 왕릉의 모범이 되고 있습니다. 북동서 방면 3면(面)의 곡장(曲墻) 안에 단릉(單陵)의 봉분(封墳) 형식으로 봉분 앞 중앙에 상석과 장명등(長明燈)을 설치하고 양 옆에는 한 쌍의 망주석(望柱石)을 두었습니다. 그리고 한 단 아래의 좌우에 문인석(文人石)이 뒤에 석마(石馬)를 대동하고 있고, 그 아래 단에 역시 좌우로 무인석(武人石)이 석마(石馬)를 뒤에 거느리고 있어 왕릉의 위엄을 갖추었습니다. 본래 이와 같은 능의 상설 제도는 고려(高麗) 왕릉 중에서 가장 웅장하고 화려한 공민왕(恭愍王)의 현릉(玄陵)을 기본으로 삼아 설치한 것입니다. 또한 건원릉에는 홍살문(紅살門) 안쪽 정자각 우측 비각(碑閣) 안에 태조의 업적과 명복을 비는 신도비(神道碑)를 함께 세우고 있습니다. 왕릉의 신도비는 태종의 헌릉(獻陵)에도 있습니다.
太祖代의 사료(史料)
연도 |
재위 |
사 료(史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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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
재위 |
사 료(史料) |
1392 |
1년 |
7월, 이성계 개성 수창궁에서 즉위 |
1396 |
5년 |
8월, 신덕황후 승하 |
1393 |
2년 |
2월, 국호 조선(朝鮮)으로 정함 |
1397 |
6년 |
9월, 흥천사(興天寺) 창건 |
1394 |
3년 |
10월, 한양(漢陽)으로 천도(遷都) |
1398 |
7년 |
8월, 1차 왕자의 난 { 정도전,남은 피살 } |
1395 |
4년 |
9월, 경복궁(景福宮) 완성 |
9월, 세자 방과에게 전위(傳位) |
뒷 이야기 : 이자춘{추존 환조}과 부인 최씨{추존 의혜왕후}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난 태조 이성계는 왕위에 오른 후에 국호(國號) 변경, 한양(漢陽) 천도(遷都) 등 새로운 왕조의 변화를 시도했지만 권력의 암투(暗鬪)로 인한 자식들의 분란을 당하자 차남 방과{定宗}에게 양위(讓位)하고 상왕(上王)이 됩니다. 그 후 태종이 즉위하자 태상왕으로 지내다가 74세의 나이로 자식은 모두 8남 5녀를 남기고 창덕궁에서 승하{태종 8년}합니다.
건원릉에는 다른 왕릉과 다르게 봉분에 보라색 꽃을 피우는 억새풀이 무성하게 자라있습니다. 이는 '함흥차사(咸興差使)'로 유명하듯이 고향인 함흥을 그리워하는 이성계에게 함흥에서 자라는 억새풀로 일종의 의복을 해드렸다는 전설이 전합니다. 이성계는 역성혁명(易姓革命){위화도회군}으로 새로운 왕조를 세운 인물이었지만 말년의 생활이 자식들의 피를 보는 불우한 일생을 마친 연민의 정을 느끼게 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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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대 太祖의 신의왕후(神懿王后) - 제릉(齊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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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기도 개성시 판문군 상도리
사 적 : 북한 소재로 사적 미지정
齊陵의 특징 : 태조의 정비(正妃)인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 韓氏:1337-1391)의 능인 제릉은 신의왕후가 조선 개국(開國) 이전에 승하(昇遐)했기에 개성 근처에 단릉(單陵)으로 봉릉(封陵)하고 조선 개국 이후에 추존(追尊)하여 제릉(齊陵)으로 명명했습니다.
신의황후 약사(略史) : 신의황후는 고려 말기 증 영문하부사(贈領門下府事)인 안천부원군(安川府院君) 한경(韓卿)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이성계와의 슬하에 6남{방우, 방과<정종(定宗)>, 방의, 방간, 방원<태종(太宗)>, 방연} 2녀{경신, 경선}를 두고 55세[공양왕 3년]에 승하했습니다. 처음 시호(諡號)는 태조가 즉위한 후 절비(節妃)라 하였고, 정종(定宗) 대에 신의왕후(神懿王后)로 추존되었고 태종 10년에 종묘(宗廟)에 신주를 부묘했습니다. 근세 대한제국 성립후 1899년{고종(高宗): 광무 3년}에 황후(皇后)로 추존되었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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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대 太祖의 계후(繼后) 신덕왕후(神德王后) - 정릉(貞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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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2동 산 87
사 적 : 제 208 호
貞陵의 특징 : 태조의 계비(繼妃)였던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 康氏: ? -1396)의 정릉은 처음 도성(都城) 안 황화방 북원(皇華坊 北原: 현 중구 정동)에 능을 조성하고 원찰(願刹)로 흥천사(興天寺)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태조 승하 후에 태종 이방원은 태조가 계비 강씨의 소생인 방석을 세자로 책봉했었던 일{1차 왕자의 난<1398년>}로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었기에 도성 밖 양주군[현재의 정릉 자리]으로 능을 옮겼습니다. 또한 종묘(宗廟)에 부묘되지 못했고, 세종 즉위년에는 전세(田稅) 5결(結)을 주고 족친(族親)들에게 제사를 맡기기까지 합니다. 그 후 300년 가까이 방치되다가 현종(顯宗) 10년[1669년]에 종묘(宗廟)에 배향되면서 복구되었습니다. 다소 초라한 모습으로 병풍석(屛風石)이나 난간석(欄干石), 무인석(武人石) 등이 없이 다른 왕릉에 비해 규모가 작은 것으로 보아 정릉의 수난의 역사를 알 수 있습니다.
神德王后 약사(略史) : 고려말 권문세가인 판삼사사(判三司事)를 지낸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 강윤성(康允成)의 딸로 태어난 신덕왕후는 이성계와의 젊은 시절 일화로 유명합니다. 이성계가 호랑이 사냥을 하다 목이 말라 우물을 찾았는데, 우물가의 한 여인에게 받은 바가지에 버들잎을 보고 화를 냈다가 이유를 알고 여인의 지혜에 감탄했다고 전해지는 이야기입니다. 슬하에 방번, 방석 2남과 경순공주를 두었는데, 태조의 총애를 받아 조선 건국 후 현비(顯妃)로 책봉되어 조선 최초의 국모(國母)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태종(太宗)의 핍박으로 사후에 무덤이 옮겨져 방치되다가 현종대(顯宗代)에 종묘에 배향되었는데, 제사를 지내는 날 한(恨)을 풀어주는 많은 비가 내려, 이를 신덕왕후의 원한을 씻어주는 비라는 뜻으로 '세원지우(洗寃之雨)'라고 합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가끔 찾는 능이기도 한데, 다소 초라한 모습에서 조선 초대 국모(國母)의 위용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왕릉의 모습보다는 주변에서 운동하는 사람들의 운동공간이 되어버린 상황에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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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문화 사랑 오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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