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궁궐,왕릉 이야기

창덕궁

문성식 2010. 9. 17. 01:02

창덕궁
서울 종로구 臥龍洞
2005.7.13


01. 돈화문....

    보물 제383호. 돈화문으로 통칭된다. 조선 선조(宣祖) 때 건립한 정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重層) 우진각지붕집이다. 중앙의 3칸은 가운데 주열(柱列)에 각각 2짝씩 문짝을 달았으나 좌우 맨 끝의 칸과 측면 앞의 절반은 모두 벽을 쳐서 막았다. 위층은 누마루를 깔고, 4면에 작은 판문(板門)을 돌려 달았으며, 고주(高柱)는 좌우 2개만 있고 가운데는 넓은 공간을 이루고 있다. 다른 문루건축(門樓建築)은 고주를 가운데에 한 줄로 배치하는 일이 보통이지만, 이 돈화문은 그 일부를 생략하여 넓은 공간을 활용하도록 새로운 의도를 나타내었다.

    공포(?包)는 상하층이 모두 내삼출목(內三出目) ·외이출목(外二出目)의 다포집 계통의 것으로 쇠서[牛舌]들의 형태는 아직도 건실한 기풍을 지녔다. 그러나 내부의 살미첨차들은 이미 적지 않게 장식적 요소가 나타나 변형되었다.

    한때 돈화문은 창경궁(昌慶宮)의 명정전(明政殿) 등과 함께 임진왜란의 병화(兵火)를 면한 조선시대 초기의 건축이라 생각되어 왔으나, 명정전은 임진왜란 후에 재건한 건물임이 밝혀졌고 돈화문도 그 세부적인 수법을 서로 비교해 보면 임진왜란 이후의 건축임이 분명하다.

    매표소는 왼쪽에 있다.


    02. 창덕궁

      1405년(태종 5) 완공되었으며, 면적 43만 4877㎡이다. 태종(太宗)이 즉위한 후 1404년(태종 4) 한성(漢城)의 향교동(鄕校洞)에 이궁(離宮)을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 완공하고 창덕궁이라 명명하였다. 그 후 계속 인정전(仁政殿)·선정전(宣政殿)·소덕전(昭德殿)·빈경당(賓慶堂)·여일전(麗日殿)·정월전(淨月殿)·옥화당(玉華堂) 등 많은 전당을 건립하였는데, 1412년 돈화문(敦化門)을 건립하여 궁궐의 면모를 갖추었다.

      이 궁전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는데, 1607년(선조 40)에 그 복구가 시작되어 1610년(광해군 2)에 중건이 거의 끝났으나, 1623년 3월에 인정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전각이 실화로 불탔으므로 1647년(인조 25)에야 그 복구가 완료되었다. 그 후에도 크고 작은 화재가 여러 차례 있었는데, 특히 1917년 대조전(大造殿)을 중심으로 내전 일곽이 소실되어 그 복구를 위하여 경복궁 내의 교태전(交泰殿)을 비롯하여 강녕전 동·서 행각 등의 많은 건물이 해체 전용되었다.

      창덕궁은 많은 재앙을 입으면서도 여러 건물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왔는데, 1912년부터는 후원인 금원(禁苑)과 아울러 인정전을 관람할 수 있게 하였고, 8·15광복 후에도 창덕궁과 금원을 공개하고 있다. 창덕궁은 금원을 비롯하여 다른 부속건물이 비교적 원형으로 남아 있어 가장 중요한 고궁의 하나이다.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03. 인정전

      정면 5칸, 측면 4칸의 중층(重層) 팔작지붕 다포(多包)집으로 1804년(순조 4) 건립되었다. 남향이고 인정문과 함께 회랑으로 둘러싸여 일곽을 형성한다. 기단(基壇)은 2중으로 되어 있으며, 중앙과 좌우 측면에 석계(石階)를 설치하고 바닥면에는 전석(塼石)을 깔았다. 상층기단 위에는 장대석(長臺石)을 한 단 높여 돌리고 높은 주좌(柱座)의 초석(礎石)을 배열해서 기둥을 세웠다.

      기둥은 배흘림이 없는 원주(圓柱)이고, 내부에는 10개의 높은 기둥과 4개의 우고주(隅高柱)를 세워 중층가구법(重層架構法)을 따랐다. 두공(枓? )은 밖이 3출목(三出目)이고 안이 4출목인 다출목으로 전개되었으며, 기둥머리의 안초공(按草工)으로부터 살미와 첨차(? 遮)의 세부수법이 조선 말기의 양식을 나타내고 있다.

      가구(架構)는 외중층(外重層) 내통층(內通層) 수법이고, 고주(高柱) 몸에 퇴량(退樑)을 끼워서 2층평주(二層平柱)를 받게 하였으며 우고주(隅高柱)가 2층 우주가 되게 하였다. 처마는 겹처마인데 각 마루에는 양성(兩城)하여 취두(鷲頭) ·용두(龍頭) ·잡상(雜像)을 올려 놓았고 사래 끝에는 토수(吐首)를 끼웠다. 이 건물은 가구의 짜임새와 외관이 견실하면서 운치와 미려를 겸하여 흥선대원군이 근정전(勤政殿)을 재건할 때 이 건물을 규범으로 하였다.


    04. 品石

      景福宮의 勤政殿, 昌德宮의 仁政殿 등 대궐 안 正殿 앞뜰에 정1품을 선두로 해서 東班:文官은 동쪽, 西班:武官은 서쪽 자리에 두 줄로 종9품까지 차례로 세워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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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7. 용마루...종마루·옥척(屋脊)이라고도 한다...에 있는 세송이의 문양은 자두꽃이라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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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덕궁의 지리체계와 축
     창덕궁의 관한 자료를 읽다가 창덕궁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한번쯤 읽어두셔도 절대로 손해가 나지 않을 것 같아 옮겨왔습니다.  출처는 2002년 문화재청에서 발행한 [창덕궁.종묘 원유조사]라는 책에서 (39 - 41쪽) 글과 그림모두 발췌했습니다.
     
     1. 조선시대 경복궁이 위치한 한양은 진산이 삼각산으로 그 내맥은 도성내에 이르러 네 개의 줄기로 갈라져 전개 된다. 하나는 인왕의 줄기로 도성의 우백호를 이루며 남산으로 이어지는 가장 긴 줄기이다.
     
     다른 하나는 주산인 백악이 흘러 지금의 광화문 근처에서 그치는 가장 짧은 줄기이고, 마지막으로 응봉에서 이어진 낙타산 줄기는 도성의 좌청룡을 이루며 동대문에 이르러 그친다.
     
     2. 도성의 근간 시설인 궁궐, 종묘와 사직은 각각 하나의 줄기를 차지하면서 서로 겹치거나 중복됨이 없다. 경복궁은 정궁으로서의 격에 걸맞게 주산인 백악의 정기를 선택하여 입지하고 있다.
     
     창덕궁과 종묘는 백악의 좌측날개인 응봉을 선택하여 입지하고 있으며, 사직은 백악의 오른쪽 날개인 인왕의 정기를 선택하여 입지하고 있다.  또한 조선시대 [동국여지비고]에서도 창덕궁은 응봉아래 있으며 북부 광화방이라 하여, 창덕궁과 종묘의 주산이 응봉임은 분명하다.
     


     



     
     
     3. 창덕궁은 흔히 표현하듯이 자연지형을 가장 잘 활용한 가장 한국적인 궁궐이라고도 한다. [동궐도]를 보면 모든 건물이 같은 방향으로 놓여 있는 것처럼 그려 놓았지만, 실제 창덕궁은 그렇게 간단한 방식으로 건물이 배열되지 않았다.
     
      4. 경복궁이 광화문에서 신무문에 이르는 축을 중심으로 정전 근정전, 편전 사정전, 침전 강녕전, 교태전 등의 모든 전각들을 늘어 놓은 것과는 달리, 창덕궁은 여러 개의 축에 따라 전각들이 횡으로 배열되어 있다. 횡으로 배열하는 것은 우리나라 궁궐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모습이다.
     
      경덕궁(경희궁)이나 경운궁(덕수궁)도 이와 같은 방법으로 건물이 배열되어 있다. 이들 궁궐은 창덕궁의 규범에 따라 이런 배치를 택했기 때문에, 보통 창덕궁은 한국적인 궁궐의 전형으로 꼽는 것이다.
     
     5. 최근에 헐린 단성사와 피카다리극장 사이의 돈화문로는 옛날 한양성의 도시 경관을 대표하는 시전 장랑이 연결되어 있던 곳이었다.
     
      종로와 돈화문로가 만나는 곳에 동포도청이 있었고 비변사를 비롯하여 종부시, 돈녕부 등의 관청들이 이길을 따라 늘어서 있어서 경복궁 앞 육조거리에 비견되는 중요한 길이었다. 더욱이 이길 끝에는 500년 내내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이 있었으니, 그 중요성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조금 비스듬히 놓여 있는 돈화문의 머리 위로 산봉우리 하나가 보이는데, 바로 응봉이라는 봉우리이다. 이방향은 돈화문로의 방향과도 잘 맞아 떨어진다. 이렇게 궁궐의 정문인 돈화문이 놓인 방향이 창덕궁의 첫 번째 축이다.
     
     
     6. 창덕궁의 두 번째 축은 정전 인정전이 놓인 방향이다. 정전은 '수조지처(受朝之處)' 라 하여 임금이 신하들의 하례를 받는 장소이다. 일상적인 집무는 편전에서 하고 정전은 그야말로 의식적인 행사를 수행하는 가장 중요한 건물이다.
     창덕궁 인정전은 그 앞쪽의 인정문 밖으로 진선문과 숙장문으로 둘러 싸인 사다리꼴 모양의 마당 말고는 앞뒤로 수풀이 우거진 언덕으로 가로막혀 있다.
     
      인정전의 축은 인정전 뒤쪽으로 펼쳐지는 언덕의 가장 높은 부분이 딱맞아 떨어지고 있다. 돈화문이 멀리 응봉에 기대어 있다면, 인정전은 궁역 내의 가장 높은 지점에 기대어 그 위치를 잡은 것처럼 보인다.
     
      7. 마지막 세 번째 축은 희정당과 대조전의 축으로서 이는 인정전과 선정전보다 조금 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첫 번째 돈화문의 축을 따르는 건물들은 남쪽의 진선문, 숙장문 일곽이고, 두 번째 인정전의 축을 따르는 건물들은 정전 인정전과 편전 선정전을 비롯하여 승정원, 약방, 선원전 등 정치의 무대가 되는 곳이다. 희정당과 대조전의 축을 따르는 건물들은 이들과 비슷한 용도의 침전건물들이다.
     
     창덕궁의 지형현황
     
     
     창덕궁의 관한 자료를 읽다가 창덕궁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한번쯤 읽어두셔도 절대로 손해가 나지 않을 것 같아 옮겨왔습니다.  출처는 2002년 문화재청에서 발행한 [창덕궁.종묘 원유조사]라는 책에서 (41 - 42쪽) 글과 그림모두 발췌했습니다.

     
     
    1. 창덕궁은 서울시 도심의 중심지인 종로구 와룡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창경궁으로부터 편입된 9087평을 포함한 총면적은 144,299평 (476188㎡)이다.
     
    2. 창덕궁의 전체적인 지세는 동서보다 남북이 긴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동서쪽보다는 서쪽이 높고, 남쪽보다 북쪽이 높은 형상이다.
     
      3. 창덕궁의 지형적 구조는 1차적으로는 응봉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연맥이 능허정의 바로 위쪽에서 가장 높은 정상(90m)을 이룬다.
     이봉우리는 크게 두갈래로 나뉘어져 창덕궁 주요 건물지역의 영역을 형성하는데 직접적으로 관련되고 있다. 능허정으로부터 내려온 첫 번째의 갈래는 동남쪽으로 이어져 내려와 연경당과 어수당지. 애련지를 감싸 흐른다.
     
      4. 두 번째 갈래는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희우정 서쪽에서 봉우리를 맺어 (표고 60.5m) 능허정 정상 → 희우정 서쪽의 봉우리가 창덕궁 전체의 주능선을 형성한다.
     
     이봉우리는 또 크게 세 개의 작은 연맥으로 분지하는데, 하나는 동쪽으로 내려가 주합루쪽으로 흘러 내려가고, 두 번째의 흐름은 동남쪽으로 뻗어 대조전의 후면을 이루며 후산의 역할을 한다.마지막의 한갈래는 남쪽으로 내려와 인정전의 바로 뒤로 작은 언덕을 이루고 있다.

     


     
     
    5. 창덕궁에 나타나는 지형적인 특성의 하나는 주요 전각 및 원유시설과 표고와의 사이에 접적인 관계가 형성되고 있다는 점이다.
     
    6. 주요 전각이 밀집한 구선원전 및 규장각지역(37m), 인정전 및 선정전(37 ~ 38m), 희정당 및 대조전(39 ~ 40m), 낙선재(37 ~39m) 등의 남측에 위치한 전각들은 대략 표고 35 ~40m 의 가장 낮은 지역에 위치한다.
     
    7. 부용정과 춘당대 일원(39 ~ 41m), 주합루 지역(48 ~ 52m)은 대략 40 ~ 50m 사이의 표고를 보이고 있으며, 불로문안쪽의 연경당 (45m) 일원과 지당들 (애련지와 어수당지 일원 39 ~ 41m), 관람지 일원 (45m), 은 40 ~ 45m의 높이에 위치하고 있다.
     
    창덕궁의 과학적 수문체계
     
     
     창덕궁의 관한 자료를 읽다가 창덕궁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한번쯤 읽어두셔도 절대로 손해가 나지 않을 것 같아 옮겨왔습니다.  출처는 2002년 문화재청에서 발행한 [창덕궁.종묘 원유조사]라는 책에서 (42 - 44쪽) 글과 그림모두 발췌했습니다.

     


     
     
     1. 지형도를 통하여 분석한 창덕궁의 자연수계는 크게 남북으로 길게 이어져 내려온 능선을 중심으로 동쪽지역과 서쪽지역으로 나누어 살펴 볼 수 있다.
     
      2. 남북으로 길게 이어져 내려온 주 능선 [응봉 → 대보단지 우측 소봉우리 → 능허정 → 주합루 좌측봉우리 → 대조전후면언덕]을 기준으로 우측의 동쪽으로는 크게 4개의 골짜기들이 형성되고 있다.
     
     첫 번째의 골짜기는 창덕궁의 가장 북쪽에 위치한 옥류천지역으로서 창덕궁 바깥의 골짜기에서 형성된 물이 옥류천의 상류로 입수된다. 이물은 [청의정 → 태극정 → 곡수유배거 → 소요정 앞으로 계류와 폭포를 이루면서 창덕궁밖으로 출수된다. 옥류천에서 출수된 물은 창경궁 명당수의 상류로서 역할을 한다.
     
      3. 동쪽에 형성되는 두번째의 자연수계는 옥류천에서 대보단지로 넘어가는 순환로의 주안에 형성된 작은 봉우리와 능허정의 정상봉우리 사이에 형성된 골짜기이다. 이 골짜기를 통하여 모여든 계곡수들은 우수시 자연스럽게 관람지의 수원(水源)이 되고 있다.
     
      4. 세 번째의 골짜기는 능허정이 위치한 정상의 봉우리에서 발원한 물들이 동남쪽으로 길게 이어져 흐르다 중간의 빙천을 거쳐서 연경당 우측을 끼고 돌아 장락문 앞으로 흘러서 어수당지를 거쳐 애련지에서 수반으로부터 떨어지는 폭포를 연출한다. 또한 이물은 애련지의 남쪽 출수구를 통하여 불로문 옆으로 연결된 암거수로를 통하여 창경궁지역으로 출수되고 있다.
     
      5. 정상봉우리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능선은 희우정 좌측에서 작은 봉우리를 형성한다. 이봉우리에서 발원한 물들은 동쪽으로 짧고 급한 골을 형성하면서 주합루 우측과 비각의 좌측사이로 흘러 자연스럽게 부용지로 입수된다. 부용지에 입수된다.
     
    부용지에 입수된 물은 영화당 아래쪽의 개거수로를 통하여 현재의 매점 지역에 위치하였던 연지로 입수되고 이물은 담장밖 창경궁쪽으로 흘러들어간다.
     
      6. 남북으로 길 게 뻗은 주 능선의 좌측서쪽수계는 궁극적으로는 모두 창덕궁 서쪽을 감싸 흐르는 대수로로 합류되는 체계를 보여준다. 창덕궁북쪽의 담장밖 응봉의 아랫줄기에서 발원하는 골짜기들이 대보단지의 좌측, 우측 아래의 세곳으로부터 흘러서 신선원전 좌측의 자연계류로 합류된다.
     
      또 하나 의 계류가 신선원전 우측 중앙고등학교와 신선원전 접합부분의 담장아래로흘러 들어와 몽답정지로 입수 및 출수된다. 결국, 신선원전의 좌측과 우측에서 흘러들어온 이두 개의 자연계류는 북신문 안에서 합수되어 현재의 창덕궁 담장 밖으로 남쪽으로 흘러가다가 외삼문의 답장안으로 들어온다.
     
    이명당수는 구선원전과 규장각 사이를 지나 금천교 아래를 거쳐 돈화문의 우측 담장을 지나 종묘쪽으로 흘러 가게 되다.
     
      7. 창덕궁의 자연수계는 모두 명당수와 옥류천, 지당 (관람지, 부용지, 어수당지, 애련지)의 수원이 되고 있는 특징이 있다. 이러한 수문체계는 매우 과학적인데, 응봉으로부터 유입된 계곡수와 호우시 발생하는 우수를 효율적으로 배수시킴은 물론 다양한 수경적 요소 (가두어진물, 흐르는문, 떨어지는 물등)으로 활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지당의 조성목적에는 배수와 수경으로의 활용이라는 두가지 측면이 동시에 고려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8.한편 창덕궁내에서 출수되는 물들은 그대로 방류되는 것이 아니라 인접한 종묘(어구의 물)나 창경궁(명당수. 옥류천을 말함)으로 입수되고 있어 조선시대 수문체계가 얼마나 광역적이었고 체계적이었는지를 엿보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출처;blog.empas.sonsang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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