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궁궐,왕릉 이야기

왕릉이야기. 제22대 정조-건릉

문성식 2010. 8. 26. 20:23

 

  제22대 정조(正祖)와 비(妃) 효의왕후(孝懿王后) - 건릉(健陵)

 

 

22대 정조 - 건릉

소재지 : 경기도 화성군 태안면 안녕리 1-1 {隆健陵 소재}
사 적 : 제 206 호

健陵의 특징
 : 正祖(이성 ; 1752 - 1800, 재위 24년,
본래 시호(諡號)가 정종(正宗)이었으나 고종대[광무3년, 1899년]에 정조(正祖)로 추존됨)와 비(妃) 효의왕후 김씨(孝懿王后金氏 ; 1753 - 1821)의 건릉은 본래 정조(正祖) 승하 후 친부(親父)인 사도세자(思悼世子)의 현릉원(顯陵園; 후에 장조(莊祖) 융릉(隆陵)으로 개칭) 동쪽에 안장(安葬)되고자 했던 유언에 따랐으나 풍수학(風水學)으로 나쁘다고 해서 천장(遷葬)의 논의가 있던 차에 효의왕후(孝懿王后)가 승하[순조 21년]하자 현재의 위치인 융릉(隆陵) 서쪽으로 이장(移葬)하고 함께 합장(合葬)을 하게 됩니다.
 능제(陵制)는 봉분(封墳)에 병풍석(屛風石)은 없이 난간석(欄干石)만 돌리고 상석(床石) 하나에 8각의 장명등(長明燈)과 망주석(望柱石)을 설치하였으며 문무인석(文武人石)과 수석(獸石: 석호(石虎),석양(石羊),석마(石馬))들은 왕릉(王陵)의 예를 그대로 따랐습니다. 특히 정자각(丁字閣) 앞의 참도(參道)가 넓게 박석(薄石)으로 깔려있는 모습은 정조(正祖)의 업적을 느끼게 하는 웅장함이 있습니다.

正祖代의 사료(史料)

연도

재위

사  료(史料)

 

연도

재위

사  료(史料)

1777

1년

9월, 성중(城中)의 무격(巫覡)을 축출함

1787

11년

2월, 박준원의 딸 빈[수빈]으로 함

10월, <경종실록> 개수케 함

1790

14년

3월, 정약용 해미현으로 유배

1778

2년

6월, 홍국영의 누이를 빈(嬪)으로 함

6월, 원자[순조] 출생

12월, 박제가 북학의(北學議) 편찬

1792

16년

6월, 내각에 목활자[生生字] 만들게 함

1779

3년

5월, 원빈(元嬪) 홍씨(洪氏) 죽음

1794

18년

9월, 광해군의 사초를 수정시킴

1781

5년

4월, 홍국영 죽음

12월, 청나라 주문모 신부 밀입국 상경

7월, <영조실록>,<경종개수실록> 완성

1795

19년

7월, 이승훈 예산현에 유배

1782

6년

2월, 외규장각(外奎章閣) 이룩됨

1796

20년

8월, 착공 2년만에 수원부성[華城] 완성

1783

7년

1월, 중의 도성(都城) 출입을 금함

1797

21년

6월, 정약용 서학으로 승지 사직 상소

1784

8년

3월, 이승훈 연경에서 서교(西敎)책 반입

1799

23년

3월, 박지원 농업서인 <과농소초> 올림

7월, 원자 (元子) 왕세자로 책봉

1800

24년

1월, 원자 왕세자 책봉

1785

9년

2월, 제주도 삼성묘(三姓廟) 사액(賜額)

6월, 왕 승하 {1752- }

1786

10년

5월, 왕세자 죽음

7월, 왕세자 즉위[순조]

10월, 전국인구 7,526,696명

7월, 대왕대비[정순왕후] 수렴청정함

뒷 이야기
: 조부(祖父)였던 영조(英祖)의 대를 이어 25세의 왕성한 나이에 왕위(王位)에 오른 정조(正祖)는 18세기를 마감하는 24년간의 재위(在位) 기간 동안 선왕(先王)인 영조가 마련한 중흥기(中興期)를 완성시키는 많은 업적을 이룹니다.
즉위 직후부터 선왕의 뜻을 이어 왕실(王室) 거실을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 할 정도로 탕평정치(蕩平政治)를 계승해서 행하고 규장각(奎章閣)을 두어 왕실(王室) 연구기관(硏究機關)으로 학자들을 모아 경사(經史)를 토론케 했으며, 활자(活字)를 개량하여 인쇄술을 발전시켜 많은 서적을 간행(刊行)합니다. 특히 청(淸)나라 고증학(考證學)의 영향을 받은 실학(實學)을 크게 발전시켜 근대(近代) 문예부흥(文藝復興)을 이루었으나, 한때 천주교(天主敎)의 유입을 막기 위해 청으로부터 들어오는 서적의 수입을 막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실학사상가(實學思想家)들이 어느 정도 권력에 접근할 수 있었고 왕조(王朝)의 지배 질서에 약간의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시기였으나 천주교(天主敎)가 전래됨으로 인해 변화를 두려워한 보수세력(保守勢力)의 반발을 야기(惹起)시키는데, 정조(正朝) 승하 후 순조(純祖)의 즉위와 함께 단행된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커다란 반격을 가한 보수 세도(勢道) 정권이 이후 60여년을 이어가게 됩니다.
정조 어필 파초도이와 함께 조선조 후기의 문화적 황금기(黃金期)를 이룬 정조(正祖) 자신의 심정은 친부(親父) 사도세자(思悼世子[莊祖])의 참혹한 화난(禍難)에 대한 원한(怨恨)으로 인해 평생 우울한 마음을 감추지 못합니다.
 하지만 사도세자(思悼世子)의 현륭원(顯隆園)을 수원부(水原府) 화산으로 옮기고 매년 배알(拜謁) 행차를 하며, 왕조 초기의 도성(都城) 축성, 흥선대원군 시절의 경복궁(景福宮) 재건(再建)과 함께 조선 3대 토목공사(土木工事)로 일컬어지는 수원성[화성(華城)]을 축조하고 소경(小京:제2도읍지)으로 승격시키는 등의 일들이 실제 생부(生父)에 대한 단순한 회한(悔恨)의 발로(發露)라기 보다는 개혁의지가 강했던 정조의 보수세력 견제와 실학적(實學的) 정치세력의 추구를 위해 행해진 것으로 봄이 마땅할 것입니다.
 사도세자(思悼世子)와 혜경궁(惠慶宮) 홍씨(洪氏)의 둘째아들로 태어난 정조는 영조(英祖)의 명으로 후사(後嗣)가 없이 요절(夭折)한 백부(伯父) 효장세자(孝章世子: 사도세자의 형)의 계통을 이어 양자(養子)로 올려지게 되어 즉위 후에 효장세자를 추존(追尊)해 진종(眞宗)으로 올리게 되는데, 이로 인해 생부(生父)인 사도세자는 정조(正祖) 당대에는 추존이 되지 못하고 고종대(高宗代)에 가서야 장조(莊祖)로 추숭(追崇)됩니다.

孝懿王后 김씨(金氏) 약사(略史)
 효의왕후(孝懿王后) 김씨(金氏)는 영조(英祖) 29년에 명문가(名文家)인 청풍김씨(淸風金氏) 청원부원군(淸原府院君) 김시묵(金時默)의 딸로 태어나 10세 때에 당시 왕세손(王世孫)이었던 정조(正祖)의 빈(嬪)이 되었다가 1776년 정조 즉위와 함께 왕비(王妃)에 책봉됩니다. 성품이 온화(溫和)하고 겸손하여 조모(祖母)격인 영조의 계비(繼妃) 정순왕후(貞純王后)와 혜경궁(惠慶宮) 혜빈홍씨(惠嬪洪氏)를 극진히 섬겨 궁궐내에서 존경의 대상이 됩니다.
 슬하(膝下)에 소생(蘇生)이 없이 안타까운 생을 보내지만 기꺼이 수빈박씨(綏嬪朴氏)의 소생을 원자(元子: 순조)로 삼게 됩니다.[정조 14년, 1790년] 그 후 순조(純祖) 21년까지 여생(餘生)을 보내다가 69세의 나이로 승하(昇遐)합니다.
 

출처 :문화 사랑 오솔길 원문보기   글쓴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