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궁궐,왕릉 이야기

왕릉이야기. 추존 진종-영릉

문성식 2010. 8. 26. 20:28

 

  추존(追尊) 진종(眞宗)과 妃 효순왕후(孝純王后) - 영릉(永陵)

 

 

진종[효장세자]-영릉

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조리면 봉일천리 산15-1 {공순영릉(恭順永陵) 소재}
사 적 : 제 205 호

永陵의 특징
 : 영조(英祖)의 장자(長子)이자 정조(正祖)의 친부(親父)인 사도세자(思悼世子)의 형이었던 추존왕 眞宗(이행; 1719 - 1728)과 비(妃) 효순왕후 조씨(孝純王后趙氏 ; 1715 - 1751)를 모신 능이 영릉(永陵)입니다. 영릉은 본래 슬하에 소생없이 세자로 책봉된지 3년만에 요절한 효장세자(孝章世子)를 세자와 세자빈의 예(禮)로 묘를 조성하였습니다. 그 후에 다음 세자였던 사도세자(思悼世子)마저 폐위되어 죽음을 당하고 사도세자의 아들을 왕세손(王世孫)으로 책봉할 때, 영조는 왕세손을 효장세자의 양자(養子)로 입적시켰기 때문에, 왕위에 오른 왕세손[정조(正祖)]이 영조의 유지에 따라 효장세자(孝章世子)를 진종(眞宗)으로 추존하고 묘 역시 왕릉으로 승격해서 영릉(永陵)으로 격상됩니다.
 쌍릉(雙陵)의 형식으로 조성된 영릉은  세자묘의 예에 따라 이루어졌다가 왕릉으로 추숭(追崇)되었기에 간촐하게 상설(常設)되었습니다. 능원의 구조는 병풍석(屛風石), 난간석(欄干石) 모두 봉분(封墳)에서 생략되었고, 석물(石物)들도 석호(石虎), 석양(石羊) 한 쌍씩이며, 무인석(武人石) 없이 문인석(文人石)만 석마(石馬)를 대동하고 좌우에서 호위하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점은 능침(陵寢) 아래의 정자각(丁字閣)이 파손되어 기공석(起工石)만 남아있는 것인데, 이러한 홰손된 문화재를 보면서 진정한 문화유산(文化遺産)의 보존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추존(追尊)의 약사(略史)
{孝章世子 - 眞宗} : 영조와 정빈이씨(靖嬪李氏) 사이에서 장자(長子)로 태어난[숙종 45년]진종은 영조가 즉위하자 경의군(敬義君)에 봉해졌다가 다음해 왕세자(王世子)에 책봉되니 그때 나이가 7세였습니다. 하지만 영조(英祖)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세자는 3년 뒤[영조 4년]에 승하합니다. 불과 10세였습니다.
 영조의 부정(父情)은 세자에게 효장(孝章)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고, 후에 왕세손{正祖}에게 유언처럼 남긴 것이 효장세자의 추존(追尊)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정조는 그 유지를 받들어 효장세자를 진종으로 추존했지만, 정조(正祖)에게는 진종보다 친부(親父)였던 장조(莊祖[사도세자])에 대한 정성이 지극할 수밖에 없었기에 다소 영릉(永陵)에 대한 호위(護衛 )가 소원(疎遠)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孝純王后 趙氏} : 풍양조씨(豊壤趙氏) 좌의정(左議政) 조문명(趙文命)의 딸로 태어난[숙종 41년] 효순왕후는 영조 3년에 13살의 나이로 세자빈(世子嬪)에 간택되었으나 다음해에 세자가 승하(昇遐)하여 안타까운 생을 보내다가 역시 37세의 나이로[영조 27년] 소생없이 승하합니다. 

출처 :문화 사랑 오솔길 원문보기   글쓴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