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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기도 화성군 태안면 안녕리 1-1 {융건릉(隆健陵) 소재}
사 적 : 제 206 호
隆陵의 특징 : 조선조 최고 비극(悲劇)의 세자인 사도세자(思悼世子[장조(莊祖)] - 이선 ; 1735 - 1761)와 비(妃)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 ; 헌경왕후(獻敬王后) ; 1735 - 1815)의 융릉은 처음에 비극의 죽음을 맞은 세자를 양주군(陽州郡)에 장사지내고 수은묘(垂恩墓)로 명명했었는데, 정조(正祖) 즉위 후 영우원(永佑園)으로 추상(推上)하고 1789년에 수원으로 천장(遷葬)하면서 현륭원(顯隆園)으로 개칭(改稱)합니다. 현재의 융릉(隆陵) 추숭(追崇)은 1899년[고종 36년, 광무 3년] 장조의 직계 4대 후손인 고종(高宗)에 의해 융릉으로 추존된 것이고, 시호(諡號), 묘호(廟號) 역시 영조(英祖)가 내린 사도세자(思悼世子)에서 정조가 추숭한 장헌세자(莊獻世子)로, 그리고 고종(高宗) 대에 추숭된 장종(莊宗), 또 장조(莊祖)로 추상됩니다. 능역(陵域)의 상설(常設)은 현 위치로 천장(遷葬)할 때, 세자묘(世子墓)로 조성됨에도 불구하고 정조(正祖)의 의지에 따라 웅장하고 장엄하고 조성되었습니다. 화문(花紋)을 새긴 병풍석(屛風石), 꽃부리 모양의 봉분인석(封墳引石), 문인석 외에 무인석(武人石)의 추가 설치, 정자각(丁字閣) 앞의 넓은 박석(薄石)의 참도(參道) 등 아주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습니다.
추존(追尊)의 약사(略史) {思悼世子 - 莊祖} : 영조와 영빈이씨(映嬪李氏) 슬하에서 태어난[영조 11년] 장조(莊祖)는 이복(異腹) 형인 효장세자(孝章世子)가 요절한 후인 영조(英祖) 춘추 44세에 태어났기에 왕세자 책봉(冊封)이 2세때 이루어집니다. 어려서부터 영민(英敏)했던 세자는 장래가 촉망되는 칭송을 받았지만 영조 25년[1749년]에 영조를 대신해 정사를 돌본 대리기무(代理機務)을 시작하면서부터 당쟁(黨爭)의 와중에서 무고(誣告)와 난행(亂行), 광포한 행동으로 인해 참혹하게 뒤주안에서 죽음을 맞는 비극을 당하지만, 그 이면에는 당파(黨派)의 내면에 잠복한 왕권(王權)과 신권(臣權)의 알력 속에서 발생한 필연적 비극으로 규정하는 논의가 많습니다. 생부(生父)의 죽음을 목격한 정조(正祖)였기에 특히 세자의 사후에 장조(莊祖)로의 추존(追尊) 과정을 보면, 아들을 자신의 명으로 죽음에 이르게 한 영조(英祖)도 후회의 회한(悔恨)으로 사도(思悼)의 시호를 내렸고, 장헌세자(莊獻世子)로 추숭하며 애절하기까지 했던 정조(正祖)의 선친에 대한 정성, 고종대(高宗代)에서의 장종(莊宗), 장조(莊祖) 추존까지 사도세자에 대한 약사(略史)가 그의 애절한 일생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獻敬王后 - 惠慶宮洪氏} : 풍산홍씨(豊山洪氏) 영의정(領議政) 홍봉한(洪鳳漢)의 딸로 영조 11년[1735년]에 탄생한 헌경왕후는 영조 20년에 세자빈(世子嬪)에 책봉되었는데, 사도세자 사후 혜빈(惠嬪)으로 있다가 정조(正祖)가 즉위한 후 혜경궁(惠慶宮)의 궁호(宮號)를 받아 여생을 보내다가 순조 15년 81세의 춘추로 승하해 현륭원(顯隆園)에 합장(合葬)됩니다. 특히 헌경왕후는 궁중(宮中)의 비화(悲話)를 그린 자서전적(自敍傳的) 회고록(懷古錄), 곧 남편 사도세자의 비극으로 인한 한(恨) 많은 자신의 일생을 사소설체(私小說體)로 다룬 <한중록(恨中錄)>을 남겨, <인현왕후전(仁顯王后傳)>과 함께 궁중 문학의 쌍벽을 이루고 있어 지금까지 혜경궁홍씨(惠慶宮洪氏)에 대한 이야기가 많은 문학작품의 소재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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