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 가톨릭 캠페인> 필사
031-985-5677 www.fpi.or.kr
4. 고통은 왜?
하느님이 침묵하시는 까닭
감당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아무리 소리쳐도 대답이 없는 하느님꼐 우리는 푸념하듯이 물음을 던집니다.
"전능하신 하느님이 계시다면, 왜 내게 이런 일들을 허락하시는가?" 전능하신 하느님이 계시다면, 왜 내게
아무런 도움을 주시지 않는단 말인가?"
또 사회적으로 엄청난 불의와 부조리가 자행되는 것을 묵과하시는 하느님의 처신에 불만을 가질 수 있습니
다. 이럴 ? 우리는 묻습니다. "하느님 전능하신 분 맞아?", "전능하신 하느님이 왜 저런 꿈직한 일이 일어나
도록 허락하시는가?"
실제로, 근세기 들어 수많은 전쟁과 학살을 지켜 본 현대인들은 '전능하신 하느님'의 전능하심에 회의를 갖
기 시작했습니다. 과연 하느님을 전능하다고 할 수 있는가? 전능하신 하느님이 왜 아우슈비츠에서 600만 명의
유다인이 학살되는 비극을 저지하지 않으셨는가? 왜 전능하신 하느님이 세상의 극악한 폭력에 대하여 침묵만
하시는가?
이 물음을 가장 뼈저리게 던진 이들이 바로 유다인이었습니다. 나치 시대를 살았던 한 유다인(동시에 그리스
도인) 엘리 위젤은 이 물음에 대한 대답 대신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나친 친위대가 유다인 두 명과 한 소년을 군인들이 보는 앞에서 목매달았다. 두 사람은 즉시 죽었다. 그러나
어린 소년은 반시간을 죽음과 싸워야 했다. 그러자 내 뒤에 있던 한 사람이 '신이 어디있어? 어디에 신이 있어?"
하고 물었다. 오랜 시간 후에도 소년이 여전히 올가미에서 괴로워하자 그 사람은 다시 '신은 지금 어디 있어?"하
고 외쳤다. 그러자 나는 내 속에서 한 목소리가 답변하는 것을 들었다. '신이 어디에 있는가? 여기에 하느님이
계신다. 하느님은 저기 저 올가미에 달려 있다.'
유다인이 발견한 대답은 하느님은 사람들이 고통 받는 순간에 못 본 체하고 침묵만 하고 있는 것이 아리라는 것
이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이 고통의 현장에서 고통받는 이와 함꼐 고통을 당하고 계신다는 것이었습니다.
▶ 엘리위젤의「흑야」를 읽으신 김수환 추기경님은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런 절망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있었던 일이다. 십자가에서 예수는 『주여, 왜 나를 버리시
나이까』하며 절규했다.......인간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인간 한계의 절정, 거기에서 오히려 하느님의 절대적
인 것이 드러난다”
고통 받는 하느님
그렇다면 하느님은 그 고통을 해결해 주시지 않고, 오히려 인간과 함께 고통을 받으시는가? 이런 어리석음이 어
디 있는가? 우리는 하느님의 이 왜견상의 무능을 '하느님은 사랑이시다'(1요한 4,7-10 참조)라는 말로밖에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두 가지 점에서 그렇습니다.
첫째, 사랑이신 하느님께서는 태초에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실 ? 이미 '사랑의 모험'을 감행하셨다는 점입니다.
자유의지를 주실 ? 이미 인간의 '거절', '거부', '배반'을 각오하고 주셨다는 말입니다. 사랑의 극치는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느님을 배반하였습니다. 그배반과 모반을 감수하는 과정에서 하느님은 무능하고 무력
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었습니다.그자유의지를 박탈하지 않는 한 하느님은 그러실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속앓이를
하시고 함께 아파하시며 고통을 감내하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이상 그것을 박탈하지도, 간섭하지도 않으십니다.이것은 걸작(masterpiece)
인간을 만드신 하느님의 자존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본래 인간을 하자 없이 완전한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보
시니 참좋다"(창세1,31)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자유의지를 존중하십니다. 자유의지를 리콜(recall)하지 않으시는 것
입니다. 못하시는 것이 아니라 안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오스팅에게 하느님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씀을 주셨던
것입니다. 너의 허락 없이 너를 존재케 했지만, 너의 허락 없이는 너를 구원할 수 없단다."
둘?, 사랑이신 하느님꼐서는 사랑의 속성상 '함꼐 아파하실 수밖에' 없으시다는 점입니다. 연민을 표현하는 영어의
'compassion 이나 독일어의 'Mitleiden'도 '함께 고통을 당하는 것'을 뜻합니다.하느님께서 스스로 고통을 모르면서
인간의 고통에 동참한다는 것은 오히려 하느님을 인간과는 무관한 존재로 만들어 버립니다.고통을 모르는 비정의 하
느님, 무감각한 하느님을 우리는 인격신으로, 사랑의 하느님, 자비의 하느님으로 고백할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하여 나
치 시대에 '암살범'으로 몰려 처형당한 본회퍼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고통받지 않는 하느님은 인간을 고통
에서 해방시키지 못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겪으셨던 고통 가운데 사랑하기 때문에 고통에 동참하
시는 하느님 사랑의 놀라운 구원 섭리가 드러났습니다. 이것은 사랑의 역설입니다.
사랑의 전능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세상의 권력을 쥐고 있어도, 자식 앞에 부모는 무력자입니다. 결국,
자식이 하자는 대로 자식의 말을 들어줍니다.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그 자식을 부모는 여전히 사랑합니다. 당하고도
또 넘어갑니다.
하느님이 꼭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사랑 때문에 오히려 무능한 존재로 보이기도 합니다. 더 없이 무능하고 무력한 모
습으로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매달리신 십자가에서 세상을 능가하는 하느님 '사랑의 전능'이 드러난 것입니다. 즉 사랑
하시기에 인간을 위해서라면 못할 일이 없으신, 수모와 능욕조차도 능히 감당해 내시는하느님의 전능'이 십자가를 통해
드러난 것입니다. 이제 인간의 불행은 하느님의 불행이며,인간의 울부짖는 소리는 하느님의 울부짖는 소리입니다. 그러
므로 "왜나를 이렇게...."라고 울부짖을 것이 아니라 이런 상황에서도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을 볼줄 알아야 합니다.
4-2 팔자를 고칠 수 없는가?
우리는 안 좋은 일이 일어나면 습관적으로 팔자타령을 합니다. 예로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은 '사람은 팔자대로 살아간다'
는 운명론에 젖어 살아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은 '이 도망 저 도망 다해도 팔자 도망은 못한다' 우리의 옛 속
담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팔자를 벗어나서 살 수 없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하실 수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
이 가능하다"(마르9,2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하느님을 굳게 믿고 그 분 안에서 꿈을 꿀 때, 그분은 그 소망을
이루어주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만난 '가난한 사람들'은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눈 먼' 이들은 보게 되었고, '억압받은 이들'은 해방
되었습니다. '절름발이'가 걷게 되었고, '나병환자'가 멀쩡히 치유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팔자'가 바뀌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시대의 증인
미국에 가면 1,400개의 점포를 가진 도미노 피자가 있습니다. 이것을 만든 사람은 타미라는 고아였습니다. 그는 미시간 주
잭슨에 있는 성 요셉고아원에서 자랐습니다. 그는 조금 자라 양부모밑에서 자랐습니다. 중학교에 갔으나 문제아로 찍혀 퇴
학을 맞아야 했습니다. 여러 번 사고를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그가 내쫓길 때 그를 사랑으로 돌봐주었던 수녀가 그에게 격려
의 말을 했습니다. "하느님은 너를 절대로 버리지 않으신다. 큰 별을 따도록 하여라."
그는 평생 이 말을 마음에 간직하고 살기로 결심하엿습니다. 그는 우선 먹고 살기 위하여 피자가게에 취직햇습니다.그리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피자 한 개를 11초에 반죽하는 솜씨를 보였습니다.나중에 따로 피자 집을 낸 것이 성공하여 1,400개의 점
포를 갖게 된 것입니다. 그는 늘 이렇게 말한답니다.
"그대의 생애를 하느님께 맡기고 한번 크게 승부를 걸라!"
우리는 믿음 안에서 반드시 변화와 위로와 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은 이른바 '운명론적인 굴레' 곧 팔자조
차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줍니다.
날마다 새로운 인생을 도전해 보십시오. 꿈을 꾸고, 믿고, 기도하며, 날마다 무한한 가능성을 향하여 날개 짓을 해 봅시다.
참 소중한 당신께
참 소중한 당신.
도종환 님이 고난 중에 읊조린 노래하나가 가슴에 저며 옵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저는 지금 풀벌레 울음으로 흔들리는 여린 촛불입니다.
당신이 붙이신 불이라 온몸을 태우고 있으나
제 작은 영혼의 일만팔천 갑절 더 많은 어둠을 함께 보내신
당신은 누구십니까?
우리는 고난 저편에서 박송죽 님의 노래 '첫눈 뜬 새벽같이'도 함께 합창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늘과 땅 어울려
품어 안은 그분의 사랑 안에
저마다 지복한 잔치마당
생명의 촉수 높은 초록빛
환희의 숨결
참 소중한 당신.
이것이 우리와 함께하는 하느님의 다채로운 용안입니다.
'천주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6. 가톨릭 신자는 무엇을 믿는가? (0) | 2016.03.05 |
---|---|
가톨릭교회는? (0) | 2015.09.06 |
하느님? (0) | 2015.09.06 |
성경은 믿을 만 한가? (0) | 2015.09.06 |
예수는 결혼을 했을까? (0) | 2015.09.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