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6. 가톨릭 신자는 무엇을 믿는가?

문성식 2016. 3. 5. 11:14

 

6. 가톨릭 신자는 무엇을 믿는가?

 

[차례]

6-1 가톨릭은 정말로 마리아를 믿는 종교인가?

6-2 과연 죄는 있는 것인가?

6-3 죄를 고백하면 정말 용서 받을 수 있는가?

6-4 기도와 명상은 무엇이 다른가?

 

6-1 가톨릭은 정말로 마리아를 믿는 종교인가? 

 

      

 

무엇이 우상인가?

  어느 성당이든지 정문을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안마당 뜰에 있는 성모상입니다. 그 성모상

 앞에서 절을 하는 가톨릭 신자들을 보고 일부 개신교 신자들은 '성모당'에 다닌다고 비난합니다. 여기에

모상은 우상이고 성모 공경은 우상 숭배라는 식의 판결을 꼭 덧붙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선 '우상'이라는 말을 바로 알아들어야 합니다. 탈출기 20장 4절의 말씀에 의하면 우상은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든,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든 땅 아래로 물속에 있는 것이든 그 모습을 본뜬" 신상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본래 '형상 없는'하느님을 어떤 '모습' 속에 고정시키는 것, '제한 없는'하느님을 어떤

'틀' 속에 가두어 두는 것, 그것이 우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존재했던' 어떤 사람을 기념항 석상이나 동상을 만드는 것은 우상이 아닙니다. 역사 속의 주

인공 예수님을 기억하기 위하여 만들어 놓은 상들은 우상이 아닙니다. 마리아의 실제 모습을 추정하여 상으

로 만들어 놓은 것도 우상이 닙니다. 성상도 성화도 우상이 아닙니다.

  만일 성상이나 성화를 하느님 자리에 갖다 놓았다면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마리아를 하느님 자리에 놓고

숭배한다면 그것은 우상 숭배입니다. 그러나 일부 개신교에서 비판하는 것처럼 가톨릭은 마리아를 신으로

숭배하지 않습니다.

                                                하느님 자리에 갖다 놓았다면 우상

 

 

흠숭과 공경의 차이

  우리가 숭배하는 것은 오로지 삼위일체 하느님 뿐입니다. 마리아는 다만 공경할 따름입니다. 공경하되 다른

성인들께 드리는 공경보다 더 정성껏 공경합니다. 그래서 삼위이신 하느님께 '흠숭지례'를 드린다 하고, 마리

아에 대한 공경은 가장 존경한다 하여 '상경지례' 그리고 성인들에 대한 공경을 '공경지례'라 합니다. '흠숭'

 '공경'에는 분명히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훌륭한 신앙의 삶을 산 인물을 존경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의 유일한 중재자

되시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예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마리아가 구원에 이르는 길이 될 수는 없습니다. 마리아를 거치지 않고도 예수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모 마리아는 우리가 예수께 나아가도록 도와주십니다.

 

        손짓으로 당신 아들에게 사람들을 안내하는 십자가 아래 성모님

 마리아는 우리가 예수께 나아가는 데 장애가

니라 안내자요 동반자입니다. 굳이 성모님을 통하지 않아도 되지만, 통하지 않으면 그만큼 전구의 은혜를 못

 누따름입니다.  

 

6-2 과연 죄는 있는 것인가?

 

죄는 없다?

  미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자신이 지은 잘못 때문에 괴로워하던 열세 살의 소년은 미시간 주의 벤톤 하버에

있는 경찰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이 소년은 자기가 훔친 자전거를 경찰서 옆에 갖다 놓고 다음과 같은 글을 쓴

간단한 메모를 붙여 놓았습니다.

  "경찰관 아저씨, 자전거를 훔쳐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그래서 자전거를 여기에 갖다 놓았습니다. 나는 열세

살이고 남의 자전거를 몰고 간 것이 이렇게 괴로울 줄 몰랐습니다. 저를 찾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메모

끝에 자신의 이름을 적어 놓았습니다.

  사람에게는 양심이라는 것이 있어서 누구든지 그 양심 때문에 괴로움을 겪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죄의식

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요즈음 뉴에이지에서는 죄 자체를 부인하는 가치관을 유행시키고 있습니다. 앤드류 마리아가

 쓴 <지혜의 발자취>에 나오는 한토막 이야기는 이런 주장이 사탄의 소행이라고 말합니다.  

 

  사탄은 지옥의 회의를 소집해서 악마들에게 연간 보고를 하도록 요구했다. 그가 악마들에게 일렀다.

"너희 공적을 알고 싶다. 공이 가장 큰 악마에겐 상을 내리겠다. "악마 1호가 일어나 말했다.

 "사탄 마왕님, 저는 수많은 인간들을 육욕의 죄에 빠뜨렸습니다. 그랬더니 그 녀석들이 타락하고 말았지요"

악마 2호가 일어나 말했다. "저는 수많은 인간들을 오만의 죄에 빠뜨렸습니다. 그랬더니 그 녀석들이 생명을 잃고 말았지요.

" 악마 3호가 일어나 말했다. "저는 수많은 인간들을 탐욕의 죄에 빠뜨렸습니다. 그랬더니 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더 많은 고

통을 겪더군요."

마지막으로 악마 4호가 일어나 말했다. "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죄 같은 것은 아예 없다고 믿게 만들었습니다."

  사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참 잘했다. 악마들에겐 그것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업적이니라. 인간들에게 죄 같은 건 아예 없다고 믿게 만드는 것 말이다."

재미있는 것은 오늘날 이런 말을 하는 이들이 실제로 있다는 사실입니다.

 

죄는 있다.

                       

 

 

 

  과연 죄는 없는 것일까?  이를 밝히려면 먼저 '죄'라는 말의 뜻을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서에서 죄를 뜻하는 히브리어

 hata와 그리스어 hamartia는 어떤 기준(=하느님 또는 계명)을 벗어난 행위를 말합니다. 또 한자로 죄는 씨줄과 날줄로 이루

어진 그물의벼리가 '아닌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벼리는 천륜과 인륜을 뜻합니다.

 강상죄인, 즉 '삼강오륜을 범한 죄인'이라는 말이 있듯이 천륜과 인륜에 어긋나는 것이 바로 죄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의 성립에 문제가 되는 것은 그척도가 되는 하느님의 존재 여부, 그리고 천륜과 인륜의 보편타당성 여부입

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존재하십니다. 부인하는 이들도 있지만 인류의 절대 다수가 이를 믿어 왔습니다.

또한 양심, 계율, 천륜과 인륜 등을 동서고금의 사람들이 인정해 왔습니다. 오늘날 비교종교학의 연구 결과는 이 사실을 뒷받

침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는 있습니다.

  "죄는 없다"고 하는 주장은 기만입니다. 크냐 작으냐의 차이가 있을 뿐, 어느 누구도 죄(의식)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현실

입니다. 이 죄의 결과로 인간은 본래의 영광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습니다"

(로마 3,23) 인간의 비극은 죄를 없앨 방도가 없다는 데에 있었습니다. 역사 이래 어느 누구도 사람의 죄에 대해 해결해 준 이

가 없었습니다.

의사가 수술을 해서 제거할 수도 없습니다. 심리 치료사가 상담이나 약물로 없애버릴 수도 없습니다.

그 까닭에 예언자 예레미야는 말했습니다. "에티오피아 사람이 자기 피부색을, 표범이 자기 얼룩을 바꿀 수 있겠느냐? 그럴

수만 있다면 악에 익숙해진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예레13,23)

곧 본래 있는 피부색과 가죽의 점을 없앨 수 없듯이 인간에게서 죄 자체를 없앨 수는 없다는 얘기입니다.

 

6-3 죄를 고백하면 정말로 용서받을 수 있는가?

 

용서의 제사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었습니다. 바로 이 문제를 청산해 주시려고 오신 분이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죄'와 '불의' 자체였습니다.

  그 십자가에는 단지 자신들의 기득권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저의에서, 오직 사랑으로 일관된 고결한 인생을 오히려 폭도요 반

역 죄인으로 모함한 소위 지도자들의 질투와 흉악함이 걸려 있습니다.

  거기에는 절대 정의가 불의에 의하여 재판 받는 가장 억울한 부조리가 걸려 있섭습니다.

  거기에는 병사들의 침뱉음, 모욕, 채찍들에 감춰진 온갖 능욕과 폭력이 함께 걸려 있었습니다.

  이런 죄악의 모든 쓰레기들을 예수님은 십자가와 함께 짊어지고 골고타언덕을 오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죄들을 모두 짊어지시고 십자가 제물이 되셨습니다.

  십자가형은 '용서의 제사' 였습니다. 인류가 자신의 무지와 맹목으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요한 14,6 참조) 분을 죽이려

하였을 때, 죄의 세력은 부조건적인 용서와 사랑의 권능을 만났습니다.

  바로 이 사랑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어 가시면서도 당신을 죽이는 바로그 사람들에 대한 용서를 위해서 기도 하셨습

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회개한 우도에게도 용서를 선언하셨습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꼐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43)

  이는 인간적인 판단으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용서의 선언이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충격이요 파격이었습니다.

 

용서의 제도화

  십자가 제사로 용서를 완성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부활하신 후 사도들에게 나타나시어 성령을 보내 주시면서 그들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맡기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

다"(요한 20,22-23)

  가톨릭교회는 예수님의 이 명령을 받들어 세례성사와 고해성사라는 제도를 구비하였습니다. 이들은 거추장스런 의무규정이 아

니라 철저히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마련된 권리의 보장책입니다.

  먼저 세례성사를 통해서 원죄와 본죄를 용서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즉, 아담으로부터 이어받은 죄의 성향인 원죄와 세례받기

까지 지은 모든 죄를 세례를 통하여 용서받는 것입니다. 그 이후 고해성사를 통하여 그때그때 지은 죄를 용서받을 수 있게 되었

습니다.

 

6-4 기도와 명상은 무엇이 다른가?

 

 차이

  당신은 명상과 기도의 차이를 아십니까?

  혹 당신은 요즈음 유행하는 기, 선, 좌선 또는 요가 등 동양의 명상 방법에 매력을 느끼고 심취해 있지 않습니까?

 

  그 차이를 일러드리겠습니다.

  연인이 있습니다. 호젓하게 둘이서만 있습니다. 둘이서 함께 있으면서 서로 마음에 있는 사랑과 정과 생각을 제한

 없이 나눌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기도입니다. 탄원기도, 청원기도, 통회의 기도, 감사 기도, 묵상 기도,

 관상 기도 등 모두가 사실은 기도하는 이와 하느님 사이에 이루어지는 내밀한 나눔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둘이 함께 있으면서 상대방의 존재를 무시하고 내안으로 기어들어가 자신 안에 있는 자아와 독백

을 나누는 것이 명상입니다. 물론 말들은 그 자아에 깃들어 있는 신성을 밝힌다고들 하지만 실제로는 하느님에게서

발산되는 신성을 만나는 것이 아니고자신의 의식을 신성시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그 차이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명상에서 명은 눈을 감고 더둠으로 들어가서 내관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명상은 자신 안의 어둠에 들어가 자신

안의 가아를 털어내고 진아를 찾아가는 과정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명상은 그리스도 없이, 하느님 없이, 성령의 비추임

없이 하는 자아 성찰에 지나지 않습니다. 명상은 독백이요 독행이요 독거입니다. 때문에 명상은 엄밀한 의미에서 기도가

아닙니다.  

 

묵상은?

  명상은 묵상과도 다릅니다. 묵상은 성서 말씀이나 어떤 가르침의 내용을 붙들고 침묵 속에서 되새김하면서 소화하는 과

정을 말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의 명상은 오로지 자아만을 상대로 합니다.

  이에 비할 때, 기도는 반드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과 함께, 성령과 함께하는 사랑의 나눔입니다. 기도는 대화

요 동반행이요 동거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 없이 기도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 안에 당신과 더불어 함께

사시도록 초대하고 항상 그분을 의식하며 기도하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당신에게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가되기를

빕니다.

 

참 소중한 당신께

 

 

 

 참 소중한 당신.

  이 해인 수녀님의 기도 한 자락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당신을 만난 기쁨이 하도 커서

  제가 죄인임을 잠시 잊더라도

  용서해 주시겠지요?

  주님 당신을 사랑하는 기쁨은

  참으로 감출 수가 없습니다.

  (이해인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처럼'에서)

 

  참 소중한 당신.

  당신께서 이 기쁨을 맛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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