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목 | 중요민속자료 제206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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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남 합천군 묘산면 화양리 485 |
소재지 | 묘산면 |
지정일 | 1984.12.24 |
수량/면적 | 2동 |
시대 | 조선시대 |
소유자 | 윤두식 |
관리자 | 윤두식 |
자료출처 및 참조 | 문화재청 |
경상남도 합천군 묘산면 화양리에 있는 조선 전기의 주택.
가전(家傳)하는 바로는 선조조(宣祖朝)에 선전관(宣傳官)을 역임하였고 인조 (仁祖) 때 영국원종(寧國原從) 일등공신으로 봉작된 파평윤씨(坡平尹氏) 사성 (思晟)이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그후 세세손손이 거주하여 오다가 10세손 중수대(中洙代)에 이르러 지령(地靈)의 도움을 얻어 항일투사로 활약한 애국지사가 출현하였다고 한다.
창건때의 집터는 넓이가 육백평이었고 명기(名基)의 산록(山麓)에 의지하여 고설(高設)하였으며 이른바 지기(地氣)의 윤덕(潤德)을 입어 집안이 융성하여져서 한 때는 여덟채나 되는 집이 들어차 있었고 그 때의 연건평은 무려 백여칸에 이르렀었다고 한다. 지금은 그만 못하나 우람한 집이 자리잡고 있다.
대문채는 5칸이며 가운데 칸이 솟을대문으로 열렸다. 반듯한 내정(內庭)이 있어 들어서면 좌측으로 산록(山麓)에 자리잡은 사랑채가 보인다. 마당보다 훨씬 높게 대(臺)를 모으고 ㄱ자형 평면의 사랑채를 지었는데 4칸 규모의 내루(內樓)가 앞쪽으로 전출(前出)되어 있다. 내루의 누하주(樓下柱)는 마당에 주초(柱礎) 놓고 원주(圓柱)를 세웠다. 축대 높이만큼을 기둥 높이로 잡은 것이다. 내루의 남동벽은 판벽(板璧)하고 문얼굴 내고 그 인방 위로 교창을 내었으나 지금은 문짝, 창 등은 없어져 원상을 보기 어렵게 되었다. 서벽은 판벽없이 개방되었다.
사랑채는 2칸의 방에 이어 주간(柱間)을 약간 좁힌 또 1칸이 있는데 배벽(背壁)을 판벽으로 막은 판상(板床)의 공간이다. 측벽과 전벽은 역시 개방하였는데 여기는 대청의 용도라기 보다는 배벽(背壁)에 감실 (龕室)을 만든 정실(淨室)과 같은 쓰임을 위하여 구성되었던듯이 보인다. 지붕은 맞배이나 내루의 앞부분 만은 합각을 세우고 팔작지붕 하였으며 홑처마에 기와를 이었다.
사랑채 내루에 이어 동편으로 중행랑(中行廊)채가 계속된다. 거기에 중간이 있어 내정(內庭)에 들어서게 되는데 안채는 행랑채 보다 일단(一段)이 높아진 댓돌 위에 자리잡고 있다. 안마당 오른쪽에는 창고가 있으며 안채 좌측 뒤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이집의 가묘(家廟)가 별설(別設)되어 있다.
안채는 ㄴ형중 북변(北邊)이 중심이고 이 부분에 안방 2칸이 있어 부엌으로 이어지고 있다. 방 앞에 전퇴(前退)가 있어 대청에 이어지는데 방 다음 칸과 다음칸, 그리고 ㄱ자로 꺽이어 이어지는 부분까지가 대청이 되어서 6칸의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대청에 이어 건넌방이 있다. 전퇴가 없는 1칸인데 다른 부분의 주간(柱間)보다 넓고 전벽(前壁) 중심에 큼직한 넉살무늬창을 내었다. 아주 넓어서 시원하며 다른 집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형상을 지니고 있는데 이 집의 특색의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처마는 홑처마이며 지붕은 맞배가 ㄴ형으로 이어지고 기와를 이었다.
창건때의 집터는 넓이가 육백평이었고 명기(名基)의 산록(山麓)에 의지하여 고설(高設)하였으며 이른바 지기(地氣)의 윤덕(潤德)을 입어 집안이 융성하여져서 한 때는 여덟채나 되는 집이 들어차 있었고 그 때의 연건평은 무려 백여칸에 이르렀었다고 한다. 지금은 그만 못하나 우람한 집이 자리잡고 있다.
대문채는 5칸이며 가운데 칸이 솟을대문으로 열렸다. 반듯한 내정(內庭)이 있어 들어서면 좌측으로 산록(山麓)에 자리잡은 사랑채가 보인다. 마당보다 훨씬 높게 대(臺)를 모으고 ㄱ자형 평면의 사랑채를 지었는데 4칸 규모의 내루(內樓)가 앞쪽으로 전출(前出)되어 있다. 내루의 누하주(樓下柱)는 마당에 주초(柱礎) 놓고 원주(圓柱)를 세웠다. 축대 높이만큼을 기둥 높이로 잡은 것이다. 내루의 남동벽은 판벽(板璧)하고 문얼굴 내고 그 인방 위로 교창을 내었으나 지금은 문짝, 창 등은 없어져 원상을 보기 어렵게 되었다. 서벽은 판벽없이 개방되었다.
사랑채는 2칸의 방에 이어 주간(柱間)을 약간 좁힌 또 1칸이 있는데 배벽(背壁)을 판벽으로 막은 판상(板床)의 공간이다. 측벽과 전벽은 역시 개방하였는데 여기는 대청의 용도라기 보다는 배벽(背壁)에 감실 (龕室)을 만든 정실(淨室)과 같은 쓰임을 위하여 구성되었던듯이 보인다. 지붕은 맞배이나 내루의 앞부분 만은 합각을 세우고 팔작지붕 하였으며 홑처마에 기와를 이었다.
사랑채 내루에 이어 동편으로 중행랑(中行廊)채가 계속된다. 거기에 중간이 있어 내정(內庭)에 들어서게 되는데 안채는 행랑채 보다 일단(一段)이 높아진 댓돌 위에 자리잡고 있다. 안마당 오른쪽에는 창고가 있으며 안채 좌측 뒤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이집의 가묘(家廟)가 별설(別設)되어 있다.
안채는 ㄴ형중 북변(北邊)이 중심이고 이 부분에 안방 2칸이 있어 부엌으로 이어지고 있다. 방 앞에 전퇴(前退)가 있어 대청에 이어지는데 방 다음 칸과 다음칸, 그리고 ㄱ자로 꺽이어 이어지는 부분까지가 대청이 되어서 6칸의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대청에 이어 건넌방이 있다. 전퇴가 없는 1칸인데 다른 부분의 주간(柱間)보다 넓고 전벽(前壁) 중심에 큼직한 넉살무늬창을 내었다. 아주 넓어서 시원하며 다른 집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형상을 지니고 있는데 이 집의 특색의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처마는 홑처마이며 지붕은 맞배가 ㄴ형으로 이어지고 기와를 이었다.
안채 : 중요민속자료 제206-1호
안채는 ㄴ형중 북변(北邊)이 중심이고 이 부분에 안방 2칸이 있어 부엌으로 이어지고 있다. 방 앞에 전퇴(前退)가 있어 대청에 이어지는데 방 다음 칸과 다음칸, 그리고 ㄱ자로 꺽이어 이어지는 부분까지가 대청이 되어서 6칸의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대청에 이어 건넌방이 있다. 전퇴(前退)가 없는 1칸인데 다른 부분의 주간(柱間)보다 넓고 전벽(前壁) 중심에 큼직한 넉살무늬창을 내었다. 아주 넓어서 시원하며 다른 집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형상을 지니고 있는데 이 집의 특색의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처마는 홑처마이며 지붕은 맞배가 ㄴ형으로 이어지고 기와를 이었다.
사랑채 : 중요민속자료 제206-2호
사랑채는 2칸의 방에 이어 주간(柱間)을 약간 좁힌 또 1칸이 있는데 배벽(背壁)을 판벽(板璧)으로 막은 판상(板床)의 공간이다. 측벽(側壁)과 전벽(前壁)은 역시 개방하였는데 여기는 대청의 용도라기 보다는 배벽(背壁)에 감실 (龕室)을 만든 정실(淨室)과 같은 쓰임을 위하여 구성되었던듯이 보인다.
지붕은 맞배이나 내루(內樓)의 앞부분 만은 합각을 세우고 팔작지붕 하였으며 홑처마에 기와를 이었다.
사랑채
사랑채 내부
사랑채 천장
사랑채 굴뚝
안채 창고
디딜방아
사랑채후면 다락을 바치는 버팀목이 특이하다
안채
안채
부엌
사당
안채 후면
안채에 있는 보호수
안채후면
행랑채와 사랑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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