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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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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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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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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등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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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곤(1427∼1502)의 묘 아래에 있는 재사로, 일명 ‘추원재’라고도 한다. 조선 영조 51년(1775)에 처음 지었고 순조 30년(1830)에 이곳으로 옮겨지었다. 안채의 대들보에 건물의 창건과 이건에 대한 기록이 있어 그 유래를 명확히 알 수 있다. ‘소등재사’라는 집 이름은 이 지역의 지명을 따른 것이다.

 

일명‘추원재(追遠齋) ’라고도 한다. 권태사(權太師)의 18세손인 곤(琨)(이조판서(吏曹判書))의 묘하재사(墓下齋舍)로서 전형적 영남지방(嶺南地方) 재사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一자형 안채와 ㄷ자형 아래채가 마주 향해서 튼ㅁ자형을 이루었으며 양편(兩便) 튼 부분은 담장을 쌓아 연결하였다.

안채는 길이가 5칸(間), 너비가 2칸이며 양단(兩端)의 각 2칸씩이 온돌(溫突)방이고 중(中) 6칸은 대청(大廳)이다. 양온돌(兩溫突)은 서편을 서재(西齋), 동편을 동재(東齋)라 부르며 제향시(祭享時)에는 서재에 노년유생(老年儒生), 동재에 청년유생(靑年儒生)이 사용한다고 한다. 동 ·서 양 대들보에는 재사의 창건(創建)과 이건(移建)에 관한 묵서명(墨書銘)이 그을음 바탕에 잔존(殘存)해 있어 건물의 유래를 명확히 알 수 있게 한다. 홑처마 5량(樑)집이며 이중(二重)의 대들보가 모두 위로 등이 굽은 홍예(虹霓)보로서 유연한 풍(風)을 나타내고 있으며 판대공(板台工)에는 첨차, 소로받침을 갖추었다. 기둥은 모두 방주(方柱)이나 대청의 전(前)2주(柱)와 후(後)2주(柱)는 두리기둥이다. 기둥에는 뚜렷한 흘림이 있으며 여타부재 모두가 태실(太實)하다.

온돌방의 천장은 고미반자(딴고물반자)이고 대청은 연등천장이다. 서쪽 대들보에 쓰여진 기명(記銘)은「건륭사십년(乾隆肆拾年) 을미사월일(乙未四月日) 창립(創立) 도광십년(道光十年) 경인삼월일이건(庚寅三月日移建)」이라 썼고 동쪽 대들보의 기명은「도광십년(道光十年) 경인삼월이십육일(庚寅三月二十六日) 진시입주이십구일(辰時立柱二十九日) 미시(未時) 상량(上樑) 간좌곤향(艮坐坤向)」이라 쓰여 있다.

건륭(乾隆)40년은 영조(英祖)51년(1775)이고 도광십년(道光十年)은 순조(純祖)30년(1830)이므로 창건후 55년만에 이건(移建)되고 이건후(移建後) 지금까지 155년이 경과한 것을 알 수 있다.

아래채는 길이가 7칸이고 너비가 단칸(單間)이나 고패의 길이는 양편이 3칸씩이다. 동과 서에 각기 대문을 두었으며 대문간 곁에 부엌이 있고 부엌 안쪽은 온돌방이다. 양 대문 사이의 1칸은 마구간이고 1칸은 고방이다. 동쪽 귀에는 큰방이 있고 고패에 마루와 또 작은방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향사(享祀) 때 유사(有司)가 출입하며 제수(祭需)를 장만하거나 준비하는 처소이며 준비된 제물(祭物)은 청(廳)에서 소위 간품(看品)하고 산에 올리게 된다. 서쪽에는 2칸 온돌이 있는데 이 아래채를 통칭 주사(廚舍)라 부르며 그 관리는 재직(齋直)이 맡아서 한다.

재사(齋舍)에 이와같은 창건(創建), 이건(移建)의 상량(上樑) 묵서(墨書)가 남아있는 예는 매우 드물며 이 재사는 그 구조 상태에서 창건 당시의 모습이 잘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