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문신 정온(1569∼1641)이 태어난 집으로, 후손들이 순조 20년(1820)에 다시 짓고 정온의 신위를 사당에 모셔 오늘에 이르고 있다.

솟을대문의 대문간채를 들어서면 ㄱ자형의 사랑채가 있고, 사랑채 안쪽으로 一자형의 안채가 자리하였다. 안채의 오른쪽에는 뜰아래채가, 왼쪽에는 곳간채가 있다. 안채의 뒷쪽에 따로 담장을 두르고 3문을 설치한 후 사당을 세웠다.

사랑채 상량대에「숭정기원후사경진삼월(崇禎紀元後四庚辰三月)」의 묵서명(墨書銘)이 있다. 순조 (純祖)20년에 해당되며 서기로는 1820년이 된다. 이 집에는 정조(正祖)의 어제시(御製詩)도 전하여 온다. 현판(懸板)에 목각(木刻)하였다.

「정종대왕(正宗大王) 어제 일 장산색벽차아(長山色碧嵯峨) 종득건곤정기다(鍾得乾坤正氣多) 북거남래동일의(北去南來同一義) 정금견석부증마(精金堅石不曾磨) 숭정사경오(崇禎四庚午) 거창부사신금린순근서(居昌府使臣金麟淳謹書)」라 하였다.「숭정사경오(崇禎四庚午)」는 고종(高宗)7년(1870)에 해당한다. 그리고 하나 더 전하여 오는데「정종대왕(正宗大王) 어제 유제문간공정(諭祭文簡公鄭) 온가묘문(蘊家廟文)」이라 제(題)하였다. 글 말미(末尾)에「숭정기원후일백팔십삼년경오(崇禎紀元後一百八十三年庚午) 추게(追揭)」라 하였다. 순조(純祖)10년(年)(1810)에 해당한다.

정온(鄭蘊)(1569∼1642)은 초계정씨(草溪鄭氏)로 호는 동계(桐溪)이고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화의(和議)에 반대하다가 인조(仁祖)가 나가서 굴복하게 되자 분을 참지못하고 자결하려 하였으나 성취하지 못하고는 벼슬을 물러나 덕유산(德裕山)에 칩거하다 죽었으며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후손들이 그의 생가(生家)를 1820년에 중창(重創)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솟을대문의 대문간채를 들어서면 남향한 사랑채가 있다. ㄱ자형 평면이며 정면 6칸, 측면은 전퇴(前退) 있는 2칸 반이고 ㄱ자로 꺽이어 나온 내루(內褸) 부분이 칸반(間半) 규모이다. 이 집에서 주목되는 점은 두줄박이 겹집이며 전퇴(前退)를 두었다는 것과 내루에 눈썹지붕이 별설(別設)되어 있다는 점이다. 안채도 남향하였는데 정면 8칸, 측면 3칸반의 전후퇴(前後退) 있는 두줄박이 겹집이다. 사랑채의 평면구성과 함께 주목된다.

거창(居昌)은 남쪽 지방인데도 이 지역에 북방성향의 겹집이 있다는 것이 주목된다. 산곡간(山谷間)의 집이어서 그럴 수 있었다면 이웃의 다른 집들도 이런 유형인지를 살펴야 할 필요가 있다.

안채나 사랑채는 기단이 낮은 반면에 툇마루가 높게 설치되어 있다. 고상성(高床性)이 짙다. 역시 남쪽지방의 특색에 벗어나지 않았다. 안채로 들어가자면 사랑채 좌측의 중문(中門)을 통하도록 되어 있으며 중문채는 3칸이다. 중문을 들어서면 방정(方正)한 내정(內庭)인데 사랑채와 안채 사이의 내정 좌우로 각각 부속건물이 있다. 서측엔 정면 4칸, 측면 2칸의 큼직한 곡간(穀間)이 있다. 중방(中枋) 아래에 판벽(板壁)들인 이 곡간 뒤편에 내측(內厠)이 있다. 마당 동측엔 서향한 뜰아래채가 있는데 외줄박이 4칸집이다. 가묘(家廟)는 안채의 후원(後苑)에 삼문(三門)을 연 방곽내(方郭內)에 별설(別設)되어 있는데 전퇴(前退)가 있는 3칸이다.

규모가 큰 기와집들이 부재도 넉넉하여서 장대하고 헌칠하다. 학술적인 가치는 평면구성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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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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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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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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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슬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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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채내부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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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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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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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채부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