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2.jpg 의성김씨(義城金氏) 23대손인 김후선생(金煦先生)의 주택으로 그의 장인(丈人) 권관풍당(權觀風堂)이 1630년경에 건립하였다고 한다. 김후(金煦)(1613∼1696)는 자를 춘향(春鄕), 호를 도암(陶菴)이라 했으며 운천(雲川) 김용선생(金涌先生)의 손자이다. 본 건물은 옛날 지명이 율리(栗里)라하여 지명따라 의성 김씨 율리종택(栗里宗宅)이라 한다.

이 집은 숲이 우거진 낮은 뒷동산을 배경으로 밭으로 둘러싸인 평지에 동향으로 자리잡았는데 축대를 높이 쌓아 올려서 집 전체가 솟아 보인다. 건물의 앞쪽은 넓게 시야가 열려 있으며 전면 좌측 약 200m 거리에 풍산(豊山)으로 가는 국도가 동남에서 서북쪽으로 뻗어 있다.

가옥 형태는 ㅁ형의 안채 부분과 一자형의 사랑 및 대문간·외양간 등으로 구성된 앞채가 결합되어 ㅁ형을 이루고 있다. 앞채는 높은 축대를 쌓고 자연석 주초(柱礎)를 놓아 방주(方柱)를 세웠다. 정면 6칸중 대문간에서 좌측으로 3칸이 사랑 부분인데 사랑방 2칸에 이어 단부(端部)에 마루방 1칸이 돌출하여 좌익(左翼)을 이루었다. 사랑 부분의 전면 3칸에는 동마루를 설치하고 낮은 난간을 돌렸으며 마루밑은 시멘트벽돌을 쌓아 막아놓았다. 마루방의 북벽(北壁) 상부에는 처마 밑에 달아맨 벽감이 설치되어 있는데 널문이 반닫이 장에 달려 있는 것과 같은 모양으로 설치되었다.

대문간의 우측에는 외양간을 1칸놓았고 우측 끝에 온돌방(溫突房)을 1칸 돌출시켜 우익(右翼)을 이루었다. 이 앞채는 집이 퇴락하여 갑술년(甲戌年)(1934)에 해체 중건하였다고 하는데 안채에 비해서 재목도 빈약하고 개구부(開口部)도 커졌다. 안채의 중앙부는 정면 2칸 크기의 대청(大廳)이 안마당 가득히 차지하였다. 대청의 좌측에는 윗머리부터 도장방과 사랑방이 1칸씩 놓여있고 마당쪽으로 연달아서 부엌과 책방이 배치되어 앞채의 사랑방과 연결되어 있다. 대청의 우측에는 2칸통의 안방이 접하였고 그앞에 2칸 길이의 부엌이 배치되어 앞채에 닿았다. 안채의 대청은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상부 가구는 오량가(五樑架)인데 방주(方柱) 위에 보아지등이 없이 들보를 사괘맞춤으로 얹어놓았고 종보위에는 각대공(角臺工)을 세우는 등 간소한 결구(結構)를 보이고 있으나 재목은 비교적 후하게 사용하였다. 대청 뒷벽은 중방 하부에 판벽(板壁)을 꾸미고 각칸(各間)에 양개(兩開) 널문을 내었는데 상·하 문틀의 하면과 상면에 중간설주를 세웠던 장부구멍이 남아있다. 사랑채 부분은 중건으로 인하여 다소 변형이 된 것으로 보이나 안채 부분은 후한 재목과 간소한 결구로 소박한 품위를 지니고 있으며 평면구성 및 중간설주의 유구 등과 더불어 조선 중기 건축의 연구자료가 될만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