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과 역사

이종희

문성식 2010. 10. 4. 15:43

이종희 선생은 서른이 넘은 나이에 중국으로 망명, 의열단에 합류하였다. 의열단에서 이기환과 함께 일제의 밀정인 김달하를 처단하는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이후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의 운영을 도맡고 교관으로 활동하였다. 이 외에도 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 간부로 활동하면서 약산 김원봉 선생과 함께 의열단 계열의 독립운동활동의 중심적인 역할을 해왔다.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으로 편입되자 광복군 제1지대의 총무조장으로 활동하였으며, 광복 후 귀국길 배편에서 고국 땅을 눈 앞에 두고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서른이 넘은 나이에 중국 망명, 의열단 단원이 되다

이종희(李鍾熙, 1890. 4. 19 ~ 1946. 3. 28) 선생은 전라도 금구현 귀미란마을(현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용호리)에서 아버지 전주 이씨 태식(太植)과 어머니 김해 김씨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남정(南亭)이고, 독립운동 초기에는 이인홍(李仁洪)이라는 이명을 쓰다가, 1926년부터는 줄곧 이집중(李集中)이라는 이름만을 썼다. 일제 관헌 당국도 이인홍과 이집중이 동일인인 줄 모르고 있었고, 그의 본명도 끝내 알아내질 못하였다. 연구자들도 그의 이명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지만, 이종희라는 본명은 들어본 이 거의 없이 생소하다. 선생이 어디서 어떻게 성장했고 어떻게 공부했으며 청년시절은 어떻게 보냈는지, 언제 어떤 경위로 중국으로 망명해서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된 것인지도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어디선가 교사로 일하다 전주의 유두환으로부터 백 원을, 박모로부터 또 얼마의 돈을 융통하여 만주로 떠났다는 얘기가 있는데, 그 이상의 구체적인 사실은 확인되지 않는다.


 

선생이 중국으로 망명한 시점과 이유는 미상이지만, 다른 많은 해외 망명자의 경우들처럼 지역의 3.1운동에 주동적으로 참여했다가 일제 경찰의 추적을 받아 몸을 피하게 되었거나, 아니면 1920년대 초의 독립운동 기세 고양의 분위기에 자극을 받아 큰 뜻을 펼 길을 찾아 나섰던 것이 아닌가 한다. 후자의 경우라면,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고 독립운동의 전열 정비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연통제에 의한 국내 특파원으로부터 전해 들었을 수 있고, 서, 북간도 일대에 독립군기지가 설치되어 독립군의 무장투쟁이 활발히 전개되기 시작했음도 풍문으로든 보도를 통해서든 알게 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런 연유로 서른이 넘은 나이에 중국으로 망명했을 선생은 어떤 계기였던지 의열단 조직과 접촉하게 되고 마침내 가입하여 정식 단원이 되었던 것 같다. 1924년 10, 11월경의 의열단 동향에 관한 일제 관헌의 첩보기록에 그가 단원의 한 사람으로 기재되어 있음을 볼 때 그렇다.

  

 

일제의 밀정 김달하(金達河)를 처단하다

의열단은 1919년 11월에 만주 길림에서 김원봉 등 13인의 청년지사가 “천하의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행”한다는 취지로 창립시킨 비밀결사였다. 의열단은 7종의 암살대상과 5종의 파괴대상을 선정하고 식민 지배의 중추기관 파괴 및 그 수뇌들의 제거, 그리고 친일 민족반역자 집단의 숙청을 활동목표로 삼았다. 독립을 위한 의열투쟁 본격화의 도화선이 된 이 노선은 그 후 ‘암살파괴운동’으로도 일컬어지게 되었는데, 의열단이 길림과 북경, 상해로 본부를 옮겨가면서 거듭거듭 국내외 거사를 기획하고 실행해간 데서 그 효과와 의의가 실증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1920년 봄부터 여름에 걸쳐 국내에 있는 일제기관 공격한 밀양 폭탄사건을 필두로, 부산경찰서장 폭살사건(1920), 조선총독부 청사내 투탄사건(1921), 일본 육군대장 다나까(田中) 저격사건, 상해 황포탄 의거(1922), 황옥사건(1923), 동경 황궁 앞 이중교(二重橋) 투탄사건(1924) 등이 대표적인 사례로써, 실로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대담무쌍한 활동이었다. 달성에 실패하고 만 경우라도, 시도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독립운동 진영의 사기를 크게 앙양시키고 일반 대중의 항일정서를 한껏 격발시키는 효과를 낳았다. 게다가 1923년에 신채호가 의열단을 위해 작성해 준 [조선혁명선언]이 발표되자 매우 큰 반향을 일으켜서, 의열단 가입자가 대거 늘어나고 조직세가 부쩍 신장되었다.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선생 또한 1925년 북경에서 일제의 고급밀정 김달하(金達河)를 처단하라는 명을 받게 된다. 김달하는 대한제국 정부의 외교부 하급관리로 재직하다 국망 후 중국으로 건너가, 북경정부의 내각총리를 지낸 친일파 군벌 관리에 접근, 그의 부관(공식 직위는 육군참모부 참사)이 되어 북경 내 한인사회의 유력자로 대접받는 인물이었다. 능변에다 관료적 품위까지 곁들여 독립운동가들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었던 그는 1922년 봄부터 김창숙과도 교유하게 되었는데, 김창숙은 아무런 의심 없이 자주 그를 만나 한학을 논하고 항일방책도 같이 의논했다고 한다. 그러던 1924년의 어느 날, 김달하가 김창숙의 곤궁한 처지를 동정하는 말과 함께 조선총독부 경학원의 부제학 자리를 제의하며 귀국을 권유하였다. 이에 김창숙은 사람들이 평소 김달하를 일본의 밀정으로 의심한다는 얘기가 무근거한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고, 그를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는 동지 이회영과 의논하여, 무정부주의자이면서 의열단 간부인 유자명에게 김달하의 제거를 지시하도록 했다. 이에 유자명이 무정부주의 비밀결사이던 다물단(多勿團)과의 합작으로 처단계획을 세우고, 그 실행자로 의열단원 이기환과 선생을 지명하였다. 그리하여 두 동지는 1925년 3월 30일에 북경에 있는 김달하의 집을 불시 방문하여, 그를 불러 앉혀놓고 미리 작성된 사형선고서를 낭독한 후 포승줄로 교살(絞殺) 응징하였다. 이 사건을 보도한 중국신문 <경보>는 김달하를 ‘유명한 일본의 응견(鷹犬)’이라 칭하며 ‘죽어 마땅한 자’임을 강력히 시사했다. 북경의 중국인들과 한인사회가 보인 반응도 대체로 그와 같았다. 암약 중인 밀정들이야 경악하고 공포에 떨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말의 동정도 표함이 없이 당연시하는 태도를 보인 것이다. 심지어 중국 경찰당국도 살인범의 수배와 체포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의 총무 책임자와 교관으로 활동

한편 의열단은 이즈음 기존의 운동 노선의 전환하기로 결정한다. 중국 내 국민혁명운동의 급진전, 사회주의운동의 시세상승, 암살파괴운동의 한계에 대한 운동진영 내의 비판 격화, 활동재원 궁핍화 등 국내외의 여러 요인들을 고려하여 이후의 목표를 ‘민족혁명을 선도하는 혁명정당 건립 및 이에 따른 군사, 정치활동’으로 정한 것이다. 그리하여 군사, 정치 두 부문의 실력을 쌓고 조직 기초를 다지고자 중국 국민혁명의 책원지인 광주(廣州)에 새 거점을 두기로 하여, 지도부 성원 및 단원 다수가 1925년 가을에 광주로 이동하였다. 선생 또한 이 방침에 따라 상해를 거쳐 광주로 가서, 1926년 1월에 다른 10여 명 단원들과 함께 황포군관학교 제4기 보병과에 입학하였다. 1926년 10월에 군교를 졸업하고 중국군 소위로 임관한 선생은 남창(南昌) 주둔 국민혁명군 부대에 배속되어 근무하면서 의열단 남창지부원으로 계속 활동하였다.
 
선생이 의열단의 옛 동지들과 재회하고 조직에 다시 합류한 것은 1932년 남경에서였다. 광주로의 본거지 이동 이후 눈에 띄게 좌경노선으로 기울어져간 의열단 지도부는 1928년 상해에서 부분적으로 조직을 복구한 후 북경으로 이동하여 1929년부터 1931년 말까지 레닌주의정치학교를 운영하며 국내 대중조직 건설운동에 주력하였다. 그러던 중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독립운동의 여건과 정치지형에 중대 변화가 초래됨을 감지한 의열단 지도부는 1932년 초에 남경으로 본거지를 옮기고, 황포군교 동문 인맥을 활용하여 중국국민당 비밀조직인 삼민주의 역행사와 교섭한 결과로, 남경에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 이때 선생은 남경위수사령부 관할 부대에서 중대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의열단장 김원봉이 마침내 선생을 찾아서 반가운 해후를 하고, 그에게 간부학교 운영 및 교수 참여를 요청한 듯하다. 물론, 의열단원으로의 복귀도 같이 제의했을 것이다. 선생은 이를 쾌히 승낙하여 총무 책임자와 위생학 교관을 겸하게 되었다.

 

 

민족혁명당과 조선의용대의 간부로 활약하다

한편 의열단은 1934년부터 추진된 대동단결 조성운동을 주도하여, 1935년에 5당 통합의 단일대당인 민족혁명당 창립의 결실을 일궈냈다. 그 후 2년 동안의 당권경쟁 과정에서 김원봉 중심의 의열단계가 조직과 당무의 주도권을 장악해간 결과 조소앙계와 지청천계의 이탈이라는 손실을 초래한 대신, 민혁당은 의열단의 후신조직과도 같은 모습이 완연해졌다. 이는 예기치 않게 ‘민혁 대 반민혁’의 정치적 구도를 낳았는데, 그것은 다시 1937년 중일전쟁 발발과 더불어 김구 중심의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와 김원봉 중심의 조선민족전선연맹이라는 양대 연합전선(약칭하여 ‘광선’과 ‘민선’) 조직의 성립을 가져왔다. 이 무렵 선생은 조선민족혁명당의 당무 감찰과 당원 징계를 전담하는 중앙검사위원이 되었고, 1938년 조선의용대가 창단되자 선생은 총대장 김원봉에 의해 총무조장으로 지명되었다. 이때 선생은 중국군에서 완전 퇴역하고 독립운동에만 전적으로 몸을 담아 의용대 내 직무를 수행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간부학교 때에 비해 훨씬 더 복잡하고 규모가 커진 조직인 조선의용대의 본부와 3개 구대(區隊)의 운영 업무를 총괄, 관리하는 직책이니만큼 그 소임은 막중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의용대 창설기념 사진(1938년 10월 10일).

 

 

광복군에서 제1지대 총무조장으로 활동

중일전쟁의 포화 속에서 강남과 화중 전선의 6개 전구, 13개 성을 누비며 중국군 지원 요원으로써 만 2년 동안 다방면의 공작을 벌이던 조선의용대 대원들은 1940년 11월의 확대간부회의에서 일본군과의 직접 대적이 가능한 화북지방으로의 이동을 결의하였다. 무장선전 및 전투공작, 적후공작, 동포획득공작을 위해서였다. 이에 따라 1941년 봄에 의용대 병력의 80% 정도가 황하를 건너 태항산 일대로 이동하였고, 그 후 중국정부는 중경의 의용대 본부 요원과 잔류병력의 한국광복군 편입을 추진하였다. 결국 조선의용대는 임시정부 국무회의의 결의, 중국국민당 군사위원회의 명령, 의용대 자체의 개편선언 발표 등 일련의 절차를 거쳐서 1942년 12월에 광복군으로의 편입이 마무리됨과 동시에 그 제1지대로 개조되었다. 아울러 김원봉은 광복군 총사령부 부사령 겸 제1지대장으로 취임했고, 선생은 이번에도 제1지대 총무조장으로 임명되었다. 군량 수급, 예하 2개 구대 활동의 지도 감독, 병력초모 활동, 대원 교육훈련과 파견 등이 그의 관할 업무가 되었다. 의열단에서 민족혁명당을 거쳐 조선의용대와 한국광복군으로 이어진 김원봉계 조직에서 한결같이 선생에게 총무부서 책임자직이 맡겨진 점을 볼 때, 그는 김원봉이 가장 신임하고 다른 동지들도 전혀 이의가 없는 뛰어난 살림꾼이었음이 틀림없다 하겠다.

   

 

고국 땅을 눈 앞에 두고 위독해진 병세로 세상을 떠나다

한국광복군 제1지대 2대 지대장 시절의 선생.


1940년부터 선생이 거류하게 되었던 중경(重慶)은 분지 지대로서 늘상 안개가 끼고 다습하였다. 그런 기후 탓으로 우리 독립운동자나 그 가족 중에 폐병을 앓고 아까운 목숨까지 잃은 경우가 여럿 있었다. 선생도 바로 그런 경우의 한 사례가 되고 말았다. 1944년경에 득병한 것으로 추측되는 선생은 결국 일선에서 물러나와 병상에 있던 중에 8.15 해방을 맞았다. 임시정부 계열 독립운동가와 그 가족들의 환국은 아주 지체되어 어렵게야 이루어졌다. 환국을 도와줄 미국과 중국과의 교섭에, 그리고 교섭이 타결된 뒤에도 교통편 및 여비 마련에 시간이 많이 걸려서였다. 임시정부 요인 29명이 2진으로 나뉘어 1945년 11월 하순과 12월 초에 개인 자격으로 환국한 후, 임시정부 직원과 그 가족 4백 명 가량의 환국이 4차로 나뉘어 이루어졌다. 한국독립당 인사들과 그 가족들로 구성된 제1차 환국진은 1946년 1월에 중경을 출발하여 육로와 배편으로 한 달여의 여행 끝에 2월 19일 상해에 도착했고, 석 달여를 기다린 끝에 4월 26일에야 미군 LST 함정에 승선해서 상해를 출발할 수 있었다.

 

민혁당 계열 인사들과 그 가족 40여 명은 제2차로 환국할 순서였다. 그렇지만 선생은 병이 깊어 위독한 상태임이 감안되어 제1차 환국진에 포함시켜진 것 같다. 그를 태운 수송선은 4월 29일 부산항에 도착했는데, 바로 하선하지 못하고 검역과 상륙수속이 끝나기를 기다려야 했다. 그런데 바로 그날(음력 3월 28일) 밤, 선생은 고국 땅을 밟기 직전에 여독이 깊어서였는지 선중에서 그만 눈을 감고 말았다. 부인 송단여와 여섯 살 난 아들 병태를 남겨두고 56세를 일기로 작고한 것이다. 김원봉을 비롯한 많은 동지들의 안타깝고 애통한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선생의 유해는 고향으로 운구되어 원평 뒷산의 양지바른 묘소에 묻혔다. 

 

1977년 정부는 고인의 공적을 기리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김영범 (대구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자료 제공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 채순희 사무관

 

 

 

 

'인물과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청천  (0) 2010.10.04
박제상  (0) 2010.10.04
이사부  (0) 2010.10.04
계백  (0) 2010.10.04
원광  (0) 2010.1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