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과 역사

이사부

문성식 2010. 10. 4. 15:41

 

이사부는 우산국 곧 지금의 울릉도를 신라 땅으로 만든 장수로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다. 그것은 그의 공적을 말하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그리고 그는 이제 막 커가던 신라의 성장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이사부는 지혜로웠으며, 그 지혜로 권력의 중심에 다가가는 방법을 알았다.

 

 

신라를 키운 ‘리베로’

이사부(異斯夫)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은 [삼국사기]가 선두에 선다. [삼국사기]는 열전에 이사부를 설정하고 그의 생애를 간추려 소개하였다. 성은 김 씨이고, 내물왕의 4세손이라고 하였다. 그가 살았던 지증왕진흥왕 때의 활약은 대체로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변경의 관리가 되어 가야국을 빼앗았다. 둘째, 우산국을 병합하였다. 셋째, 고구려의 도살성과 백제의 금현성을 함락시켰다. 이 가운데 우산국 병합 사실은 신라본기 지증왕 13년 6월 조에, 도살성과 금현성의 함락 사실은 진흥왕 11년 3월 조에도 각각 기록되었다. 그리고 가야를 빼앗은 일은 열전의 사다함 조에 더 자세히 나온다.

 

“진흥왕이 이찬 이사부에게 명하여 가야국을 습격하게 하였다. 이 때 나이가 십오륙 세인 사다함은 전쟁터에 나가겠다고 나섰다. 왕은 나이가 어리다 하여 처음에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요청이 간절하고 의지가 확고하므로, 마침내 그를 귀당비장으로 임명하였다. 그의 낭도 가운데 그를 따라 나서는 자가 많았다.” ([삼국사기], 열전, 사다함)
 
이렇게 본다면 이사부는 지증왕과 진흥왕을 거치는 동안 한참 커가는 신라의 정복 전쟁에서 선봉장이었던 셈이다. 신라가 지증왕에 이르러서야 나라의 격을 갖춰 나가는데, 이사부 같은 이가 있어서 그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이사부는 신라를 키운 리베로였다. 그의 발끝에서 시작한 정복 전쟁의 공이 굴러, 마지막으로 김춘추라는 스트라이커에게 골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다만 한 가지. 이사부의 주요활동으로 소개한 세 가지 일이 모두 지증왕과 진흥왕 때 벌어진 점이다. 가운데 법흥왕 때를 건너뛰고 있다. 병부령이 되고 국사를 편찬하자고 제안한 일도 진흥왕 때이다. 거기에 혹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

 

 

머리를 써서 이기는 전쟁

어쨌건 그 활약상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로 먼저 정리해 보자. 이사부는 힘만 지닌 장수가 아니었다. 그의 전쟁은 대체로 꾀를 써서 이긴 싸움이었다.  

 

진흥왕 11년(550)이었다. 백제는 고구려의 도살성을 빼앗고, 고구려는 백제의 금현성을 함락시켰다. 물고 물리는 상황, 진흥왕은 두 나라 군사가 지친 틈을 이용하리라 생각했다. 곧 이사부에게 명령하였다. 군대가 출동하여 그들을 쳐서 두 개의 성을 빼앗았다. 이어 성을 증축하고 군사들을 남겨 두어 지키게 하였다. 뒤늦게야 고구려가 군사를 보내 금현성을 쳤다. 그러나 그들은 승리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도리어 이사부가 이들을 추격하여 크게 이겼다. 물론 이사부 혼자의 작전이 아니라 진흥과 이사부의 합작품이라 하겠지만, 이 같은 정보와 아이디어를 낸 이는 이사부였을 것이다. 이보다 앞서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벌하는 싸움은 더 놀라운 지략의 한 판이었다.
 
지증왕 13년(512)이었다. 이사부는 아슬라주(강릉)의 군주가 되어 우산국(울릉도)을 병합하려고 계획하였다. 그곳 사람들이 미련하고 사나워서, 힘으로 항복 받기 어려우나, 꾀를 써서 굴복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나무로 사자를 많이 만들어 전함에 나누어 싣고 해안으로 다가가 “너희들이 만일 항복하지 않으면 이 맹수들을 풀어 놓아서 밟아 죽이겠다”고 알렸다. 우산국 사람들은 두려워하여 즉시 항복하였다.

 

이 일을 두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삼국사기]는 이 싸움이 있기 7년 전에 나라 안의 주, 군, 현이 정해졌고, 이때 설치된 실직주에 이사부가 군주로 앉았다고 적었다. 실직주는 지금의 울진, 삼척 일대인데, 군주라는 명칭이 처음 쓰인 예이다. (신라본기, 지증왕 6년) 아마도 그런 다음 아슬라주의 군주로 옮겼던 것 같다. 그러나 [삼국유사]에는, ‘섬사람들이 바닷물이 깊은 것을 믿고 교만 방자하여 신하된 도리를 하지 않’자, 왕이 ‘이찬 박이종(朴伊宗)에게 명하여 군대를 이끌고 가서 토벌하게 하였다’라고 썼다. 성과 이름이 다르고, 결말에 ‘이종에게 상을 내려 주백(州伯)으로 삼았다’라고 하여, 싸움에 공을 세워 군주가 된 것처럼 썼다.
 
김이 박으로, 박이 김으로 다른 예는 박제상에서도 찾을 수 있었다. [삼국사기]는 박제상으로, [삼국유사]는 김제상으로 썼다. 여기서는 그 반대이다. 그러나 이런 정도의 차이만 넘어간다면 결국 이사부가 새롭게 일어서는 신라에 커다란 공을 세운 인물임을 강조했다 하겠다.

 

 

지소태후의 남편이자 세종공의 아버지

공을 세운 이로서 그 공적이 부각된 데 그친 위의 두 자료를 떠나 [화랑세기]에 오면 이사부는 아연 살아있는 인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삼국사기]에서 이사부의 다른 이름을 태종(苔宗)이라 하였다. 이 이름으로 [화랑세기]를 뒤져보자.

 

태종의 아버지는 아진공이고 어머니는 보옥공주이다. 그런데 태종을 둘러싸고 이들보다 중요한 인물이 부인인 지소태후이다. 지소는 본디 이름이 식도부인이고 법흥왕의 딸이었다. 처음 입종에게 시집을 가서 나중의 진흥왕을 낳았다. 법흥왕의 유명(遺命)으로 영실(英失)을 계부로 맞이하여 황화공주를 낳았다. 아마도 입종이 먼저 세상을 뜬 것 같다. 그런데 무슨 일로 영실과 헤어지고 이사부와 결혼한다. 이사부와의 사이에서는 세종을 낳았다. 6세 풍월주인 세종은 미실의 남편이 되었다. 세종과 미실의 결혼을 추진하면서 지소와 이사부 사이에 나눈 다음과 같은 대화로 둘 사이의 관계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이에 태종을 불렀다. 미실로서 의논하여, ‘며느리를 얻는 데 지아비에게 의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니, 태종이 ‘폐하의 집안일을 어찌 감히 말씀 드리겠습니까’라고 하였다. 태후가 ‘이 처녀는 곧 영실의 손입니다. 나의 우군(右君)으로 영실은 나에게 잘못이 많았기에 꺼렸습니다. 그리하여 좋아하지 않게 되어 결정하기 어려운 바 되어 묻는 것입니다’라고 하니, 태종이 ‘영실은 (법흥의) 총신입니다. 유명(遺命)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지나치게 나무라서는 안 됩니다. 전군(殿君 : 세종을 말함)이 이미 좋아한다면 또한 황후 사도를 위로할 수 있으니 옳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태후가 크게 기뻐하여 ‘사랑하는 지아비의 가르침이 없었다면 나는 잘못할 뻔 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미실로 하여금 궁에 들어오게 하였다.” ([화랑세기]에서)

 

이때는 진흥왕이 왕위에 있었다. 그러므로 진흥을 낳은 지소부인은 태후가 되었는데, 영실의 후손인 미실을 며느리로 들인 것인지 태종 곧 이사부와 의논하는 대목이다. 지아비로서 태종을 존경하는 말투이고, 영실을 생각하면 미실을 곱게 볼 수 없는데, 태종은 전후 사정을 들어 냉정하고 침착하게 판단하라 권하고 있다. 그러자 태후는 그의 조언을 고맙게 받아들인다. 매우 정중한 태도이다.   ‘사랑하는 지아비의 가르침’이라고까지 표현하는 지소부인의 태종에 대한 태도를 보라. 아버지의 명령으로 재혼한 영실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아마도 그를 이어 남편이 되었을 이사부에게는 깍듯하기까지 하다. 이사부의 사람됨을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

 

 

대영웅에서 신으로까지

이사부를 둘러싼 왕실의 복잡한 혈연관계는 이로써 끝이 아니다. 이사부와 지소태후 사이에 낳은 딸이 숙명공주이다. 숙명은 태후 못지않은 문제적 인물이다. 

 

“(4세 풍월주) 이화랑은 위공의 아들이다. (중략) 그때 황화, 숙명, 송화 공주가 모두 공을 따라 배웠다. 공은 이에 숙명궁주와 정을 통할 수 있었다. 그 때 태후는 왕의 총애를 홀로 받게 하고자 모든 일을 공주에게 받들게 했는데, 왕은 어머니가 같은 누이라고 하여 매우 사랑하지는 않았다. 공주 또한 그러하였다. 공주의 아버지는 곧 태종공인데, 그때 상상(上相)으로서 나라를 위한 가장 중요한 신하였다. 그래서 왕은 공주를 소홀히 할 수 없었다. 공주는 총애를 믿고 스스로 방탕하였다. 태자를 낳고 황후로 봉해지자 더욱 꺼림이 없었다. 왕은 평소에 사도(思道)황후를 사랑하여 그 아들 동륜을 태자로 삼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화랑세기]에서)

 

여기서 왕은 진흥왕이다. 그래서 숙명을 일러 ‘어머니가 같은 누이’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태후가 숙명을 총애하는 것은 숙명의 아버지이자 자신의 남편인 이사부에 대한 애정의 깊이와 연관되는 듯싶다. 이로써 태후 덕분에 숙명의 콧대는 한참 올라가 있다. 드디어 진흥왕과의 사이에서 아들까지 낳은 것 같은데, 이는 [삼국사기]에서 볼 수 없는 자료이다. 숙명의 권세는 동복이부(同腹異父) 간인 진흥왕도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나중에 결국 태자가 된 사도황후의 아들 동륜이 아버지의 총애를 받으면서도 자리에 오르기가 더뎠던 것은 바로 숙명 때문이었다. 상상(上相)은 상대등으로 보이는데, 이사부의 위치가 만만치 않고, 지소태후의 입김까지 워낙 거세게 작용하고 있었다. 

 

나중에 숙명은 이화랑과 결혼하여 원광(圓光)과 보리를 낳았다. 원광은 신라 불교를 반석에 올린 사람이요, 보리는 12세 풍월주가 되었다. 그렇다면 원광에게 이사부는 외할아버지이다. 그런 숙명이 자기 아버지 이사부를 얼마나 끔찍이 존경했는지, 다음과 같은 그의 말이 이를 증명한다.

 

“(숙명공주가) 한번은 (보리공에게) 말하기를, ‘나의 아버지 태종 각간은 곧 너의 할아버지이다. 하늘도 높다 않고 땅도 넓다 않는 대영웅이다. 너는 마땅히 신으로 받들어야 한다.” ([화랑세기]에서)

 

이사부는 영웅을 넘어 신으로까지 올라갔다. 물론 숙명이 딸인 마당에 딸은 아버지를 그 이상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렇다고는 하나 부인과 딸에게서 이런 대우를 받는 이사부는 정말 멋진 사내였던가 보다. 대체로 밖에서 멋져 보이는 남자란 실상 안에서는 구실 못하는 형편없는 경우가 많다.

 

 

이사부가 권력의 중심이었던 한 때

이사부와 그의 부인 지소 그리고 딸 숙명을 놓고 그려보는 삼각편대는 막강한 권력의 구조로 보인다. 부인의 사랑은 애틋하고 딸의 존경은 지극하다. 부인은 전남편의 아들인 진흥왕을 꽉 잡고 있고, 숙명은 이부(異父)간인 왕에게서 아들을 낳은 다음 당대 풍월주와 결혼하였다. 어머니와 딸의 행보가 어쩐지 닮아 있다. 그 중심점의 이사부는 상대등 또는 각간이다. 게다가 아들인 세종은 진흥왕에게서 아우라는 말을 들었고, 끝내 6세 풍월주가 되었다.

 

적어도 진흥왕이 실권을 행사하기 이전까지 신라 왕실은 이렇게 이사부 중심으로 움직인 듯하다. [삼국사기]에서, “이사부를 배하여 병부령으로 삼아 중앙과 지방의 군대 일을 맡도록 하였다”(신라본기, 진흥왕 2년)는 대목은 그 하나의 증거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앞에 제기한 의문점 하나가 풀릴 것 같다. 지증왕 대까지만 해도 이사부는 외직으로만 돌고 있었다. 그나마 공적이 있어 역사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지만, 법흥왕이 다스리는 26년간은 공적도 지위도 시원치 않았다. 그러다 법흥왕의 딸 지소와 결혼하였다. 그리고 이사부는 핵심 중앙 관료로 진출하였다. 우연의 일치는 아니리라. 병부령이 된 일 뒤에는 모종의 역학관계가 작용했음에 틀림없다.   

 

이런 이사부의 권한은 적어도 진흥왕 6년까지도 계속되었다. 그 해 7월, 이사부는 제2위인 이찬의 지위에 있었는데, 왕에게 아뢰기를 “국사는 임금과 신하의 잘잘못을 기록하여 만대에 포폄을 보이는 것입니다. (국사를) 정리하여 편찬하지 않으면 후대에 무엇으로 살피겠습니까” 하자, 왕은 거칠부 등에게 명하여 일을 진행하도록 하였다.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국사]가 바로 그 책이다. 그리고 11년에는 백제와 고구려에게서 성을 빼앗기까지 한다. 

 

비록 [화랑세기]를 중심으로 한 자료의 정리여서 그 한계는 있지만, 이사부는 신라 땅에서 권력이 무엇이며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지 알았던 처음 사람이었다.

 

 

 

 

고운기 /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글쓴이 고운기는 삼국유사를 연구하여 이를 인문교양서로 펴내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 필생의 작업으로 [스토리텔링 삼국유사] 시리즈를 계획했는데, 최근 그 첫 권으로 [도쿠가와가 사랑한 책]을 펴냈다. 이를 통해 고대의 인문 사상 역사를 아우르는 문화사를 쓰려한다.

그림 장선환 / 화가, 일러스트레이터
서울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학과와 동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화가와 그림책 작가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현재 경희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http://www.fartzz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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